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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그리뜨 May 11. 2023

대충 사는 직장인의 강제 커리어 플랜

feat. 직원 커리어 개발에 진심인 회사

5월은 회사에서 커리어 개발, 계획을 세우는 시즌이다. 커리어의 장단기 목표, 그것을 이루기 위한 과정과 방법들에 대해 매니저와 논의를 한다. 업무적인 관심사가 무엇인지, 그 관심사에 대해서 어떠한 방법으로 더 깊고 넓게 공부할 것인지, 지금하고 있는 일 다음으로는 어떤 직무를 맡고 싶은지, 그 보직을 맡기 위해서는 어떤 트레이닝을 거쳐야 하는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매니저에게 공유하고 피드백을 받는 시간을 갖는다.


매니저가 작년 연말 평가 미팅을 끝 마치며, 이런 말을 전했다:

“마그리뜨, C팀에서 마그리뜨에 대한 평가가 아주 좋았어. C팀에 오고 싶은 생각은 없냐고 그 팀 디렉터가 물어보대? 관심 있으면 그 팀 사람들이랑 한번 얘기해 봐"

한 우물을 팠으면 끝까지 파야 되는 걸로만 알고 있던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코멘트라 매니저에게 어벙하게 대답을 하고 회의실을 나오는 순간부터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매니저가 내가 맘에 안 드나? 그래서 다른 팀으로 보내버리려고 하는 건가? 영어도 제대로 안되는데 어딜 봐서 다른 회사를 관리하고 협상하는 테이블에 앉혀놓겠다는 거지? 밀레니얼 마그리뜨는 하고 있는 직무나 계속 열심히 하면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서 매니지먼트로 가겠지?라는 막연하고 수동적이며 수직적이고 보수적인 계획만 가지고 있던 차였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궁금했다. 어떤 면을 보고 긍정적인 피드백을 줬는지, 늘 그들과 함께 일해왔지만 정확히 그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왜 내가 그 일과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한 게 너무 많아서 연말 평가가 끝나고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른 뒤, 좋은 피드백을 줬던 그 팀 매니저랑 만나서 얘기를 했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했고 그 업무를 맡게 된 나를 상상해 보았다.  마음이 약간 설렜다.


나의 매니저는 이 회사 뉴저지의 한 공장에서 인턴으로 시작해 1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미국 전역을 (5개 주의 5개의 다른 오피스) 누비며 시니어 매니저까지 올라온 인물이었다. 그가 지금 그의 자리에 오기까지 늘 같은 필드에서 일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를 보고 빨리 깨달았어야 했다. 내 커리어는 내가 빚어가기 나름이라는 것을.


두려웠다. 매니저가 내가 다른 팀 매니저랑 얘기했다고 하면 기분 나빠하지는 않을까. 매니저에게 지금 있는 팀이 아닌 다른 팀에 관심이 있다고 하면 찍히는 건 아닐까. 잘릴 때 1순위가 되는 건 아닐까.


어느 날, 매니저가 어떤 미팅에 대신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해서 화상 미팅에 들어갔는데 C팀 디렉터와 매니저도 들어와 있는 미팅이었다. 의도적이었을까? 어쨌든 매니저에게 내용 전달을 해야 하니 열심히 미팅을 요약해서 적고 있는데 C팀 디렉터에게 미팅 내용에 대해 1:1 채팅 메시지가 끊임없이 날아왔다. 나는 멀티 태스크가 가능하지 않은 사람인데 미팅 내용 이해하면서 노트 쓰랴 메시지 답장하랴 스트레스 만땅의 미팅이었다. 그리고 미팅이 마무리가 될 때쯤 메세지로 “언제든지 우리 팀에 대해서 더 알고 싶음 알려줘!" 라며 쐐기를 박았다. 살포시 라이크를 날려줬다.


