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벗에게,
너와 얘기하고 싶은 주제가 참 많구나. 런던과 파리에서 찍은 인생샷들도 공유해야 하고, 현이 파우치에서 버려지면서 내 파우치로 입성해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찾아 헤매던 인생 레드립을 찾은 것에 대해서도 말해줘야 하는데 말이야.
프랑스는 너무 좋았어. 가보지 못한 나라가 수두룩하지만 4년에 한 번씩은 꼭 오자는 약속을 할 만큼. 생샤펠의 콘서트는 우리가 기대한 것만큼 훌륭하지는 않았어. 콘서트가 몹시 상업적이었거든. 그렇게 빠른 비발디 사계는 처음 들어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그래도 스테인글라스는 멋지더라. 정말 멋진 예배당이었어. 스테인글라스에 새겨진 예수님의 그림들을 보면 성경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도대체 저건 다 어떤 이야기일까 하고 말이야.
네가 파리에서 그렇게 맛있다던 케밥 집들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건지, 파리에 도착한 날 생샤펠에서 콘서트가 끝나고 밤은 깊지만 아직도 노을이 지고 있는 그 시간에 퐁뇌프와 루브르를 지나 집으로 걸어가다가 시간이 더 늦어지면 먹을 걸 살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들렀던 케밥집은 아쉽게도 별로였어. 케밥 러버라 내심 기대했는데 말이야. 미국에서 좋아라 하며 먹었던 케밥들은 주로 소고기랑 양고기를 믹스한 스타일인데 파리에서 첫끼로 먹었던 케밥은 소고기와 칠면조 믹스라고 쓰여있던 것 같아. 내 입맛이 극 달고 극 짠 미국 입맛에 길들여진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
너의 파리 여행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부츠에 무릎을 한 짝 내놓은 강행군이었다고 했었는데 파리는 그럴 수밖에 없더라. 걸으면 걸을수록 예쁜 것들이 계속 나타나니까 말이야. 런던에서는 런던이 그렇게 좋았는데 파리에 도착한 후 런던을 잊고 말았지 뭐야. 런던이 더 웅장하고 남성적이라면 파리는 아기자기하고 페미닌 한 느낌이라고 생각했어. 모든 방면에서 디테일과 디자인이 남다르더라. 특히 파리의 중년들의 스타일은 정말 독보적이었어. 아름다운 것들을 눈에 많이 담고 살면 본 것들을 닮아 아름다워지는 걸까.
첫날 첫 스탑으로 에펠탑을 가다가 즉흥적으로 앵발리드로 행선지를 바꾼 건 여행의 최대 실수였던 것 같아. 다음에 파리에 가면 꼭 에펠타워부터 가서 잔디에 돗자리를 펴고 누워서 하늘과 에펠탑만을 바라볼거야. 마지막 이틀, 에펠 타워 앞에서 급하게 사진만 찍고 떠나야 했던 게 유난히 아쉬워. 군국박물관이니 나폴레옹 묘 이런덴 뭐 하러 숙제같이 갔나 몰라. 샹젤리제는 라파예트 백화점말고는 생각보다 별거 없었고 엘리제궁이 좀 궁금하긴 했지만 개선문도 먼발치에서만 바라봐야 했어. 나폴레옹 가족들의 묘를 보고 나서는 판테온 같은 사람들이 묻혀있는 곳은 안 가도 되겠다고 생각했어.
밥을 우선순위로 하지 않으면 밥 먹기가 쉽지 않더라. 그래도 달팽이는 맛있어서 몇 끼를 먹었고 숙제같이 먹은 푸아그라도 샐러드랑 먹으니 맛있어서 만족스러웠어. 치즈가 드글드글해 느끼해서 음식들이 입맛에 맞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음식들이 슴슴해서 어떤 식당에서는 소금을 쳐서 먹어야 할 정도였어. 동생이 네이버 블로그로 찾은 어떤 유명 식당에 일부러 찾아갔었는데 패티오의 1번 테이블부터 10번 테이블까지 한국인들로 가득 차 있어서 가족들이 식겁한 이후로 우리는 일부러 관광객이 없는 음식점을 찾아다녔어. 오늘의 메뉴가 매일 바뀌는 그런 식당에 가서 먹으면 주로 맛있더군.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차려입고 나와서 오늘의 메뉴인 소고기 타르타르를 먹고 있던 앵발리드 앞 식당은 압구정 현대백화점을 연상케 했고 어느 해가 지는 시간 숙소 근처에서 한참을 헤매다 패티오에서 와인 한잔과 오늘의 메뉴를 저녁을 먹은 식당도 좋았어. 다음 날 그 식당 맞은편을 걸어가다가 식당 주인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가 우리를 알아봤는지 크게 손을 흔들어줬어. 동네 주민이 된 것만 같아 기분이 되게 좋았어.
