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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그리뜨 Feb 01. 2023

절대음감의 음악 사랑과 취향 변천사

feat.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자화자찬 주의*


어떻게 미화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 이야기는 비범하기 짝이 없다. 4살인 내게 작은 피아노 건반을 사줬는데 어느날부터 학교 종이 땡땡땡이라던가 떴다 떴다 비행기 같은 간단한 노래들은 듣고나서 알아서 치더란다. 그리고는 엄마에게 피아노 학원을 보내달라고 했단다. 그렇게 해서 5살, 나는 피아노 학원 역사상 가장 어린 학원생이 되었다. 학원을 가기 위해서는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 작은 신호등을 건너야 했는데 엄마가 대부분 데려다 줬겠지만 어떤 날들 어떤 시간들에는 초등학년 고학년 언니 오빠가 우리집 앞에 나타나서는 나를 통원시켜주곤 했다.


초등학교 6학년때는 쇼팽의 즉흥환상곡(나무위키에 의하면 "오른손이 넷잇단 16분 음표를 연주할 동안 왼손은 셋잇단 8분음표를 연주하는", 이런걸 폴리 리듬이라고 한단다)으로 동네 피아노 학원 연주회의 대미를 장식하며 학부모들의 기립박수와 악수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이런 것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연주회를 한 것도 기억이 나고 즉흥환상곡은 몸과 손가락이 아직도 기억을 한다.


만으로 3살 혹은 4살, 무엇이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스폰지같은 나이에 피아노를 시작해 미국에 오기전, 한국 고등학생 시절까지 동네 피아노 학원을 취미 삼아 다녔다. 세원 피아노 학원장님은 5살 나를 원장님이 직접 가르치셨는데 음이름이 아닌 계이름을 입으로 부르면서 피아노를 가르쳤다고 했다. 어린 나이의 학생, 선생님의 의도적이고 실험적인 교육. 절대음감의 필요충분조건일까? 후천적으로 충분한것일까?


절대음감이 경험하는 소리에 대한 예를 들자면 이런 것 들이 있다.

1. 현악기를 귀로 튜닝을 할 수 있음

2. 아는 노래는 악보 없이 대충 음을 따서 연주할 수 있음 - 어차피 음악이 들린다기보다는 계이름들이 들림

3. 차 문여는 "뾲뾲" 소리를 듣고 어느 브랜드의 차인지 알 수 있음, 특히 내 차 브랜드 음들은 다 똑같기 때문에 어디서 들어도 혼다들이 열리는 걸 알 수 있음

4. 나가수 경연을 하던 시절, BMK가 아름다운 강산을 라이브로 불렀는데 녹음된 앨범 버전보다 한 키가 낮아서 그렇게 거슬릴 수가 없었음 하지만 같이 봤던 다른 사람들은 별 코멘트가 없었음 이건 집착임


엄마에게는 나의 삶에 음악, 특히 피아노를 각인시키겠다는 굳건한 다짐이 있었다. 그녀는 다짐을 이뤄내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이며 그녀의 철학이 나의 삶을 음악으로 인해 풍요롭고 긍정적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부모님이 먹여주는 밥 먹고 입혀주는 옷 입는 동안엔 피아노를 배웠고 그렇게 교육을 받은 덕분인지 대학에 가서는 공대와 경제과 복수전공을 하면서 음대생들과 함께 재즈 이론 수업과 작곡 수업을 듣기도 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수업들도 즐거운 기억으로 남았지만 누가봐도 그 수업에서 내가 제일 딸리는 수업을 듣는 동안은 가끔 비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음대생이라고 해서 아무나 절대음감이 있는 건 아니여서 재즈 이론 교수님이 재즈 화음 프로그래션을 가르치면서 피아노를 치실 때면 이게 무슨 화음 베이스인지 얘기하라고 내 이름을 불러대기 일쑤셨다. 하하하.




