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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Aug 26. 2019

습작

여든여덟번째

 뒤늦게 남자의 시야가 돌아왔다. 새하얀 산맥이 펼쳐졌다. 햇살이 부딪혀 산등성이마다 빛을 반사시켰다. 현실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정신차려!” 두 발짝 뒤에서 따라오던 여자가 소리쳤다. “여기서 멈추면 어쩌자는 거야? 빨리 가!”


 발등 너머로 수천 킬로미터의 낭떠러지가 내려다보였다. 몇 초를 넋 놓고 있었던 걸까? 겨우 의식을 되찾자 머리가 아파왔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들었어” 남자가 간신히 입을 뗐다. “여긴 정상적인 등산로가 아니야. 관광객용 등산로를 이렇게 해놓았을 리 없어. 왔던 길로 되돌아가야해”


 “여기 올 땐 내리막이었지만 돌아갈 땐 오르막이야. 그걸 뛰어올라갈 순 없어. 눈 때문에 길도 미끄러운데…… 그리고 지금 얼마나 멀리 왔는지 알고 있기나 해? 얼른 앞으로 가”


 “아니, 더 이상 못 가겠어. 여긴 너무 춥고 머리 아파. 깨질 듯이 아파” 남자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여기까지 와서 포기한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도저히 못하겠어. 나한테는 너무 어려운 일이야. 애초에 이런 길로 오는 게 아니었는데”


 “가만히 있으면 얼어 죽어. 해가 지면 우린 정말 끝이야. 알면서 왜 그래? 빨리 걸으라니까, 어서”


 “신발이 미끄러워서 한 발짝도 더 걸을 수가 없어”


 “그건 설산까지 오는데 아이젠 하나 안 챙겨온 오빠 잘못이지”


 “한 쪽만 벗어서 나한테 줘, 제발” 남자가 애걸하듯이 말했다.


 “내 걸 가져가서 뭐 어쩌자는 거야? 여기서 발 한 쪽만 헛디뎌도 죽어…… 웃기지마, 난 오빠랑 같이 죽을 생각 하나도 없어! 살아서 온전히 집에 돌아갈 거야. 오빠야말로 남자답게 행동해”


 “안 돼, 못 하겠어” 남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집에, 집에 가고 싶어. 이런 데까지 여행 오는 게 아니었어”


 “정신 차리라니까! 그러다 정말 죽어. 지금 오빠가 그러면 어쩌자는 거야?”


 “돌아가자. 돌아갈 수 있어. 왔던 길로 되돌아가자. 오르막길이라도 조심조심 걸으면 될 거야. 아까는 많이 미끄럽긴 했지만……”


 “아, 제기랄……” 여자가 고개를 쳐든 채 한숨을 쉬었다. 따뜻한 입김이 바람에 흩어졌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바람이었다.


 “숨 쉴 수가 없어. 숨 쉴 수가……”


 “……오빠, 오빠 뒤에 내가 있어. 걱정하지 말고 한 발짝만 내딛자. 약한 모습 보이지 말고. 남자답게 앞으로 가. 제발. 이렇게 부탁할게. 응?”


 여자는 달래듯이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을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문득 발아래를 내려다보자 커다란 새 한 마리가 활공하는 모습이 보였다. 새는 가파른 절벽 앞에서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다녔다. 먼발치에서도 눈에 띄는 걸 보니 제법 덩치가 있는 모양이었다. 


 “봐봐, 여기에도 새가 있네. 캠프 근처에도 새 같은 게 많았잖아?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되는 거야. 새까지 우릴 돕고 있어, 오빠” 여자가 절벽아래의 새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저건 독수리야” 남자가 말했다. “저건 우릴 도우려는 게 아니야. 떨어져 죽은 시체를 쪼아 먹으려고 하는 거지”


 “……말도 안 돼. 어서 앞으로 가. 아니면 나라도 앞에 세워주든지! 왜 이렇게 한심해? 다 큰 어른이 돼놔서”


 “아……” 남자는 탄식인지 뭔지 모를 소리를 한 번 냈다. 그러고 나서 가던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몸이 무거웠다. 발 디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타인의 용기>, 2019. 8




<백색소음>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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