돈을 쓰러 가서였겠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참 친절했어. 프랑스인들은 콧대가 높을 거라고 큰 편견을 가지고 언어가 불편할까 봐 두려움에 떨며 갔는데 봉수, 봉수아ㄹ헤, 빠흐동, 실부쁠레, 멯싀 열심히 인사하면서 영어를 하면 친절하게 받아주지 않은 사람은 없었어. 오히려 외국인인 나에게 대놓고 영어를 했을 때가 섭섭했어. 둥글둥글 대충 하는 것 같은 시크한 불어를 원어민 버전으로 더 들어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프랑스 뽕이란 이런 건가 봐. 특히 r이 ㅎ소리가 난다는 건 새로 알게 된 사실이었어. 불어도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야. 이로서 나는 계속해서 50살에는 파리로 돈 안 되는 학문을 공부하러 가는 꿈을 꿔보려고 해.
오르세, 오랑쥬리, 루브르 중에는 개인적으로 오르세가 제일 좋았어. 일단 카페가 너무 좋았고 모네랑 르누아르가 참 좋았거든. 파리에 가기 전부터 박물관에 가면 꼭 모네의 달력을 사 와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어. 모네랑 르누아르가 있는 인상주의관이 끝나는 곳에 기념품점이 있길래 가서 달력들을 구경하는데 모네 달력 콜렉션이 마음에 안 들어서 고흐 작품 모음집 달력을 사가지고 나왔거든. 근데 그 캘린더를 들고 고흐의 론강 위의 별이 빛나는 밤(starry night over the Rhone)을 보러 간 거야. 감동 그 자체여서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어. 남색의 파란 하늘에 귀여운 노란 별이 눈부시게 똥똥 떠있는 데 붓터치의 텍스쳐가 과연 명화더라. 어떻게 그림이 이렇게 감동적일 수가 있을까 싶었어. 한참을 서서 감상도 하고 비디오도 찍고 그러고 돌아와서 예전 사진첩을 보니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고흐의 starry night을 봤었더라고. 그때도 되게 좋았나 봐, 작품을 비디오로 찍어놨던 걸 보면. 나는 사실 모네보다는 고흐를 좋아했나 봐. 다음에는 고흐가 살던 노란 집이 있는 아를에도 가보고 싶어.
이건 많은 사람들이 몰랐으면 하는 비밀인데, 오르세 박물관의 카페에 가면 모두가 사진을 찍는 그 시계 바로 앞에 앉아서 차를 마실 수 있어. 핫초코를 마셨는데 기억에 남는 농도의 깊은 맛이었어. 다음에 가면 또 마실 것 같아. 운이 좋으면 사진도 좀 더 자유롭게 찍을 수 있지.
루브르에서는 liberty 그림이 참 좋았어. 근데 옛날 그림들은 왜 여자들만 저렇게 가슴들을 내놨던 걸까? 남자들은 꼭꼭 옷을 입고 있는데 말이야. 모나리자는 내가 식견이 짧아서인지 생각보다 이게 왜? 싶은 마음이었어. 루브르는 정말 광활하더라.
매번 무언가 사고자 생각만 하고 고민만 하는 내가 꽤 큰 쇼핑들을 했어. 소비요정인 네가 들으면 아주 좋아해 줄 것 같아. 아주 비싼 신발도 한번 사보았고, 예쁜 꼬까옷들에 선글라스에, 맘에 드는 예쁜 것들을 많이 사니 기분이 좋더구나. 다음 달의 내가 열심히 일하며 갚아야 하겠지만 말이야.
재밌는 일들을 공유하고 싶은데 연락이 되지 않아 안타깝구나. 바깥세상과 연락이 되지 않는 네가 제일 답답할 테지. 인고의 시간 동안 원하는 걸 꼭 이루길 바라. 그럼 다시 얘기하는 그날까지 행운이 너와 함께 하기를 바라.
마그리뜨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