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바다 건너 독립을 할 필요는 없었는데
매니저의 아량으로 이주 동안 한국에서 재택근무, 이주의 휴가를 허락받아 한 달 동안 한국에 다녀올 수 있었다. 첫 이주 동안은 집에서 꼼짝없이 격리 및 재택근무를 해야 했지만 집순이인 나에겐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차를 적응하는 동안 아침엔 실컷 잠을 자다가 밤 10시부터 대충 일을 하고 새벽에 잠에 들면 되었다. 오히려 하루 종일 집에만 있으니 몸과 마음이 편안했고 교류가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지만 가족들과 함께 있다는 건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평상시엔 혼자 살다 보니 먹고 싶은 것도 내가 직접 사다 만들어야 하고 자급자족을 해야 했다면 자가격리기간에는 엄마에게 "엄마 나 빵", "엄마 나 떡" 하면 빵 하고 떡이 나타나는 매직이 계속되어 갔다불효녀. 다만 코로나 음성 결과가 나오고 나서는 산책은 인권이 아니던가, 슈퍼를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동네 한 바퀴 걸으면서 바람 좀 쐬고 싶은 게 다인데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엄마는 한국의 성실한 시민으로서 나를 만류해주었다. 미국의 허접한 방역을 보다 온 나는 한국의 K방역과 방역에 대한 시민들의 의식에 감탄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실 나는 코로나가 계속되는 이와 중에도 미국에서 계속 체육관에 다니고 있었는데 한국에 갔다 오고 나서 체육관 멤버쉽을 캔슬했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는 가족들과 온전하게 한 달이라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부모님과 동생도 서울에서의 그들의 삶이 있었고 나도 텍사스에서의 삶이 있었으니 시간들의 교집합을 찾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코로나가 고마웠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이런 기회가 주어질 수 있었을까.
자라나면서 나는 아빠와 나의 타협이 되지 않는 융통성이 없는 똑닮은 성격 때문에 피가 터지도록 싸웠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아빠에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함께 처음으로 같이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던 그 날 엄마는 바쁘게 밥 푸랴, 국 푸랴, 생선 구워 나르랴, 반찬 소분하랴, 하고 있는데 아빠 이미 식탁에 앉아서 꼼짝도 안 하며 이게 필요하느니 저게 필요하느니 오늘은 반찬이 왜 이렇게 없냐느니, 이런 소리를 해댔다. 밥을 다 먹고 나서는 식탁에서 몸만 쏙 빼가서 잠이 들기 전까지 TV 앞 소파와 한 몸이 되는 것도 너무 못마땅했다. 설거지는 기대도 안 했지만, 적어도 자기가 먹은 밥그릇은 설거지통에 갖다 놓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마음에 안 드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아빠 얼굴에 대고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나중에 엄마에게 부글부글하며 이래서 맘에 안 드네 저래서 마음에 안 드네 했더니 엄마가 그랬다, "넌 아빠를 보면서 어디 맘에 안 드는 짓 하다 걸려만 봐라!!!! 하는 거 같아. 그렇게 날 세우고 있을 필요 없어".
그래서 그냥 부탁을 하기 시작했다. 아빠, 적어도 아빠가 먹은 밥그릇은 설거지 통에 놔주면 안 될까. 이왕이면 아빠가 먹은 그릇을 아빠가 씻어줄 수는 없을까. 예전에 아빠는 그런 식으로도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아빠는 내가 집에 와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아주 좋았고 내 말을 들어주기도 했다. 이제 곧 환갑이 다가올 아빠가 나이가 든 걸까, 아님 내가 나이가 든 걸까.
나와 동생이 자라나는 동안 엄마는 전적으로 독박 육아를 했고 아빠는 경제적으로 지원을 했을 뿐 가정교육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아빠와 주중에 저녁 식사를 했던 기억도 많지 않다. 아빠가 집에 있는 동안에 우리는 TV와 리모콘에 접근조차 가능하지 않았다. 이 부분은 현재 진행형이다. 아빠가 집에 있는 한, TV는 절대적으로 아빠의 권한이다. 하지만 내가 한국에 가있는 동안 아빠는 저녁을 먹으러 매일 집에 왔다. 코로나도 이유라면 이유일 수 있지만, 엄마가 말하길 최근 몇 년 아빠는 주로 저녁을 집에서 먹어왔다고 했다. 그리고 아빠랑 나랑은 저녁 식사 때마다 막걸리 테이스팅을 했다. 예를 들면 오늘은 느림 마을, 내일은 배혜정 도가, 그다음 날은 장수 막걸리. 아빠는 내가 집에 와서 매일 이렇게 같이 막걸리를 같이 마실 수 있어서 너무 즐겁다고 했다. 한국에 와서 살 생각은 정말 없느냐는 말과 함께. 아빠는 예전에 그런 식으로 표현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빠가 나이가 든 걸까, 내가 나이가 든 걸까.
생각해보면 굳이 바다를 건너 독립할 필요는 없었다. 겨우 학부를 졸업하고 미국에 남아있는 유학생들은 수도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왜 미국에 살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을까.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취직을 해도 되었을 텐데. 엄마 아빠 집에서 뽁작뽁작 최대한 오래 버티면서 월세 나갈 돈 대신 돈을 열심히 모아서 엄마 아빠 사는 아파트 옆 동으로 독립을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서울 집 값. 아주 운이 좋아 일 년에 한 번씩 한국에 놀러 올 수 있다고 하면 앞으로 엄마 아빠를 30번 정도 더 볼 수 있는 걸까.
한 달 동안 엄마 아빠의 사랑을 가득 충전해서 나는 또 힘을 내 달러를 벌러 미국에 간다. 달러를 많이 벌어서 부모님이 내게 준 사랑을 달러로서라도 갚고 싶지만 이번에도 엄마 아빠에게 해준 것 하나 없이 용돈을 잔뜩 챙겨 태평양을 건넌다.
공항에서 인사를 하고 포옹을 하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게이트 뒤로 사라진 다음에 눈물이 나지 않는 날이 오기는 할까. 나에게 있어서 인천공항만큼 슬픈 공항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