영화 같은 스토리, 목숨으로 목숨을 구한 사람들
역사의 뿌리
인천시 강화군 주문도는 서해 고도, 작은 섬이다. 1893년 여름 영국의 성공회 신부 2명이 주문도를 방문했다. 그들은 환등기로 예수교의 복음을 소개했다. 그 일을 계기로 작은 섬에 기독교가 뿌리내렸다. 일찍 개화된 주문도는 교육열도 뜨거운 섬이었다.
영화여중, 배재학교, 이화 여전, 연희전문학교 졸업생들을 잇달아 배출했다. 그중 박선생은 배제학교와 연희 전문학교를 나오고 영어에 능통했다. 영국인이 경영하는 광산에서 일한 경력도 있었다. 1923년 건축된 한옥 기와 예배당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인천지방 문화재 14호로 등록되었다.
주문도의 기독교 역사는 교회 연혁과 역사 자료집에 모두 기록돼 있다. 작은 섬의 독실한 신앙심과 교육열이 1950년 6.25 전쟁 시 기적의 밑거름이 되었다.
예언 같은 노래
1962년 초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우리는 신기한 영어 노래를 배웠다. 선생님은 외국 손님이 오면 환영 노래를 불러야 한다며 칠판에 한글로 가사를 적어줬다. 알파벳도 모르는 아이들이 클레멘타인을 불렀다.
"인어캐번 인어캐논 엑스카베이팅 훠어마인,
텔타 어 마이너, 포티나이너 앤히스도터 클레멘타인.
오마이다링, 오마이다링 오마이다링 클레멘타인.
유아 로스트 곤퍼레버 드레드풀 쏘리 클레멘타인."
마이너가 광부인 줄도 모르고, 광부의 딸을 그리워하는 노래인 줄도 몰랐다. 가사의 내용도 모르고 우리는 외국 손님들을 환영하는 노래를 준비했다. 선생님은 외국 손님이 오시면 환영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는 6∙25 전쟁 당시 미국인들이 마을에 왔었다는 걸 몰랐다. 미국 공군들이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탈출해 낙하산을 타고 바다에 떨어졌다는 사실도, 마을의 아버지들이 목숨을 걸고 그들을 구했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6.25 전쟁의 사건
괌 앤더슨 공군기지 제19 폭탄 그룹, 제28폭탄 비행대 소속의 보잉 B-29(44-69866) 폭격기가 한국 전쟁 작전을 위해 오키나와 카데나 기지에 배치되었다. 1950년 7월 12일 오키나와에서 출격한 B-29는 서울 근처 황해도 상공에서 폭격 임무를 수행하던 중 북한 전투기 Yak-9 3대의 공격을 받았다.
포격에 맞아 화염에 휩싸인 B-29는 인천 장봉도 앞바다에 추락했다. 한국전쟁에서 최초로 격추된 B-29였다. 미공군 대원 13명이 B-29에서 낙하산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볼음도와 서검도 사이 상공에 6개의 낙하산이 펼쳐졌다. 서검도에 2명, 석모도에 1명, 볼음도 앞 해상에 3명이 각각 떨어졌다.
B-29가 주문도 상공을 지날 때 2명이 더 낙하했다. 1명은 주문도 남방 갯바위에, 1명은 해상에 떨어졌다. 조종사와 한 공군대원은 육지에 떨어져 북한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조종사는 1951년 안동에서 숨졌다. 공군대원은 1950년 11월 10일 청강진에서 죽었다. 인근 해상과 섬에 떨어진 사람들은 주문도로 이동했다.
바다에서 건진 생명
주문도 주민이 백사장과 갯바위에 떨어진 미공군을 발견했다. 한 병사는 많이 다쳐서 걸을 수 없었다. 농부가 업고 마을에서 영어를 잘하는 박선생에게 데려갔다. 교회 전도사와 주민들도 달려와 도움의 손길을 더했다. 전도사가 부상이 심한 병사를 한의사에게 데려가 응급처치를 받게 해 줬다.
주민들은 겁에 질리고 탈진한 미공군 대원들에게 쉴 수 있는 은신처를 제공하고 위로했다. 어부들은 배를 타고 가 볼음도 앞 해상에 떨어진 3명을 구했다. 고무 튜브에 몸을 의지한 채 바다에서 표류하던 2명도 구조했다. 종적이 보이지 않던 1명을 수색하던 중 수면 위에 둥둥 떠 있는 손을 발견했다.
한 어부가 물속으로 뛰어들어 기절한 미공군을 건져 올렸다. 배 위에서 물을 토하게 하자 기절한 병사가 의식을 회복했다. 볼음도에서 3명과 서검도 2명은 밤중에 소형 선박으로 주문도까지 데려왔다. 그렇게 미공군 7명이 영어로 대화가 되는 박선생 집에 모였다.
목숨을 건 탈출 여정
미공군 7명이 마을사람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마을 유지들이 의논한 끝에 그들을 돕기로 했다. 미공군의 식사를 위해 쌀과 계란을 모았다. 선주에게는 선박과 선원을 제공해 달라고 부탁했다. 1950년 7월 13일 새벽, 박선생 집을 출발한 미공군들이 선박에 승선했다. 부상병은 여러 주민이 들것으로 배까지 옮겼다.
작은 배에 미공군 7명과 인솔자, 선원들까지 13명이 탔다. 돛단배에 운명을 맡긴 필사의 탈출 작전이었다. 영어로 소통하는 박선생이 미공군과 선원들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했다. 배는 덕적도를 거쳐 4일 동안 남쪽으로 항해했다. 발각될 위험을 줄이고자 밤에만 움직였다. 아찔했던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야간 항해를 하던 중 두 번이나 북한군이 배를 정지시킨 것이다. 미공군들은 주민들의 한복 옷을 입고 창고 안에 몸을 웅크린 채 숨어 있었다. 다행히 선원들이 기지를 발휘한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한 미공군은 후에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이 두려웠다"라고 회상했다.
