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묵돌 Aug 27. 2019

습작

여든아홉번째

“니가 감히, 니가 감히……” 굳게 잠긴 화장실 문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열어, 열라고, 안 열어! 열라니까!”


“……”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변기뚜껑에 걸터앉아 눈을 감았다. 닫힌 문이 앞뒤로 마구 흔들렸다. 금속 손잡이를 이리저리 비틀고 있는 모양이었다. 문 반대편의 남자는 좀처럼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야, 야! 문 부수기 전에 대답해, 대답하라니까!” 남자가 고함쳤다. 흥분은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  


“……그만해” 여자는 나직이 대답했다. 고개를 돌려 거울을 보자 왼쪽 뺨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


“뭘 그만해? 뭘 그만하라는 거냐고! 진짜 개같은 소리만 골라서 하고 있어, 진짜 그냥. 그만하는 건 니가 그만해야지! 내가 그만하라고 했지? 한 번만 더 헤어지자고 하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내가 말했잖아!?”


“너랑 더 이상 못 만나겠어. 미안”


“미안? 미안하다고? 아직도 미안하다는 말을 한단 말이지? 이게 건방지게, 문 열어, 문 열라고!!” 남자는 괴성을 내질렀다. 좁다란 화장실 내부로 문짝 걷어차는 소리가 쾅쾅 울렸다.


“……일주일 전엔 니가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었지” 여자는 흐느끼며 말했다. “꽃까지 한 송이 사오면서 미안하다고 했었잖아…… 나한테 다시는 손찌검하지 않겠다고. 두 번 다시 소리도 지르지 않겠다고. 그러니까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뭐라 지껄이는 거야? 지난번처럼 경찰에 신고라도 하게?”


“신고를 어떻게 해. 휴대폰은 니가 뺏아갔잖아”


“응. 이미 부쉈어. 벽에 던져서 산산조각 냈어. 그러니까 닥치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도 금방 부수고 죽여줄 테니까” 남자가 씩씩거렸다. 이제는 아예 몸무게까지 실어가며 문을 부쉈다. 나무합판으로 된 문이 쩌저적 소리를 내며 일그러졌다.


“……난 죽기 싫어”


“그럼 니가 바람피운 그 새끼한테 살려달라고 해봐. 아, 휴대폰이 없어서 카톡을 못하나? 하하…… 그러게 연락을 작작 했어야지, 멍청한 년아. 몰래 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동아리 일 때문에 후배랑 몇 번 주고받았던 거라고 했잖아? 왜 내 말을 안 들어주는 거야? 따로 연락한 적 없어!”


“아직도 개소리하는 거 보니까 정신 못 차렸네. 너 같은 년은 죽어야해. 이제 다 부쉈고,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어. 하, 하하…… ” 남자는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잠깐 거칠게 숨을 몰아쉬더니 이내 되돌아와 문을 세게 때렸다.


합판은 눈에 띄게 망가져갔다. 위로 붙은 연갈색 시트지가 불룩하게 튀어나왔다.


여자는 대뜸 일어나 선반 위쪽을 쳐다봤다. 눈물모양의 유리꽃병에 빨간색 백합 한 송이가 꽂혀있었다. 꽃은 그새 시들어 한 쪽으로 머리를 가눴다. 줄기 끝부분은 같은 방향으로 휘어 금방이라도 끊어질듯 위태로웠다.


“바보 같아, 정말 바보 같아. 사람이 한 순간에 바뀔 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병신이야” 여자는 꽃을 집어 들고 말했다. “날 죽도록 때렸던 인간을, 이깟 꽃 한 송이로……”


“……다 됐다” 무너져 내린 문틈으로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거짓꽃말>, 2019. 8




<꽃자수>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Sponsored by 익명의 후원자   




아래 링크에서 다음의 작업물을 미리 예약함으로써 이 활동을 후원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더 오랫동안 쓰고 그릴 수 있게끔 작업을 후원해주세요. 후원자 분께는 오직 하나 뿐인 글과 그림을 보내 드립니다. 


다음 작업 사전후원하기 


http://bit.ly/2MeKVLL 



매거진의 이전글 습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