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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그리뜨 Feb 24. 2021

2021 텍사스 전력난 – 전기 없이 36시간

텍사스에 눈이 온다는 예보가 있었다(!) 88년 만에 찾아온 텍사스의 한파라고 했다. 길이 얼어붙을 예정이니 차 사고를 막기 위해 웬만하면 바깥에 나가지 말라는 경고 문자가 왔다. 그러더니 며칠 뒤 휴스턴보다 북쪽에 있는 달라스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빙판길로 인해 130중 추돌 사고 뉴스가 들려왔다(텍사스 사람들은 눈길 운전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음). 다음 날 저녁부터 우리 동네에도 눈이 오기 시작했는데 창문을 때리는 소리로 유추해보건대 이건 눈보다 해일에 가깝지 않겠다 싶었다. 눈은 이렇게 추잡스러운 소리를 내지 않는다. 눈이 오는 휴스턴의 밤, 자려고 누웠는데 뭔가 이상하다. 피 유우 우 우웅~ 정전이다. 바깥 기온 영하 10도, 새벽 2시였다. 옷을 겹겹으로 껴입고 잠을 청했다. 아침엔 전기가 돌아오길 바라면서.


아침 7시, 평상시 같으면 눈을 뜰 리가 없는 그런 시간이었지만 일출과 함께 눈이 떠졌다. 뇌가 비상상황인 걸 감지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이불 밖은 추웠고 정전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도 모르는 데다가 당장 먹을 것도 걱정이고 냉동고에 있는 그 많은 재료들이 녹아버릴까 봐도 걱정이었다. 하필 그 전날 탕수육 해 먹겠다고 꺼내 둔 돼지 등심은 냉장고에서 핏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는데 더 이상 냉장고에서 보냉이 되지 않자 베란다로 꺼내버렸다. 어쨌든 체온은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반팔티를 입고, 기모 후드를 입고, 후드 모자는 쓰고, 얇은 패딩을 입고, 쫄바지를 입고, 기모 추리닝 바지를 입고, 양말을 두 겹 신고 털 신을 신었는데도 손이 시리고 발이 시렸다. 이 와중에 씻지를 못해서 나는 곧 된장으로 발효될 것 같았다.


한번 밥을 할 때 밥을 많이 해놓는 스타일이라 대다수의 날 경우에 밥솥 안에 밥이 있는 편인데 하필 정전된 그 날은 밥솥에 밥이 똑 떨어진 그런 날인 것이다. 다행인 점은 집에 부루스타가 있었다. 냄비밥을 했다. 에너지를 내기 위해선 뭐라도 먹어야 했기 때문에 냉장고에 있는 호박 당근 양파를 채 썰어다 계란을 떨어뜨려 만두국을 끓였다. 그리고 평소에 미뤄놨던 꺼진 전등을 교체하고 청소를 했다. 전기가 나가니 정말로 할 게 없었다. 대충 요가를 하는 척도 해보고 명상도 해봤지만 몸이 추우니 다 귀찮았다. 해가 떨어지고 나니 암흑도 이런 암흑이 없었다. 집에 있는 촛불을 모두 동원해 켰더니 일산화탄소 과다인지 천장에 붙어있는 일산화탄소 경보기가 끊임없이 울려댔다.


저녁은 뭐 먹지. 부르스타로 쉽게 요리할 수 있는 재료를 생각하다 삼겹살을 떠올렸다. 후라이팬에 굽기만 하면 되잖아? 점심을 먹고 나서 냉동고에서 삼겹살을 꺼내놨다. 몇 시간 후 삼겹살이 녹았길 바라면서 포장을 벗겼는데 아직 꽁꽁 언 그 상태였다. 집 온도가 4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춥다 보니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에너지는 더 빨리 뺏기는 거 같았고 그래서 허기짐은 평소보다 빨리 찾아왔다.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배고픔이랄까. 핸드폰 배터리를 충전할 겸 차에 시동을 걸었다. 히터를 켜서 몸을 녹이고 돌아가는 엔진의 열로 본네트 위에서 삼겹살을 녹였다. 어둠 속 부루스타에서 구워 먹는 삼겹살의 맛이란. 비록 추운 어둠 속이었지만 파김치에 밥에 쌈장에 찍어먹을 생마늘이 있어 마음이 가난하지는 않았다. ※강 추위에 차에서 히터 켜고 자다가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화요일에 텍사스에만 10명이 넘는다고 한다 ㅜㅜ