7월 16일 밤, 드디어 영국 호위함 HMS Alacrity을 발견해 미공군 7명을 인계했다. 부상자는 즉시 군함 의무실로 옮겨져 치료받았다. 영국 호위함은 일본 사세보항 해군기지까지 이들을 호송했다. 부상자는 7월 19일 오사카 병원에 입원했다. 주문도 주민들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미공군 7명은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갔다.
희생과 기적과 피의 보복
돛단배로 미공군을 탈출시킨 후에 인민군이 주문도에 들어왔다. 미공군의 낙하산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주문도와 다른 섬을 수색했다. 결국 주문도 주민들이 미공군 7명을 탈출시켰다는 사실을 알았다. 인민군은 미공군을 구조하고 탈출에 도움을 준 협력자들을 색출했다.
인민군은 위협했다. "미공군 1명이 우리 1,000명을 죽일 수 있는데 그들 7명을 살려주었으니 너희는 우리 7,000명을 죽인 것과 같다." 그리고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박선생의 친동생과 주요 협력자 4명을 납치해 처형했다.
배를 제공한 선주와 선원 4 가족은 물론이고 식량을 내준 사람들까지 주문도에서 쫓겨났다. 구출 작전에 적극 가담한 주민의 가족도 거주지에서 추방되었다. 납북돼 처형된 사람의 부인은 마음의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미공군을 구출하는 데 협력한 사람들의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기억과 추모
그로부터 12년 후, 1962년 2월 겨울, 헬리콥터 두 대가 학교 근처 논 위에 착륙했다. 처음 보는 헬리콥터에서 파란 눈의 미공군 장성을 비롯한 외국인들과 정부 관계자들이 내렸다. 늘 배만 타고 살아왔던 섬주민들에게는 생소한 장면이었다. 미국 대사와 미공군에서 6.25 전쟁 당시 미공군 대원 7명을 구출한 공로자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포상하러 방문한 것이었다.
공로자들에게 메달과 포상증서가 수여되었다. 우리는 옆에서 클레멘타인을 불렀다. 이 행사가 열리고 학교에 노래 부른 기억만은 남아 있다. 이날의 행사는 동아일보와 국내 일간지에 실렸다. 그날 우리 주문도에 자신의 목숨을 바쳐 이방인의 목숨을 구한 숨은 영웅들이 있다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미공군 생존자들의 삶
극적으로 생환한 7명의 미공군은 각자의 삶을 이어갔지만 그들은 주문도를 잊지 않았다. 생존자 중 한 명인 Hardway는 공군에 남아 1974년까지 현역으로 복무했다. 이란과 남베트남에서는 고문관으로도 일했다. 2000년부터 명예 근위대 활동을 역임했다.
또 다른 생존자 Barone은 퇴역 후 사업가가 되었다. 그는 1991년 Florida Wilton Manors의 재향군인 공원(Veterans Park Memorial) 벽돌에 처형된 4명과 박선생의 이름을 새겨 기념했다. "내 생명은 구조됐지만 그들의 생명은 그렇지 못했다"면서 경의를 표했다.
그는 말했다. "나는 가장 운 좋은 사람 중 하나다. 그러나 그 운은 주문도 주민들의 큰 희생 덕분이었다. 그들이 우리의 내 생명을 구했다.” 교회 전도사와 교인들, 주민들의 희생과 인류애가 그들을 구했던 것이다.
역사적 의미와 교훈
한국 전쟁 기간 중 구출된 미공군은 총 42명이다. 주문도 주민들이 그중 7명을 구출했다. 생명을 구했지만, 한편으로는 생명을 잃어야 했다. 영웅들은 끝내 희생자가 되었다. 기적의 끝은 비극이었다.
미공군 구출작전은 132년 기독교 역사와 연결되어 있다. 1893년 영국 성공회 신부들이 뿌린 복음의 씨앗이 1950년 미공군 7명의 생명을 구함으로 열매를 맺은 것이다. 빠른 개화로 인한 교육열은 인재를 배출했다. 미공군 7명을 구하기 위해 온 마을이 발 벗고 나섰다.
바다에 뛰어들어 병사를 건져낸 어부들, 미 공군 대원들을 업고 나른 농부들, 흔쾌히 배를 제공한 선주들, 식량을 모으고 은신처를 제공한 주민들. 모두가 한마음 한 뜻으로 미공군 7명을 구출했다.
1962년 초등학생들이 한글로 배운 클레멘타인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었다. 광부가 딸을 잃고 그리워하는 내용의 슬픈 가사는, 손님을 맞이하는 환영곡으로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클레멘테인은 생명을 구한 기적의 노래이자, 또 다른 생명을 잃은 추모의 노래였다.
처형된 4명 주민을 그리워하고, 생존한 7명이 미공군이 함께 부르는 예언의 노래였다. 주문도 사람들도 이방인을 구하고 희생된 영웅과 가족들을 추모하며 그리워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영웅들을 그리워한다.
서해의 고도, 작은 섬에서 일어난 기적. 아무 조건도, 대가도 원하지 않고 목숨으로 목숨을 구한 이야기. 그것이 주문도 역사 노래이며 깃발이다. 작지만 의연하고 정체성이 분명한 곳이다. 굳건하고 뿌리가 깊은 섬이다.
* 필자는 1962년 환영식에서 클레멘타인 노래를 부른 학생 중 한 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