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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Sep 29. 2019

습작

백여덟번째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밥상머리에서부터 귀가 아프게 듣고 자랐다 우리새끼 무럭무럭 자라서 어엿한 일꾼 산업역군 되어야지 가진 것 없는 우리 집 우리나라 이제는 너희들이 떠받쳐야 한다고 인내는 쓰지만 열매는 달다는 말을 수십 가지 다른 단어들로 거듭해 들었다     


미래는 모두 너에게 달렸다 의젓한 모습 사회의 떳떳한 구성원으로 커서 어딜 가도 기둥이 되어야한다 대들보 같은 사람이 되어야한다 주춧돌처럼 단단하고 어떤 것에도 끄떡 않는 사람 그런 사람 우리가 돼야할 어른이었다

     

기본이 튼튼해야 나중에 걱정할 일이 없으니 내가 못간 학교들 명문대학교들 너는 꼭 가거라 스스로 바보 같다던 당신들이지만 제 자식은 바보 아닌 천재나 영재길 바랐네 학교 선생님께 늘 했던 말 우리 애가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해서……     


말로는 노력하라 하지만 속으론 특별한 줄 알아서 적게 애써도 많이 얻을 줄 아셨다 아무 것도 없는 암실에 가둬두고 먹기 좋게 썰어놓은 노력만 갖다 먹였다 사과 깎는 법 빨래 돌리는 법 울거나 사랑하는 법 몰랐지만 미적분은 알아야 했다     


책임은 나나 내 또래 애들이 가장 겁내는 말이었고 뭐하나 믿을만한 구석 없이 기대만 잔뜩 몸만 부쩍 커서 이제는 어른이라며 내게 서류더미와 계산을 맡기는데 우리는 노력했고 당신은 실망하기만 했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힘든 걸 힘들다고 말하면 안 되는 줄 알았다 배운 건 없어도 못 배운 게 창피한 일인 줄은 확실히 배웠다 그래서 우리 친구들에게 남은 건 정당히 분노하고 합리화하는 버릇 당신들의 유산 상속세 또는 빚이었다     


대답하면 말대꾸 가만히 있으면 반항이라서 당신들에겐 뭘 말해도 ‘-한 것 같습니다’하고 끝맺곤 했다 나와 내 생각엔 그 어떤 가치도 확신도 가질 수 있다 말해준 적 없었으니까 같으면 같았지 결단코 틀려선 안 된다고만 가르침 받았으니까     


그런데 있죠 세상에 기둥이고 싶어서 기둥인 나무가 어디 있나요 대들보 돼서 사방으로 짓눌리고픈 사람 누가 있나요 계절 따라 푸른 잎이고 다람쥐고 빨갛고 노란 열매들 짊어질 것을 무수한 서까래 지붕에 내리깔려 살 수 있나요     


당신들 보기 좋으라고 부풀려놓았던 기둥 이제 와서 배가 불렀다니요 우리도 알고 있어요 절대 당신처럼 할 수 없단 걸 죽어라 모아도 그럴듯한 집 한 채 살 수 없다는 걸요 할 수 있는 건 고작 먹는 것 자는 것 게임하는 것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이나 퍼마시는 것 여자들 뒤꽁무니나 따라다니는 것 뿐이죠     


매일이 빈사상태 머리에 피가 마르긴 한참 남았고 글러먹은 건 나라꼴보다 우리 미래와 통장잔고 숫자입니다 그럼에도 괜찮다 사랑한다 말해준 적 없던 당신들 이제와 우리를 욕할 수 있나요 이런 빌어먹을 구십 년대에 태어난 일 내 잘못만은 아닌데          


<집안의 기둥>, 2019. 9




<집안의 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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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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