생존에 제일 중요한 끼니를 해결하고 나니 잠을 자야 했다. 추운 날, 해가 진 후 전기 없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석봉 어머니가 떡을 썰고 한석봉이 촛불을 켜고 글을 읽었다는 그 날은 분명히 적당히 따뜻한 날이었을 것이다. 옷을 겹겹이 입고 그 위에 이불을 세 겹쯤 뒤집어쓰고 침대에 시체처럼 누워있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니 자꾸 실소가 나왔다. 살아보겠다고 ㅋㅋㅋㅋㅋ 그렇게 꽁꽁 싸매고 잤지만 손과 발은 좀처럼 따뜻해지지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발가락 다섯 개가 다 붙어있길 바라면서 잠을 청했다.


눈을 떴지만 여전히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어제만큼 바깥이 추운 것 같지는 않았고 해도 쨍하게 떠줬다. 밤새 오들오들하면서 잤는지 잠은 아주 잘 잤는데 일어나니 너무 배가 고팠다. 오늘은 순두부 쫄면을 끓이기로 결심을 하고 냉동 쫄면을 녹이기 위해서... 차 시동을 걸었다. 간을 싱겁게 해서인지 그렇게 맛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좋다고 감동해서 밥과 순두부를 비웠다.


해가 좋아 보이길래 혹시 바깥이 집안보다 더 따뜻한 거 아냐, 하고 아파트를 산책하러 나갔는데 0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전 날이 너무 추웠기 때문에 해가 따스하게 느껴졌다. 텍사스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눈을 보며 엄마 보내 줄 사진을 몇 장 찍어서 집에 들어왔는데... 어어 뭔가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난방이 나온다!!!! 그 이후로도 몇 시간에 한 번씩 전기가 끊기곤 했지만 연속 36시간이 끊기는 것은 아니었으니 버틸만했다. 전기가 들어오고 따뜻하게 데워진 집에서 잘 수 있다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인지 몰랐다. 드디어 전기가 들어와 따뜻하게 잘 수 있었던 그 날, 아침에 눈을 떴더니 혹한에 긴장했던 몸이 풀려버려서인지 몸살이 난 것 같아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정전, 단수에 탈탈 털린 월마트


그 상황에 단수까지 되었었으면 정말 암담했겠지만 사는데 전기가 더 중요할까 물이 더 중요할까 운이 좋게도 물은 끊기지는 않아서 대충 씻고 설거지하고는 할 수가 있었는데 주위에는 물이 끊긴 사람들이 많았다. 슈퍼마켓에는 물이 동났다고 한다. 코로나가 전 세계를 휩쓸기 시작하던 작년 3월이 생각났다. 심지어 눈을 퍼다가 변기 물을 공수하고 있다는 사람들도 파다했다.


정전이 오니 삶의 목적이 아주 분명 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원시시대를 살아갔을 호모 사피엔스들이 조금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도 삶의 목적을 찾지 못했는데 그들의 삶의 목적은 비교적 단순하고 뚜렷하지 않았을까. 종족 번식이고 자아실현이고 간에 생존이 최우선 순위였을 테니 말이다. 삶의 목적이 분명하다고 해서 생존이 호락호락했을 리는 없다. 그들은 오랜 시간 불과 전기 없이 살았을 테고 자연재해에, 날뛰는 날씨에, 동물들에게 죽음을 위협받았을 것이고 독이 들어있는 풀을 따먹다 죽기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를 끊기지 않고 여태까지 살아남은 호모 사피엔스의 생존력에 경외를 느끼는 동시에 인간은 기술과 도구 없이는 한없이 약한 존재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 동시에 쉽게 죽기도 하는 연약한 존재임을 다시 한번 느낀다. 이번 전력난과 단수로 텍사스에 너무 많은 피해가 없었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겨우 36시간 전기 끊긴거 가지고 징징거린 것 같은 게, 회사에 나와보니 4일 내내 전기가 없던 사람도 파다했고, 특히 전기가 끊겨서 본인이 아껴 기르던 어항("아쿠아리움")이 통째로 박살났다는 아저씨의 말을 들으니 정말 마음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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