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수필

역마 (11)

고흥, 진주

by 이묵돌

찜질방 수면실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댔다. 시간은 오전 열 시. 어림짐작으로 아홉 시간은 족히 잤다. 발 닿는 대로 걷느라 피로가 쌓였던 모양이다. 나는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나갈 준비를 했다. 원래 길을 떠나려면 오전 일찍이다. 열 시면 꽤 촉박한 시간이었다. 탕으로 내려가 몸을 대강 씻고 나왔다. 옷을 갈아입으면서. 오전 중에 어딜 떠나기는커녕 일어나기도 벅찼던 서울에서의 삶이 떠올랐다. 사실 난 저녁형 인간이 아니라, 단순히 아침형 인간이 되기 싫었던 건 아닐지.


IMG_4981 (편집됨).JPG 일어나자마자 찍은 사진. 찜질방 바닥으로 추정


찜질방을 나와 걸었다. 중천 언저리에 걸린 해가 고열을 뿜어댔다. 기온이 이십칠 도라고 했다. 나오자마자 옆으로 돈 골목에서 국수집을 발견했다. 근처에선 드물게 깔끔한 인테리어였다. 가게에 들어가 국수 하나와 주먹밥을 주문했다. 메뉴판을 보니 국수를 뽑을 때 귀리를 넣는다고 했다. 귀리는 좋아한다. 식물성 단백질 함량이 높기 때문에. 정작 먹어보니 맛에 별반 차이는 없었다. 그래도 이왕이면 몸에 좋은 게 좋지. 늘 좋은 게 좋은 거지.


IMG_4993 (편집됨).JPG 버섯은 빼고 먹었다


국수 값을 계산하면서 터미널로 가는 길을 물었다. 아주머니는 가게 앞까지 나와서 터미널로 가는 길을, 저 쪽 앞으로 가서 왼쪽으로 잠깐 꺾고, 바로 오른쪽으로 한 번 더 꺾어서…… 하고 열심히 설명해주셨다. 바깥은 기온 이십칠도, 아니 이제 이십팔 도의 대낮인데도. 나는 너무 감사하다고 배꼽인사를 하며 헤어졌다. 길을 걷다보니 설명해주신 게 기억이 안 나서 지도앱을 켰다. 아주머니께 좀 미안했다.


IMG_4997 (편집됨).JPG 고흥 시내에 흐르는 개울


어찌저찌 고흥 터미널에 도착했다. 매표소 직원에게 가장 빠른 표를 달라고 했다. 가장 빠른 표는 여수라고 한다. 여수는 다녀왔으니까 다른 곳이요, 하고 뽑힌 표를 받아드니 고흥에서 순천으로 화살표가 쳐져 있다. 나는 버스에 바로 올라타서 자리에 앉았다. 노트북을 펼쳐 글을 썼다. 쓰다 막히는 부분이 있어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순천 터미널이다. 허겁지겁 짐을 챙겨 나오니 기사님이, 빨리빨리 다닙쇼, 하셨다. 나는 무안한 마음에 죄송합니다, 하고 나왔다.


IMG_5005 (편집됨).JPG 고흥에서 순천으로 가는 표


계획 없이 도착한 곳에 발을 대자마자 새로운 계획이 생겼다. 날씨가 무더운 탓도 있었을 것이다. 옆에는 열 뿜으며 달려온 고속버스들의 대열. 지글지글 끓었다. 난 그냥, 냉면이 먹고 싶었다. 그런데 좋아하는 평양냉면을 먹기에는 너무 멀고. 진주가 냉면으로 유명했던가. 그럼 진주로 가버려야겠군. 그렇게 진주행이 결정됐다. 나는 내리자마자 매표소로 가서, 진주로 가는 표 주세요, 하곤 승차홀에서 오 분쯤 기다리다 버스에 올라탔다. 스치듯 지나온 순천에게는 도시단위로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IMG_5027 (편집됨).JPG 미안해 순천


다시 버스 안에서 바쁘게 타이핑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정말 갑자기 그 생각이 났다. 아, 나 삼십일일에 강연이 있지 않았었나. 급하게 메일을 뒤져보니 정말 그렇다. 오월삼십일 일 오후 일곱 시, 신촌에 있는 서울창업카페에서, 난 두 시간동안 강연을 하기로 돼있었다. 이, 이러면 나가리인데. 그래도 아직 일주일이 남았다, 싶어서 담당자에게 전화를 했다. 담당자에게 사정설명을 드렸다. 사실 사정이라기엔 너무 생떼에 가까운 내 상황이었다. 제가 마감이 밀려서, 책 원고를 써야 해서요, 다 쓰기 전까진 서울로 돌아가지 않기로 했는데…… 참내, 이게 말이야 방구야.


그런데 이게 일주일밖에 안 남아서요, 새롭게 강연을 기획하는 것이 어려워요, 이미 페이스북에 광고를 수십만 원씩 썼거든요, 사람도 정원의 두 배 이상으로 신청이 들어와서, 이게 다 연사님 뵈려고 온 건데 대체자를 구한다는 게…… 담당자는 종국에 거의 울먹이듯이 말했다. 제가 이 회사 들어와서 처음으로 맡은 프로젝트인데, 이러시면 전 정말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어요…… 내가 대체 뭘 하고 있지? 그냥 오월삼십일 일 여섯 시 오십구 분까지 원고를 완성해서 제출하면 되는 거잖아. 그래서 강연장으로 딱 들어가서. 여러분. 저는 전국을 떠돌다가 이제 막 여기 도착했습니다. 그럼 되는 거 아닌가. 나름 멋있고. 좋네. 그게 아니면 언제까지 떠돌 생각이었던 건데. 기약 없이 길어지는 역마 생활에 도취돼있었던 걸까.