피아노를 배우고 연습하면서 그리고 지금까지 어떤 음악가를 사랑하는 확고한 시절들이 있었다. 그 당시 나의 심리 상태나 어떤 곡을 배우고 있는가가 어떤 작곡가를 좋아했는가와도 연관성이 있을 것 같다. 내 안의 클래식 타임라인이랄까.


베토벤 소나타를 치기 시작하면서는 베토벤의 심오함과 비장함을 사랑했고 연습의 결과로 표현할 수 있었던 비창, 월광 3악장을 특히 사랑했다. 고뇌에 가득한 어두움이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가장 오랜 시간 사랑한 아주 소중한, 나의 청소년 기에 정체성 확립에 영향을 준 음악가이다. 베토벤은 음악의 아버지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니고 무려 성 중립인 음악의 성인 혹은 악성. 음악의 역사에서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인물로 모짜르트와 함께 고전파 일구고 완성하였으며 음악의 편도가 낭만주의로 넘어갈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하고 간 위대한 인물이라고 찬양을 하고싶다. 언제나 저 마음 한구석에 넘버원은 베토벤이 아닐까. 베토벤을 좋아할 때는 피아노 협주곡을 잘 몰랐는데 피아노 협주곡 3번을 들어보자. 임윤찬 연주는 개인적으로 당대 최고라고 생각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eLDc3KRZBfM&t=128s&ab_channel=TheCliburn


브람스를 좋아하는 시절도 있었다. 브람스를 좋아하게 되었던 건 베토벤을 좋아했기 때문이였다. 그리고 원초적으로 맛있는 맛의 디저트를 팔던 텍사스의 카페 이름이 브람스였다 베토벤을 뮤즈로 생각하고 본인이 베토벤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자처 및 타처 사람이었어서 자연적인 현상이였던 듯 하다. 특히 21곡으로 된 헝가리안 댄스 시리즈를 좋아해서 시디로 구워 차에서 많이 들었었다. 헝가리안 댄스에는 동유럽스러운 제목탓인가, 편견인가! 국민파적인 향이 진하게 느껴진다. 무도회용 음악임에도 단조에 춥고 해가 뜨지 않은 곳에 어울릴 듯한 음악들이다. 가보지 않은 동유럽이지만 그곳은 낭만과 로맨스가 가득한 곳 일 것이다. 엄마랑 오스트리아에서 금이 번쩍번쩍 칠해진 멋있는 베뉴에서 오케스트라를 보기를 소망한다. 5번은 누구나 아는 국민 헝가리안 댄스 곡이니 1번을 들어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6tqOMxaGgBU&ab_channel=DeutscheGrammophon-DG


대학 후반부에는 재즈에 심취하게 된다. 크리스마스면 늘 들었고 한때 마음을 나누었다고 생각한 그가 좋아했던 재즈. 더 알고 싶어서 jazz theory라는 음악 전공자용 수업을 들었다. 수업 때마다 멋진 재즈 화음 프로그레션을 듣는 게 너무 좋았다. 매 수업이 재즈 공연 같았다. 재즈는 보통 음악 능력치로는 즉흥적인 화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범접이 불가능하다는 게 나의 생각이라서 즉흥으로 재즈 화음을 쌓아가는 것이 가능한 사람들에게 굉장한 리스펙트를 가지고 있다. 결정적으로 학교에서 교수님들이 하는 10불 내고 보러가는 재즈 공연들이 특히 좋았다.


쇼팽도 좋아했다. 역시 피아노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돌아 돌아 쇼팽인걸까. 녹턴, 왈츠, 마조르카, 스케르쪼, 에튜드, 콘체르토, 피아노 협주곡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이 낭만파의 정수를 보여준다. 에뛰드 몇개 끝내주게 연주 할 수 있는 정도만 되었어도 참 좋았을텐데. 내 파트너는 강경 쇼팽파라 내가 라흐마니노프 찬양을 하면 그런 복잡하고 심각한게 뭐가 좋냐고 그러는데...


