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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산 Sep 24. 2021

평화유지군은 왜 동티모르에 갔을까?

“평화”를 모르는 평화유지군 ②

 파병 선발 소식과 함께 곧바로 경기도 광주에 있는 특수전교육단으로 집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새롭게 만들어진 해외파병 부대는 현지 적응과 파병지의 임무수행을 위해 출국 전까지 약 한 달간 교육훈련을 받아야 했다.


 동티모르라는 낯선 땅에 가게 된다는 두려움이나 새로운 선임들을 만나 겪게 될 어려움 따위는 걱정되지 않았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이등병의 일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할 따름이었다.   


 특수전교육단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대한민국 제522 평화유지단” 부대원들이 모여 있었다. 전체 인원은 420명이 넘었는데, 나를 포함한 20여 명의 병사들은 단본부 소속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처음 만난 단본부 병사들은 서로의 계급에 상관없이 존칭을 사용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각자 부대에서 생활하다가 난생처음 만난 사이였기에 군복에 붙은 계급장만 보고 선뜻 말을 놓기엔 어색한 분위기였다. 특수전교육단으로 출발하던 아침까지만 해도 “이병! OOO!” 관등성명을 외치며 자대를 뛰어다니던 나에게 이곳은 천국이었다.


 하지만 평화유지군도 군대는 군대였다.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각자 계급에 따라 서열이 정해지고, 이등병이었던 나는 또다시 부대의 막내가 되었다.


 단본부 선임들은 법무, 행정 등 자신만의 확실한 주특기를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은 해외에서 생활하거나 공부했던 경험이 있어 영어도 능숙했다. 한동안은 이런 선임들을 보며 어떻게 내가 선발되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에도 잔심부름을 도맡아 처리할 이등병이 필요했을 테니 아마 그런 이유로 내가 뽑히게 된 게 아닐까 생각했다.


 동티모르에 파병되는 대한민국 평화유지군의 공식 명칭은 “상록수부대”였다. 상록수부대의 주요임무는 동티모르의 불안정한 국경선을 통제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항구로 들어오는 유엔의 각종 물자보급 선박의 안전을 확보하고, 동티모르 난민이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지원하는 활동도 주요임무 중 하나였다. 지역의 재건을 돕기 위해 농기구를 정비해주고, 순회진료와 함께 구호품을 전달하는 것도 중요한 임무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420 명의 부대원  대부분은 치안유지 활동을 책임지는 특전사 요원들이었고, 나머지는 의료공병 대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999년 11월 인도네시아 군이 철수한 후 동티모르로 돌아온 난민들 (출처: https://www.bbc.com/news/world-asia-pacific-14919009)


 특수전교육단의 하루하루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낯선 군대식 영어 표현들을 익히느라 바쁘게 지나갔다. 이등병이었던 나에게 주어진 업무가 무슨 의미를 갖는지, 부대 전체가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할 능력도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동티모르에 대해서만큼은 좀 더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또다시 누군가 나에게 동티모르에 대해 물었을 때 면접장에서처럼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파병 준비 행정업무를 처리하며 동티모르에 대해 조금씩 알아갈 수 있었다. 동티모르는 15세기 초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포르투갈과 일본, 인도네시아로 이어지는 식민 지배를 받으며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은 나라였다. 하지만 독립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주민들의 기나긴 게릴라 항전 덕분에, 동티모르는 1999년 8월 마침내 유엔의 감독 아래 주민투표를 거쳐 독립을 이룬다.


 그러나 이번에는 인도네시아를 지지하는 동티모르 민병대가 문제였다. 동티모르 독립을 반대하는 민병대가 일으킨 유혈 폭력사태로 약 20여 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고 천여 명의 주민이 피살된 것이다. 사태는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유엔은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결국 평화유지군 파병을 결정한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도 유엔의 요청을 받아들여 평화유지군을 파병하게 된 것이었다.  


 파병을 불과 며칠 앞두고서야 난 왜 우리가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동티모르에 가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동티모르에 대한 이런 기본적인 정보도 모르면서 파병 면접을 보러 갔었다니... 누가 이런 사실을 알까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대에서의 숨 막히는 이등병 생활을 벗어나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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