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묵돌 Oct 05. 2019

습작

백열한번째

 별 수 없이 갔던 면접 자리였다. 하고 싶은 일이어서가 아니라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해서 갔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서마저 퇴짜를 맞았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면접을 취소하겠다고, 카페 주인이 아침에 보냈던 메시지는 내 스팸함에 처박혀있었다.


 면접도 못 봐줄 정도로 피치 못한 상황이란 게 얼마나 된다고? 넌지시 물어보니 ‘그만두기로 했던 알바가 도로 되돌아왔다’며, 곤혹스럽고 미안하다는 얼굴로 대답하는 것이다. 그쯤이면 할 만큼 한 것이었다. 더 화낼 명분도 엄두도 남지 않아서 발길을 돌렸다.


 일 좀 해볼라치면 항상 이 모양이었다. 어쩌면 세상에 내가 할 만한 일들은 벌써 누군가가 다 차지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안 되는 면접이나 쏘아 다니며 거절당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하기야 별 상관없었다. 내게 필요한 건 일이 아니라 애써 일하려 노력하는 모습 그 자체니까.


 덥고 습한 날이었다. 하늘에 회색 구름이 드리워 역 주변이 어슴푸레했다. 면접 장소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까지는 걸어서 오 분 거리였다. 얼마나 불쾌한 날씨인지 고작 그 거리를 왕복하는데도 온몸에 땀이 고여 끈적거렸다. 


 지하철 입구는 출입하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그런 기분으로 전철에서 부대끼는 걸 상상하자니, 금방 난동이라도 부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나는 역 출구 코앞에 서서야 택시를 타기로 결정했다. 이런 종류의 멍청함은 감히 날 따라올 사람이 없다.


 택시는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이따금 택시 고깔이 보이긴 했지만 죄다 불이 꺼져있었고, 토담황토색 차량들에는 이미 뒷좌석에 누가 타고 있거나 예약 장소로 가는 중이었다.


 금방 잡힐 줄 알았던 택시였는데, 몇 분 동안이나 잡힐 기미가 없으니 속이 탔다. 안 풀리는 날은 뭘 해도 안 풀린다니까. 그쯤 되자 택시 예약 앱만큼은 쓰고 싶지 않았다. 택시 잡는 일 조차 홀로 해내지 못한다면, 나는 앞으로 어떤 일도 스스로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별 희한한 데다 온갖 쓸데없는 의미를 갖다 붙이는 인간들은 정확히 이런 방식으로다가 불행한 법이다.     


 신호가 길어져 지나가는 차가 뜸해졌다. 자연스럽게 택시 잡기도 요원해졌다. 이렇게 되자 나는 한 시간이 걸리든 두 시간이 걸리든 택시를 타고 싶어져서, 갓길에 있는 난간에 걸터앉아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지하철역 출구 앞에는 나 말고도 누군가를 기다리며 휴대폰을 만지는 사람이 두어 명, 오가는 사람들에게 싸구려 전단지를 돌리는 할머니가 한 명 있었다. 바닥에 흩뿌려진 것들을 대강 훑어보니 역 앞에 있는 헬스장에서 일을 시킨 모양이었다.


 불쾌지수가 높은 날씨 때문인지, 할머니는 어울리지도 않게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전단지를 내밀어도 받는 사람은 열에 세 명도 안 됐다. 그나마 전단지를 받은 사람들도 몇 걸음 걷다 길가에 있는 쓰레기통에 쑤셔 넣었다.


 세상에 이렇게 비효율적인 현상이 더 있을까?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전단지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말이다. 각종 소셜미디어에 콘텐츠 마케팅이 판치는 이십일 세기에 그런 구닥다리 광고 방식이라니. 돈 낭비도 그런 낭비가 없었다. 


 ‘헬스장도 어지간히 장사가 안 되는 모양이지…… 하긴 장사가 안 된다고 넋 놓고 가만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겠지만’


 한편 그런 일로라도 몇 푼 벌어보려는 할머니나, 그 별 것 아닌 종이 쪼가리 한 장조차 받아주지 않는 사람들이나, 여기서 하릴없이 안 오는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 나까지, 안쓰럽다면 전부 안쓰러운 인간들이었다. 


 이윽고 장대 같은 비가 쏟아져 내렸다. 소나기였다. 우수수 떨어지는 빗방울에 어떤 사람들은 우산을 꺼내 폈다.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은 근처에 있는 아무 그늘이나 편의점으로 뛰어 들어갔고, 역 출구에서 나오지 않고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는 나 같은 사람도 제법 있었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소나기 앞에서 제자리를 지키는 사람이라곤 딱 한 사람뿐이었다.


 할머니는 아랑곳 않고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물론 정확히 말하면 ‘나눠주고’ 있던 건 아니었다. 그냥 전단지도 안 받아가는 판국에, 비에 흠뻑 젖은 전단지를 받아가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헬스장이 얼마나 돈을 아끼려 들었던 건지, 비에 맞는 족족 전단지의 잉크가 보기 흉하게 번져나갔다. 


 어쩔 수 없었다. 뭐라도 할 수밖에 없었다. 난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다. 지갑에 있던 돈을 전부 꺼내 손에 쥐고,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그만 집에 가세요” 내가 말했다. 


 “……뭐?” 할머니는 돌연 인상을 팍 써가며 대꾸했다. 귀가 잘 안 들리시는 듯했다. 


 “집에 가시라고요! 전단지 그만 돌리시고” 나는 빗소리보다 더 크게 말했다.


 “다 나눠줘야 돈을 받는데”


 “다 나눠주면 얼마 받으시는 데요?”


 “삼 만원”


 “여기 오 만원 있어요”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지폐를 내밀었다. “제가 그 전단지 다 살게요”


 “……다 산다고, 이걸?”


 “네. 살 테니까 이리 주세요. 그리고 집에 가서 푹 쉬세요”


 “……”


 할머니는 얼마간 내 눈을 응시하다가, 말없이 돈을 받은 뒤 쏟아지는 비 사이로 걸어 사라졌다.


 나는 잉크가 덕지덕지 번진 종이 꾸러미를 쓰레기통에 욱여넣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비를 맞았는지, 지하철역 안에 들어갈 무렵엔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따로 없었다. 


 ‘그래도 땀은 씻어냈단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나았다. 오히려 꽤 시원스런 기분까지 들었다. 그래도 그 꼴로 객차 안에 들어가긴 부끄러워서, 개찰구 안쪽 벤치에 앉아 세 번이나 전철을 지나 보냈다. 


 계속 그렇게 기다릴 작정이었다. 흠뻑 적셔진 옷이 마를 때까지. 하염없이.        


  

<인생의 낭비>, 2019. 10




<흐르는 도시>





-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아래 링크에서 이 글과 그림을 구매하거나, 혹은 다음의 작업물을 미리 예약함으로써 이 활동을 후원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더 오랫동안 쓰고 그릴 수 있게끔 작업을 후원해주세요. 후원자 분께는 오직 하나 뿐인 글과 그림을 보내 드립니다. 


이 글과 그림 구매하기 


http://bit.ly/2MiEcxA


매거진의 이전글 습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