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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그리뜨 Aug 09. 2022

재택근무가 끝난대서, 이직을 했다.

현명한 선택이였길

재택근무가 종료되었다. 6월달부터는 주 3일 출근을 시작했고, 7월 독립 기념일이 지나고 나서는 주 5일 출근, 팬데믹 이전 스케줄로 돌아가게 되었다. 잡 마켓이 좋다보니 주위에서 이직을 한다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사무실에 출근해야한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팬데믹 도중에도 필요하면 일주일에 한두번쯤 사무실에 나갔고 그정도면 일이 굴러가는데에 충분하다는 걸 알아버린 터였다. 인간에게 자율성을 주었다가 뺏는 것 같이 거꾸로 가는 행태는 없다.  또래의 회사 친구와 사무실에 앉아서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며 한숨을 푹푹 쉬는 날이 늘어났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한다. 이력서 뿌리기는 늘 그렇게 시작된다.


유학생 신분이던 시절, 장장 1년이 넘는 시간을 인터뷰에 쏟아도 돌아오는 답변은 늘 NO 였기 때문에 나는 이번에도 1년 정도는 이직 준비에 써질거라고 생각을 했다. 하필이면 내가 꽤 관심있던 회사에서 첫 번째로 인사팀 스크리닝이 왔고 대화 자체는 되게 잘 굴러갔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깨달은 바로는) 터무니없게 연봉을 많이 부르는 바람에 연락이 단절되고 말았다. 몇번의 전화와 음성메세지와 이메일에도 그들은 묵묵 부답이었다.


탈출을 위한 첫 시도가 처참하게 끝나다보니 연봉에 의기소침해졌다. 돈이란 일에 대한 보상으로서 아주 중요한 것이지만, 돈을 요구하는 것은 몇 번을 반복하더라도 쉽게 익숙해지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여러 매개체로 연봉 협상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찾아봤다.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먼저 내가 원하는 연봉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먼저 연봉을 부르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 다음 스크리닝부터는 인사팀들이 원하는 연봉을 물어와도 일단은 인터뷰 자체에 집중하고싶다는 식으로 그들이 줄 수 있는 연봉 레인지가 어떻게 되는지 되묻는 방식을 고수했다. 연봉 협상은 오퍼가 들어오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는 결론.


첫번째 망한 스크리닝과 비슷한 지역에 있던 회사 인사팀에서 링트인을 통해 먼저 연락이 왔다. 어차피 인터뷰도 연습을 해야했기때문에 무조건 하겠다고 했다. 그 회사는 처음 인사팀에서 제시한 연봉이 지역 물가에 비해 터무니없게 낮았고 내가 관심있는 산업군도 아닌지라 편한 마음으로 대충 대충 인터뷰를 이어갔는데 모든 것이 그렇듯 편안한 마음으로 하면 모든 일이 잘 풀리기 마련이다. 두번의 줌 인터뷰를 마치고 그들은 코로나가 판치는 이 시국에도 나를 캘리포니아 오피스로 인터뷰를 초대해주겠다고 했다. 아싸리! 인터뷰가 메인이어야 했거늘, 이 여행을 휴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전 회사 사람들도 만나고 맛있는 한식도 먹는 즐거운 트립! 반나절 짜리 인터뷰였지만 그들은 3박 4일짜리 여정의 비행기, 숙박, 렌트카를 제공했다. 꺄호~


이 회사와 스케줄이 굴러가던 동안, 나는 내 1지망인 회사A와의 인터뷰도 소화하고 있었는데 회사를 다니면서 점심시간마다 집에와서 밥 대신 줌을 붙잡고 인터뷰를 하다보니 피폐함에 정신이 메말라가는 거 같았다. 내 1지망이던 회사는 인사팀 포함 무려 5번의 인터뷰를(인사팀, 하이어링 매니저, 그리고 각각 2명의 패널로 구성된 3번의 인터뷰) 요구했는데 회사 다니면서 다른 회사 인터뷰도 보면서 할 짓은 못된다고 생각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한주였다. 너무 힘들었다.