이건 도대체 뭔 상황인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 회사의 멘토, 학교 선배, 부모님, 심지어 인사팀에서 일하시는 엄마 친구까지 조직에 오래 몸담은 사회생활 고수님들께 조언을 요청했다. 아빠를 제외한 모든 이가 관심이 있고 하고 싶은 일이라면 도전해 보라고 했다. (돈도 더 준다는데?) 그렇게 몇 번을 걸쳐 강력하게 오는 제안이라면 받아들이는 것이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나 회사 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조언도 있었다. 그런데 아빠는 내가 걱정하는 부분(매니저한테 찍히면 어떡하냐, 매니저는 네가 팀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냐, 니 프로젝트는 비중이 있지 않은 거냐, 그딴 매니지먼트보다는 R&D 쪽에 남는 게 좋지 않겠니, 등등)만 콕콕 집어 상기시켜 주었다. 부모를 뛰어넘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다시 한번 느끼며 내 나이가 서른 중반이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이니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기로 했다.


용기를 냈다. 나는 무언가를 오랫동안 깊게 파는 스타일이 아니다. 나의 관심사는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늘 넓고 얕은 것에 있었기 때문에 비지니스를 얕지만 넓게 보는 팀에서 나를 좋게 생각했다는 건 내가 그런 인간으로 그들에게 비쳤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조언을 주었던 누군가는 회사는 너보다 너를 더 잘 알걸, 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C팀 디렉터를 몇 개월 만에 사무실에서 마주쳤을 때 그는 내게 “let's chat!"이라며 그는 다시 한번 러브콜을 날렸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다른 팀 보스랑 따로 이렇게 얘기를 해도 되는지 눈치를 주지도 않는 매니저의 눈치를 보며 C팀의 디렉터에게 화상 회의를 요청했다. 자기네 팀이 어떤 일을 하는지 프레젠테이션으로 보여줘도 되겠냐면서 이 팀에 관심이 있으면 지금 하는 테크니컬 하는 일들을 넘어 비지니스적인 미팅들에 참여를 하고 쉐도잉을 하면 좋겠다는 조언을 해주었다. 사실 자기네 팀 인력 계획에 이미 나를 포함해 놨다며, 자기를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지 말아 달라는 당부로 미팅을 마무리했다. 그러게요? 아직 한다고 하지도 않았는데요?


흘러 흘러 되는대로 살겠어요를 모토로 살아온 나는 구체적인 커리어 혹은 삶의 플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것도 어찌 보면 흘러가는 대로 나 좋다는 팀에 가겠다는 거긴 한데  겸손이 미덕인 동양의 한 나라에서 나고 자라 묵묵히 내 일만 열심히 하면 다른 사람들이 알아줄 거고 시간이 지나면 승진을 할 것이다, 는 만국 공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데도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겸손하되 자화자찬 및 자기 PR은 필수 스킬이며, 성과주의는 전쟁이고, 매니지먼트가 돈을 많이 받는 이유는 그만큼 일을 많이 하고 책임감이 크기 때문인 것이었다. 일도 재밌고 돈도 많이 벌고 싶으니 구체적인 목표라는 걸 세우고 야망이라는 것을 가져본다. 물론 세부적인 개발 계획이 있지만 대충 크게는 이런 내용을 매니저에게 공유했다. 동방 예의지국에서 온 마그리뜨는 아직도 약간은 낯간지럽다.


나는 1-2년 안에 팀 내 승진을 하겠어요!

나는 3-5년 안에 팀 내 관리자가 되겠어요! (니 자리는 곧 내 거니 얼른 올라가세요!)

나는 1-2년 안에 C팀의 관리자가 되겠어요!


커리어 플랜이랍시고 매니저 앞에서 뻔뻔하게 늘어놨더니 그 또한 마그리뜨! 아주 쏠리드 한 플랜이야! 네가 그 목표를 이룰 수 있게 서포트해줄게! 라며 자신의 to do list에 C팀 디렉터와 면담하기를 적더니 한 술 더 떠서는 혹시 미드웨스트에 있는 R&D 글로벌 본부 갈 생각은 없냐는 질문을 던져온다. 또 예상 밖의 코멘트에 어벙하게 음... 거기가 알다시피 내 관심 분야의 메카긴 한데 한국 사람, 한국 마트 없는 중서부에 살고 싶은지는 모르겠어! 근데 생각은 해볼게! 로 대화를 마무리하며 괜히 중서부의 그 도시의 집값은 얼마나 하나, 찾아본다. 바빠 죽겠는데 회사가 즐겁다니, 드디어 미쳐가는 거 같다! 이러다 또 꼬드김에 넘어가서 R&D 가겠다고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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