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
'길 위에 선 20대 #4'에서 언급한 '자취'처럼 상상과 현실이 다른 일이 20대에 많았다. 공부만 하다가 대학을 와서 경험이 없었고, 미디어 매체에서 본 성인의 삶을 현실이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상상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상상을 현실로 믿고 사는 멍청함은 잘못이라고 생각된다. 내가 도달하지 못한 것을 나의 잣대로 잡고 남을 판단하는 경우가 있었다. 나의 멍청함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기 때문에 잘못임이 확실하다.
대학을 오니 어쩌다 내 주변에 똑똑한 사람이 많아졌고, 이에 따라 그 사람의 기준으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내가 거기에 맞춰진 것 같다. 대표적으로 기억나는 것은 '영어'이다. 나는 고등학생 때 영어를 잘하지 못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영어공부를 했지만, 토익을 보면 500점도 안 나왔을 것 같다. 하지만, 주변에 다들 800~900점이다 보니 나도 그런 줄 알았다. 나의 영어실력을 내가 잘 알지만, 이 친구도 특별하지 않은 것 같은데 첫 시험에 850점이 나왔으니 그 점수에 내가 맞춰졌다. 언제든 시험만 보면 취득하는 점수, 공부하지 않아도 12년 학생 짬밥에서 나오는 실력으로 쟁취할 수 있는 기준점이라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그냥 나만 갖고 있으면, 나는 그냥 바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주변에서 영어 성적에 대한 고민을 하면 아무렇지 않게 "내 주변에는 다들 800점 이상은 나오던데?"라는 말로 마치 내가 그 점수를 쉽게 취득한 것처럼 말했다. 그 말은 아마 그 친구에게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결국 내가 갖고 싶어 하는 우월감이 문제였다. 상상 속 나 자신에 몰입해서 현실을 보지 못했다. 심각하게 보면 '리플리 증후군'의 초기 증상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증상은 빠르게 치유되었다. 내가 하기 전에 말을 하지 않았고, 한 다음에는 가장 어려운 순간을 기준으로 말을 했다.
내가 자격증을 4주 걸려서 취득했다면, 누군가 나에게 '자격증 공부 얼마나 했어?'라고 물으면 2 달이라고 했다. 그리고 오히려 인터넷에서 '2주 합격 비결'이란 글이 있으면 믿지 말라고 했다. 어렸을 때는 다들 4주 만에 하는 걸 8주나 걸린 나 자신이 모자라 보였지만, 실제로 내가 우려한 모습으로 나를 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네가 우선순위가 달랐구나', '꾸준히 공부했구나'정도로 생각했다.
상상의 기준은 상상이기에 쉽게 오지 않는다. 그저 현실을 열심히 살다가 내가 걸어온 길을 연말에 정리한다. 점차 그 길로 가고 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며,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고 그에 맞는 기준을 잡는 것 외에 더 최선은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