캘리포니아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하루 전 A회사의 하이어링 매니저에게서 전화가 왔다. "축하해! 너에게 오퍼를 주려고 전화했어! 돈은 이만큼 줄거고 보너스는 이만큼 줄거야. 릴로케이션도 팩키지도 포함이야. 근데 우리가 생각하기에 너가 아직 시니어 직급정도는 아닌거같아서 일반 사원의 직급으로 오퍼가 나갈거야"


아... 이건 뭔 또 개소리인가... 하필 이 전화는 예정된 시간보다 한시간이 일찍 오는 바람에(시차가 있는 나라에 사는 딜레마) 예상하지 못한 채로 회사에서 받았는데 전화도 제대로 들리지도 않고 너무 당황한데다가 시니어 직급을 안주겠다니 기분이 굉장히 잡쳤다. 같은 필드에서 7년의 시간을 보냈는데 나한테 시니어를 안주면 누가 시니어를 받는건지? 차를 타고 퇴근하는 길은 곧 눈물바다가 되었다. 화상전화 넘어 엄마를 붙잡고, 남자친구를 붙잡고,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엉엉 울면서 저녁시간을 보냈다. 나의 지난 7년이 보상 받지 못하는 거 같아서 슬펐다.


아무리 내가 마음으로 휴가로 여기고 어쩌고 저쩌고 했던간에 캘리포니아로 날아가는 내 마음에는 돌덩이가 앉아있는 것 같았다. 1지망이던 회사에서 오퍼는 받았는데 맘에는 안들지, 4시간 반 쯤 비행기를 타고 가서 그 복잡한 LA 트래픽을 뚫고 다녀야하지, 게다가 구멍가게스러운 캘리포니아 회사에서는 인터뷰 때 프로젝트 하나를 준비해오라고 했는데 가고싶은 맘이 없으니 준비도 대충하고, 마음만 복잡해서 계속 울고만 싶은 시간들이 계속 되었다.


대면 인터뷰를 하면서 내가 간절하지 않다는 것이 티가 안나지 않았을거고, 준비를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것도 알았을테고, 결과론적으론 그들에게 오퍼를 줄 수 없다는 거절의 이메일을 받았다. 대신 금요일 오후 인터뷰가 끝나고 나서 LA 다운타운에 있는 the Broad 미술관을 구경했고 생각보다 나는 현대미술을 좋아하지 않는 다는 것을 또 한번 깨달았고 그 다음날인 토요일엔 라라랜드의 촬영지인 헐모사 해변에 잠깐 갔다가 사실 캘리포니아에서 바다를 보겠다는 욕구는 없었지만 엄마가 가보라는 바람에 전 회사 상사와 구매팀 아저씨와 회계팀 오빠야를 만나 하루종일 배가 터지게 먹고 먹는 동안 이 혼란스러운 오퍼에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에 대해 많은 조언을 얻은 뒤 좋은 마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텍사스로 돌아왔다. 존님의 "A는 니가 상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큰 대기업이고 그들의 조직은 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조직적일 것"이라는 말씀은 꽤 많은 힘을 주었다. 그렇게 돌아와서 나는 회사에 오퍼를 수락해서 보내기로 결심했다.


오퍼 수락을 결심하고 오퍼에 사인해서 스캔을 떠서 첨부파일로 준비해서 메일을 전송하려고 메일에 로그인 했는데 이메일이 하나 와있었다. 1차 인사 스크리닝을 하고 한 달 동안이나 연락이 없었던 전세계에 코로나 백신을 공급하고 있는 B사였다. 한 달이나 연락이 없길래 나는 그냥 떨어졌구나, 생각했는데 한 달만에 연락이 온 그 이메일에는 3번에 걸친 5명과의 인터뷰 스케줄이 담겨있었다. 겨우 슬픈 마음을 달래 잡고 A로 가기로 결심을 했는데 이제와서 인터뷰를 보자고 하자니. 너무 혼란스러웠다.


A사에서의 오퍼를 수락하기로 마음을 먹고 회사를 당장 그만 둘 생각에 신나게 한국행 비행기를 알아보고 있던 터였다. 아무 오퍼가 없었던 시절 A, B가 모두 오퍼를 준다면 당연히 A를 가지! 라고 생각을 했지만 일단 손에 쥐고 있는게 하나가 생기니 또 마음이 일렁이었다. 인터뷰 스케줄도 조정해줄 수 없다하지, 인터뷰를 볼려면 한국 일정을 미뤄야하지, 여러모로 또 마음이 복잡하기 시작했지만 어떻게 온 큰 회사의 인터뷰 기회를 그냥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내가 노동 시장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기회였다. 내가 의지를 많이 했던 존님이나 엄마는 자기같으면 인터뷰도 안보겠다며 시간 낭비이고 내 욕심이라고 했지만 나는 욕심을 놔버릴 수가 없었다. 그 기저에는 내가 언젠가 그 미래에 B의 산업군에서 일을 하고싶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있었고 B산업군의 내 업무는 내 업무를 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꿈 꿔볼 듯한 꽃(가장 복잡하고, 가장 정교하고 등등) 같은 존재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A사 인터뷰를 보면서는 내가 오퍼를 받겠구나, 라는 확신이 전혀 들지 않았는데 장장 일주일에 걸쳐 B사의 사람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며 마지막 인터뷰를 볼 때 쯤에는 거의 확신이 들었다. 아, 웬지 여기는 될 것 같다. 몹시 행복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었지만 이 오퍼는 동시에 내게 선택을 요구하는 머리가 깨지게 하는 혼란스러움이었다. 온전히 내 선택에 내가 책임을 다해야만 하는 그런 갈림길에 서있었다.