바보 같은 놈. 지금 아무리 떠돌아다닌들 언젠가는 돌아가야 해. 그걸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면서. 난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담당자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제게 부탁하듯 말씀하실 일이 아닌데.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책임지고 강연시간까지 잘 맞춰가도록 하겠습니다. 네, 네, 걱정 마세요. 심려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잊고 있었던, 잊고 싶었던 현실이 부리나케 들이닥쳤다. 이제 나는 일주일 안에 원고를, 역마를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그 생각 하나로, 진주로 향하는 버스는 속절없이 슬펐다. 창밖에는 해가 짓궂게 내리쬈다.


IMG_5010 (편집됨).JPG 버스 안에서


진주터미널에 도착했다. 슬픔에 잠겨죽기 전에. 슬플 때 슬프더라도 냉면은 먹고 슬퍼야지. 나는 곧장 택시를 타고, 진주서 냉면으로 가장 유명하다는 하연옥 본관으로 향했다. 하연옥은 진주 시내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차에서 내려 밖을 바라보니 생각 외로 세련된 하연옥 건물, 그리고 마음도 모르고 뉘엿뉘엿 지는 노을 부스러기가 먼 산 너머로 보였다. 이거 참 거지 같구만. 거지같더라도 갈 길은 가야지. 냉면도 먹고 글도 써야지. 별 수 있나, 사람 사는 것이.


IMG_5035 (편집됨).JPG 진주시외버스터미널


발을 굴러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외부보다 내부가 더 현대적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엄청나게 맛있진 않았다. 기대감이 컸을 수도 있는데. 뭐 맛이 없는 건 아니지만 또 완전 내 맛도 아닌. 그런 맛이었다. 육수는 맛이 기묘했고 면은 질겼다. 다만 위에 올라간 육전만큼은 기가 막혔다. 육전을 따로 시켜볼까, 하다가 관뒀다. 뭘 또 그렇게까지. 육전은 만구천오백 원이었다.


IMG_5071 (편집됨).JPG 하연옥의 진주냉면. 육전이 올라가 있다


하연옥 앞에 있는 이디야 카페. 커피를 주문해 앉았다. 콘센트 근처 자리에서 노트북 충전기를 꽂아놓고 글을 썼다. 키보드가 답답해져서 수첩을 꺼내 직접 쓰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카페에 손님은 나뿐이었다. 난 친절한 직원에게 인사를 하고 카페를 나왔다. 진주에 게스트하우스가 있나, 검색해보니 영 마음이 안 간다. 오늘은 좀 좋은 곳에 묵어야겠다, 싶어서 땡처리 호텔 중에 가장 괜찮아 보이는 곳을 예약했다. 어제 찜질방에서 비용을 아꼈으니까. 뭐 그렇게 합리화를 했다.


IMG_5079 (편집됨).JPG 진주의 하늘


버스에서 내려서 호텔 방향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는 길에 농구장이 있었다. 진주 청소년수련관이었나, 그랬다. 기분도 꿀꿀하고 그래서 근처 문구점에서 또 삼만 원짜리 공을 샀다. 혼자 두 시간 쯤 뛰었다. 돌아갈 요량으로 벤치에 앉아 쉬고 있으니 중학생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저, 공 안 쓰시면 잠깐 써도 될까요. 나는 공을 들고 호텔에 들어가는 것도 좀 그렇겠다 싶어서, 야야, 그러지 말고 니가 일대일로 날 이기면 이 공 그냥 줄게, 했다. 나는 오점내기 게임에서 필사적으로 뛰어 이겼다. 허탈하게 웃는 그 학생에게 이겨서 기분 좋으니까 공은 두고 가마. 하고 나와 버렸다.


IMG_5096 (편집됨).JPG 진주 청소년수련관 앞 농구장


호텔. 이런 레벨의 숙소에서 묵은 것이 얼마만인가. 이번 여정에서 만큼은 처음이었다. 나는 퀸사이즈 매트리스와 오리털 이불에 감겨 휘적대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샤워를 하고 땀에 절은 옷을 널었다. 그리고 다시 글을 썼다. 자정 근처쯤이 돼서 글이 막혔다. 잠깐 바람이나 쐬고 올까, 싶어서 야행을 나갔다.


IMG_5111 (편집됨).JPG 더블룸이 없어서 트윈룸으로 갔다


창밖으로 보이던 진주성에 불이 꺼져있다. 그 앞쪽으로 펼쳐진 하천 옆구리를 내리 걸었다. 바람이 선선하다. 반바지를 입어도 춥지 않은 날씨. 진주는 어쩜 이리 좋아서 날 힘들게 만드나. 난 야식으로 맥주 한 캔에 게맛살 한 팩 사서 돌아갔다. 나는 조금 더, 조금 더 글을 싸매다가 한 캔짜리 술기운으로 잠들었다. 종착이 정해진 역마는 떠도는 일마저 슬프다.







2019년 6월, <역마>가 출판사를 통해 정식 출간되었습니다.


따라서 3화 이후의 전문은 보여지지 않으며, 중간에 책 구매 링크로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가급적이면 저도 오픈해놓고 싶지만... 아무렴 제 글을 믿고 투자해준 출판사, 그리고 이 부족한 글을 책으로 구매해 책장에 꽂아놓으셨을 독자분들께 저 나름의 예의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따라서,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께는 죄송스럽지만, 나머지 내용은 책을 구매해서 읽어주세요.

책에 실린 것은 편집자의 손을 거친 글로서, 온라인 버전에 비해 훨씬 깔끔한 문장이 되었습니다.

제가 즐겁게 쓴 <역마>를 여러분 또한 즐겁게 읽고, 또 생각날 때마다 책장에서 찾아뵐 수 있다면

저로선 더없는 행복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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