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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Aug 24. 2019

습작

여든여섯번째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싸움이 마무리되던 어느 날이었다. 사흘 만에 본 네 얼굴은 여러 번 끼니를 거른 듯 초췌해보였다. 우리가 마주보고 앉은 카페테라스 앞으로 이차선 도로가, 또 그 너머 보이는 길섶에는 자그마한 초등학교 후문이 있었다. 마침 하교시간이었는지 슬금슬금 또는 와다다 하며 학교를 빠져 나오는 꼬마아이들이 눈에 띄었다. 어느새 해가 중천에 있었다.


 “나는 있지” 네가 머리를 왼쪽 귀 뒤로 늘어트리며 말했다. “잘하면 우리가 결혼까지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어”


 “……나도 그래” 나는 흘러드는 도로가를 향해 대답했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크게 싸워댈 때마다 너무 아프고 힘들어. 전에 했던 연애와는 비고도 할 수 없을 만큼. 너는 충분히 좋은 사람이고 괜찮은 인간이지만, 나와는 안 맞는 부분이 너무 많아. 이렇게 다른 사람이랑 얼마나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맞아. 나도 그런 생각을 했어”


 “당장 만난 일 년밖에 안됐는데도 이렇게 싸워대는데…… 우리가 결혼을 하고, 수십 년 동안 하는 게 가능키나 한지 모르겠어. 너랑 헤어지는 건 두려운데, 막상 계속 만날 수 있을지도 확신이 안가”


 “……” 나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던 초등학교 담벼락 아래로 야트막한 화단이 보였다. 새빨간 꽃 십수 송이가 마구 흐드러져 봄바람에 휘청거렸다. 


 “동백꽃이야” 너는 내가 바라보던 곳을 눈으로 훑더니 대뜸 이야기했다. “엄청 일찍 피는 꽃인데…… 그래선지 봄이 다 가기도 전에 죄다 시들어버려. 이제 날씨가 좀 풀린다싶으면, 다 떨어지고 없지”


 “……무슨 소릴 하고 싶은 거야?” 나는 마침내 고개를 돌려 널 바라봤다.


 “겨울도 다 지나가고, 날씨가 참 좋아졌어. 그런데 용케 잘도 붙어있네. 동백꽃도, 우리도……” 넌 테이블에 머리를 기대놓고 나직이 말했다. 


 “그러게” 내가 대답했다. “그래도 언젠간 떨어지겠지, 날이 더 풀리면”


 “맞아. 그럴 거야. 그게 슬퍼”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 너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파리하게 움츠러드는 몸짓이며 흐느끼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 내가 빌려준 책은 다 읽었어?” 


 “……무슨 책 말하는 거야?” 네가 느닷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수레바퀴 아래서> 말이야”


 “아, 그거…… 절반 쯤 읽다 말았던 것 같은데” 


 “내 그럴 줄 알았지” 나는 지긋이 웃으며 말했다. “꽤 재밌는 책인데”


 “재밌긴 했어. 며칠 잊어버리고 나니까 다시 손이 안 갔을 뿐이지…… 갑자기 그건 왜?”


 “그거 쓴 사람이 헤세라는 사람인데”


 “그건 알고 있어” 


 “그럼 이런 얘기 한 것도 알아?”


 “무슨 얘기 말이야?”


 “<평화는 어떤 시점이나 계기로 영원히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평화를 바라는 사람은 매일같이 싸우며 그 날의 평화를 쟁취해야 한다>”


 “음” 네가 제법 골몰하는 체를 했다. 내가 유독 사랑해마지않는 모습이었다.


 “……우리가 자주 싸우는 건 문제가 아니야. 정말 서로를 진심으로 생각한다면, 오히려 싸우지 않는 게 이상한 거지. 아예 싸우지 않는 관계는 둘 뿐이야. 관심이 없거나, 아무래도 상관없을 만큼 포기한 상태이거나. 우리는 계속 싸울 거야. 너와 내가 서로 사랑하는 이상은”


 “……니가 하는 말에도 일리는 있어. 이렇게 싸우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싸우지 않는 관계로 탈바꿈하는 일은 없겠지, 아마도”


 “응, 그렇지”


 “그런데 한 번 싸울 때마다, 너와 안 좋은 말들을 주고 받을 때마다 마음이 찢어지듯이 아파. 가끔은 그런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야 나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정말 싸우지 않는 방법은 없어. 사랑하지 않는 것 밖에는 없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네가 절박한 목소리로 물었다.


 “백 번 싸우면 백 번, 천 번 싸우면 천 번 화해하는 수밖에 없지” 내가 말했다. “백 번 싸우고 아흔아홉 번밖에 화해하지 못하면, 별 수 없이 떨어지는 거고……”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느냐, 뭐 그런 얘기야?”


 “아니, 우리는 꽃이 아니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꽃에 비유할 순 없지”


 “그럼 뭔데?”


 “글쎄, 우리는 그냥 우리지. 다른 거에 꼭 비유할 필요가 있어?”


 “뭐야, 김빠지게. 희망을 좀 줄 순 없는 거야?”


 “그래도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 뭘” 나는 남은 커피를 마저 들이킨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자. 화해도 했으니까 밥이나 먹으러 가자. 너 아직 아무 것도 안 먹었지?”


 “니가 미워, 정말로” 네가 투덜거리며 뒤 따라 일어났다. 그길로 카페를 나서자, 별안간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몸에 부딪혔다. 


 “굳이 말하자면 계절일거야” 내가 말했다.


 “뭐?”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피었던 꽃이 지면 다른 꽃이 흐드러지고, 한동안 무지 뜨겁다가도 문득 쓸쓸한 냄새가 나기 시작하겠지. 그럼 곧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고, 또 다시 겨울이 되는 거야”


 “……겨울이 너무 긴 거 같아, 내 생각에는” 


 “그래도 언젠간 지나가겠지” 내가 대답했다.


 “내일은 또 엄청 춥다던데”


 “그래? 좀 풀린다 싶더니. 따뜻하게 입어야 겠네”


 “빌어먹을 꽃샘추위” 네가 말했다.


 우리는 천천히 걸어 초등학교로 들어가는 문을 스쳐 지났다. 문틈으로 아늑한 넓이의 운동장이 비쳐보였다. 가벼운 옷차림의 아이들 몇 명이 뛰노는 가운데 곳곳에 핀 동백꽃이 빨개 눈이 부셨다.         



  

<동백꽃 질 무렵>, 2019. 8



<동백나무>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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