2020년대를 들어서며 라흐마니노프가 견고한 최애로 떠올랐다. 내 마음속 베토벤, 쇼팽의 지분이 사라질 리가 없지만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프리클루드로 몇 개로 시작 했는데 피아노 협주곡 2번으로 갔다가 피아노 협주곡 3번 임윤찬의 연주 및 해석은 라흐마니노프의 곡을 천상계로 올려놨다고 생각한다. 라흐마니노프에 빠진 이후로 다양한 피아니스트의 협주곡들을 감상해왔는데 호로위츠, 아르게리치, 지머만, 조성진, 임윤찬만 놓고봐도 임윤찬은 독보적이다. 완벽한 속도감, 오케스트라와 지휘자와의 호흡, 강해야할 때 강하고 로맨틱할 때 한없이 로맨틱한, 장엄하고 웅장하지만 한없이 약하고 가녀린. 특히 자신의 피아노 부분을 해내고 오케스트라를 바라보는 임윤찬은 어린 나이로는 믿기 힘든 카리스마와 깊은 음악의 세계를 보여준다. 임윤찬 라흐마니노프 3번은 버킷리스트다. 작년부터 매일 3번씩은 듣는 거 같은 임윤찬 라흐마니노프 피협 3번. 라흐마니노프는 웅장하며, 거대하고, 섹시하고, 야심차며, 복잡하고, 혼란스럽지만 그 안에서 완벽한 조화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28분 30초부터 피아노 솔로에 집중해보자. 오케스트라에게 바톤을 넘겨줄 때 임윤찬은 오케스트라와 완전 하나되어있는 것 같은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10대 청년이라고 하기엔 정말 놀라운 카리스마다. 난 이 공연 끝에 늘 관중들과 함께 박수를 친다.

https://www.youtube.com/watch?v=GvKQKnIVy1I&ab_channel=TheCliburn


호로위츠도 좋지만 다른 버젼을 보고싶다면 1982년의 파워풀하고 정확한 타건, 스피디함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아르게리치를 한번 보자. 최애 공연은 여전히 임윤찬. 임윤찬은 이미 세계 반열이라고 생각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MOOfoW5_2iE&t=296s&ab_channel=mmoynan



스파티파이가 2022년에만 라흐마니노프 곡을 2,025 분 들었다고 데이타를 보여줬는데 스파티파이만으로 34시간을 들었을 뿐 유튜브로 본 시간 까지 하면 못해도 배의 시간을 라흐마니노프에 보냈던거 같다.


그렇게 라흐마니노프를 마음에 품고 살고있는데 노부유키가 시애틀 심포니와 피아노 협주곡 2번 협연을 온다고 했다. 현재 최애는 3번이였지만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88불이나 되는 거금을 내고 오케스트라 Y열 한중간 석에서 봤는데 너무 좋았고 좋았고 좋았다. 표현력이 나쁜 나의 한계다.


1악장에서 피아노 솔로로 시작한 후 현악기들이 도~레 도~레 도시b라b시솔 절대음감은 음악이 이렇게 들려요 조인하는 부분에서 감동과 웅장함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스피커로 듣던 것 보다 훨씬 더 웅장하고 대단해서 였던 것 같다. 따뜻했다.


4월달에는 시애틀 심포니에서 라흐마니노프 피협 3번이 계획되어있다고 하는데 몹시 기대가 된다.


요즘 내 최애는 라흐마니노프이지만 아가가 생긴다면 베토벤이나 라흐마니노프보다는 모짜르트를 들려주고 싶을 것 같다. 그럼 또 모짜르트가 좋아지는 시기도 오겠나? (앗, 모짜르트의 라 크리모사를 잊었다)




오래 전부터 절대음감과 언어 습득력에 관계성이 있다고 가설을 세우고 주장중인데 이거 같이 연구해보실 대학원생 분 있으시면 연락주세요. 샘플이 되어드립니다. 돈이 되는 연구인지는 보장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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