한국에 가서 뺑뺑 놀던 어느 날, B사의 인사팀에서 전화를 할 수 있겠냐며 연락이 왔다. 그것도 미국 회사답지 않게 몹시 급박하게. 무슨 얘기를 하려나, 열 두시간을 궁금해하다 전화를 받으니 축하한다고 했다. 오퍼였다. 오퍼를 들으면서부터 마음이 복잡했다. A,B사는 똑같은 인사 시스템을 쓰는건지 토씨하나 틀리지 않은 같은 연봉을 제시했다. 하지만 나는 배부른 인간이었다. 이미 손에 쥐고있는 카드가 너무 맘에 들어서 이걸 넘어설만한 인센티브를 B사에서 주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이 의미가 없을 터였다. 그래서 불렀다. 나 다른 회사 오퍼있는데 지금 그정도 연봉으로는 너네한테 가기 어려울 것 같아. 내가 원래 너희한테 얘기했던 액수는 이정도였고, 너네가 얼만큼 할 수 있는지 알려줘. 주말이 지나자마자 연락이왔다. 베이스연봉이 10프로가 올라갔으니 보너스, 퇴직금 등이 덩달아 같이 오르니 A사가 제시하는 보너스 합산 연봉보다도 20퍼센트 쯤 많은 연봉 패키지였다.


A사는 7% 보너스에 17일 휴가, B사는 9% 보너스에 21일 휴가. 얘네는 무슨 가족 모임 용도의 휴가도 5일이 따로있었다. 연금 프로그램도 비슷했는데 B사가 대박이었던 점은 퇴직금을 어마어마하게 준다는 것이었다. 5년 근속 시 매년 연봉의 15%을 연금으로 지급. 미국에서 다 사라지고 몇 개 안남았다는 그 유명한 펜션 프로그램. A사에서는 이사비용으로 만불 + 포장이사, 차 옮기는 거 까지 포함, B사는 현찰로 만 오천 끝. B사에서는 시니어 직급을 오퍼했다. 이렇게 보나 저렇레 보나 B가 제시한 조건은 너무 완벽했으나 결론적으로 나는 A사를 택했다. 경제학에서는 인간들이 이성적인 선택을 하는 존재로 보지만, 이성적인 이유로는 할 수 없는 선택을 했다. 마음이 가는 선택이었을 뿐.


하지만 그 아무 오퍼가 없던 시절에 내가 A사를 가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유럽의 대기업이고 더 liberal한 도시에 위치해있으며 기약없는 재택근무중이고 맡을 제품도 사랑하는 제품들이고 업무 강도도 더 세고 배울 점이 더 많을 것 같은 이유에서였다. 반대로 이야기 하자면 B사는 내가 그닥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제품군(제약)을 담당하는 일이기도 하고, A사보다는 도시 외곽에 위치해있으며, 일주일에 3번 사무실 출근을 해야한다하고, 하지만 고마진 산업군이었기 때문에 돈도 많이 준다하고, 휴가도 몇일이지만서도 더 많다하고, 심지어 미국에서 사라지고 몇 남지 않은 퇴직연금을 준다고 하니 오퍼자체는 세상 그렇게 매력적일 수가 없었다. 오퍼 두 개를 손에 쥐니 마음이 이렇게 힘들 수가 없었다.


오퍼 두개를 들고 배가 불렀지, 나는 눈물의 세월을 보냈다. 어떤 선택을 해도 가보지 않은 길에 후회는 남을터였고 나는 최대한 후회가 적을 선택을 하고 싶었다.


인터뷰를 모두 줌으로 해결하다보니 사람들과 사무실의 분위기를 감각적으로 느껴볼 수 없다는 것은 비대면 이직의 가장 큰 아쉬운 점이라고 생각되었다. 사무실에 가서 인터뷰를 했었더라면 사람들이나, 사무실의 분위기나, 도시의 분위기 등을 느끼고 시각, 청각, 후각 등의 감각을 이용해서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텐데 그 모든 것을 배제한체 큰 결정을 하려니 내 결정이 맞는 건지 확신을 갖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리고 드디어 이번주, 장장 두달간의 긴 방학을 마치고 첫 출근을 한다. 좋은 선택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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