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ward, Alaska
개인적인 사정으로 미국을 벗어날 수 없었던 2년 정도의 시간이 있었다. 주기적으로 여행을 하지 않으면 엉덩이가 들썩들썩했던 나는 미국 내에서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곳을 찾고 있었다. 도시 여행은 원하지 않았고 여행지의 우선순위는 공항이 있는 대도시로부터 아름다운 자연경관 (일명 대자연 - 국립공원, 국립 숲)이 쉽게 접근 가능한 곳이었다 (여행은 주로 어디를 하이킹할 것인가 위주로 결정한다). 그러다 보니 하와이, 알라스카 두 곳이 레이더에 들어왔다.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어린 시절에 하와이는 몇 번 가보았다고 하니 그래. 알라스카를 가자. 알라스카로 결심했다. 여행 기간도 알라스카의 관광 시즌이 시작한다는 5월이었다.
알라스카행 비행기는 자정 즈음에 앵커리지에 도착했다. 와, 말로만 듣던 백야다. 대낮처럼 환하지는 않았지만 어둠 속에 빛이 사린 광경이었다. 착륙을 하려는 비행기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엄청났다. 북미대륙의 최고봉 드날리를 품은 알라스카이듯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첩첩산중의 뷰는 과연 압도적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백야를 뚫고 숙소로 운전하고 가는 길은 이상하게도 더 몽롱하고 피곤했다. 백야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밖이 어렴풋이 밝으니 잠을 청하는 것도 이상하게 불편했다(백야현상이 일어나는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은 유난히 우울증이 많다고 한다).
앵커리지에서 밤만 지낸 후 시워드로 내려가며 쿠퍼 랜딩에서 하이킹을 할 예정이었으나 매섭게 비가 내리는 바람에 시워드로 곧장 내려갔다. 창밖으로 보이는 광경은 모두 구름이 잔뜩 낀 회색이었다. 미국이 러시아로부터 알라스카 구매를 주도하던 당시 국무부 장관 월리엄 시워드의 이름으로 부타 유래한 시워드는 앵커리지로부터 차로 2시간 30분 정도 남쪽에 위치해있는 도시이다. 앵커리지로부터 1번 도로를 따라 철도를 타고 갈 수도 있는데 풍경이 몹시 아름답다.
여행 5개월 전 예약한 시워드의 호텔에서는 공공 샤워실/화장실을 사용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사용이 훨씬 수월하고 쾌적하여 놀랐고 다른 사람과 화장실 시간이 겹친 적이 없다는 데에 더욱 놀라웠다. 가성비 굉장히 만족스러웠던 숙박이었다. 재밌었던 점은 다녔던 숙소 (호텔과 에어비엔비)에 모두 암막 커튼이 있었다는 점인데 백야 현상 때문에 암막커튼 없이는 자기 힘든 이유 때문이었다.
시워드에서는 거금을 주고 케나이 피요르드 국립공원을 도는 크루즈를 타기로 결심했다. 구름이 많은 흐린 날씨라 놓치는 게 많을까 걱정이 많았지만 출항하자마자 항구 앞에서 수영 솜씨를 뽐내며 물장난을 하던 한 쌍의 수달의 귀여움에 즐거웠다. 걱정과는 다르게 바다 깊숙이 나갈수록 날이 화창이 개었고 간간히 배 옆에서 헤엄치며 물줄기를 뿜어대는 범고래 떼는 장관이었다. 저 멀리 대머리 독수리는 늠름하게 절벽 위 나무들을 지키고 있었고 생김새와 부리가 멋진 항상 쌍으로 지낸다는 퍼핀도 보았다.
야생동물 관찰도 즐거웠지만 크루즈의 꽃은 빙하였다. 내가 꽤 많이 존경했던 전 회사의 법인장님은 그런 말씀을 하시곤 했다. 자연이 주는 가장 아름다운 경치는 빙하가 지나간 자리에서 찾을 수 있다고 (물론 개인차는 있겠다). 처음으로 마주하는 빙하는 우와~ 우와~ 를 연발하게 했다. 그 말씀이 바로 와 닿았다. 파란빛을 제외한 빛만이 투과하여 만들어내는 빙하의 청명한 하늘색과 그 광활한 스케일과 형성과정을 유유히 지켜봐 왔을 그 영겁의 시간을 생각하니 지구의 역사가 감탄스럽게 느껴졌달까. 환상적이었다. 크루즈를 탄 사람들이 빙하를 지켜보며 셔터를 눌러대던 순간에도 빙하는 큰 소리를 지르며 제 몸을 조금씩 깎아내고 있었다. 안타까웠다.
크루즈 내내 차디찬 그러나 너무나 맑은 바다 바람이 나의 볼을 어루만져주는 그런 기분은, 정말 상쾌했다. 온몸과 뇌가 정화되는 느낌이랄까.
맛있는 생선을 많이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시워드는 연어 철이 아니었고 생각보다 먹을 것이 시원치 않았다. 왜 맛있는 생선이 많이 잡히는 이 곳에선 생선들을 튀겨대기만 하는 걸까. 해가 떨어지기 전에 Exit Glacier를 보기 위해 근처에 있던 푸드 트럭에서 햄버거를 사 차에서 허겁지겁 해치우고 (바다 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먹는 치즈버거는 정말 맛있었다!) 짧은 산행을 시작했다. Exit Glacier는 알라스카에서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빙하라고 했다. 엄청난 규모의 빙하를 몇 시간 전 크루즈로 보고 온 나는 Exit Glacier에 대하여 큰 감동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기후 변화로 인하여 일 년에도 몇 년씩 후퇴하고 있어서 "Exit Glacier"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빙하를 바라봄에도 마음이 아팠다. 우리 지구인들은 무엇을 위하여 이들을 파괴하는 삶을 살고 있는 걸까.
혼자 여행을 와 크루즈 선상에서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었던 남자가 있었는데 크루즈 끝나고 자기는 Exit Glacier를 갈 거라며 같이 갈 생각이 있으면 같이 가자고, 배에서 내릴 때 즈음 다시 만나자고 제안을 했더랬다. Exit Glacier를 가는 것은 나의 그 날의 플랜이었지만 그 사람과 같이 갈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응 난 갈거야 라고 그 당시에서 말하고 배에 내려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렸던 것은 그 사람이 딱히 내 스타일이 아니기도 했고 해가 지기 전에 산행을 끝내고 싶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근데 웃겼던 건 내가 하산하는 길에 그 사람은 등산하며 마주쳤던 것. 그 남자는 쾌활하게 나랑 다시 등산하자~라고 했으나 하루 종일 바다 바람, 산 바람에 너덜너덜해졌던 나는 대화를 조금 하고는 숙소에 가서는 정말 뻗어버렸다. 그냥 엑싯 글레시어에서의 재밌는 에피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