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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Oct 15. 2019

습작

백열다섯번째

 꽃밭은 울창한 숲 한 가운데 있었다. 공주는 연분홍색 꽃으로 된 덤불 위에 반듯이 누워있었다. 갑작스레 의식을 잃은 것치곤 편안한 표정이었다. 


 “여기에요, 용사님” 난쟁이 요정이 숲속에서 빠져나오며 말했다. “여기에 공주님이 쓰러져 있어요”


 “앗, 따거…… 어디 말하는 거야?” 더벅머리를 한 남자가 팔을 헤집으며 뒤따라 나왔다.


 “여기요, 여기 꽃밭위에 누워 계세요” 난쟁이 요정은 공주가 쓰러져있는 곳 바로 위까지 날아가 빙글빙글 원을 그렸다. 더벅머리 남자는 공주가 있는 쪽까지 다가섰다.


 “오……” 남자가 흠칫 놀라 말했다. 공주는 쓰러진 채 미동도 없었지만 무척 아름다웠다. 분홍색 꽃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나 그 위로 반짝거리며 나는 난쟁이 요정, 홍옥처럼 새빨간 윤기가 도는 공주의 입술까지 모두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뭐 하고 있어요? 한시가 급해요. 얼른 공주님께 입을 맞추세요” 난쟁이 요정은 타박하는 투로 말했다. “한시 빨리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세요”


 “윽. 그래, 잠깐만. 마음의 준비를……”


 “빨리 하라고요”


 “알았다니까” 더벅머리 남자가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공주의 입술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남자와 공주의 입술이 포개지려고 하는 그 때, 별안간 남자의 머리가 큰 충격과 함께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뭐, 뭐야……?” 남자는 난데없이 머리를 얻어맞아 혼란스러웠다. 방금 전까지 남자가 서있던 자리에는 웬 사나이가 경멸스러운 눈으로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가 날 법한 상황이었지만 별 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치렁치렁한 옷차림으로 미루어보건대 귀족이나 왕가 출신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 천한 것이 어디서!” 도련님이 말했다. “네깟 놈이 감히 공주님을 희롱하려 들다니…… 빼도 박도 못 하는 사형감이다!”


 “아니, 나리…… 제 얘기 좀 들어 보십쇼” 남자는 다리를 휘청거리며 겨우 일어나 말했다. 더벅머리는 그사이 더더벅머리가 돼있었다. “희롱하려고 한 게 아니라요”


 “아니긴 뭐가 아냐? 요즘은 말 한 번 잘못해도 성희롱인 거 몰라? 의식불명의 여성에게 의사도 한 번 묻지 않고 키스하려고 했잖아…… 심지어 공주님인데!”


 “아, 그게 아니라…… 그……” 더더벅머리 남자가 버벅거렸다.


 “지금 다들 뭐하자는 겁니까? 한시가 급하다고요! 누가 돼도 좋으니 공주님한테 입을 맞추세요! 공주님을 살려주세요!” 상황을 지켜보던 난쟁이 요정은 바짝 열이 올라 소리쳤다.


 “어? 누가 돼도 좋은 거였어? 그럼 왜 나를……”


 “그럼 내가 하도록 하지” 도련님이 더더벅머리 남자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무래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것 같으니까. 공주님께 키스를 하면 되는 건가?”


 “키스가 아니라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셔야 해요” 


 “혀도 넣어서 해? 아니면……”


 “뭐라는 거야, 이 변태새끼가!” 더더벅머리 남자가 도련님의 뒤통수를 갈기며 말했다. “지금 보니까 희롱은 니가 하네! 내가 아니라”


 “아, 씨바…… 야, 너 봤지? 이 천한 게 내 뒤통수 때리는 거 봤지? 지금부터 이건 정당방위다. 알겠어?” 도련님은 뒤통수를 어루만지면서,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내가 뒤통수 친 것도 정당방위야! 이 새꺄!”


 “아, 누구라도 좋으니 빨리……”


 “너 같은 반체제주의자는 죽어 마땅해” 도련님이 허리춤에 있던 칼을 뽑아들었다. “내가 니 목을 쳐서 계급의식이 희미해진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릴 것이다”


 “후…… 이거 어쩔 수 없군”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러자 더더벅머리가 쏟아져 그냥 더벅머리가 됐다. 그리고 이내 무릎을 꿇어 장화에서 단검을 빼들었다. “나는 너 같이 역겨운 유산자를 보면 참을 수가 없거든”


 “여보세요, 거기 경찰이죠? 지금 여기에 미친……” 보다 못한 난쟁이 요정은 품속의 갤럭시탭을 꺼내들어 전화를 걸고 있었다.


 “역시 내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군…… 너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는 하루라도 빨리 박멸하는 게 답이야!”


 “죽어라! 부르주아지!” 더벅머리 공산주의자의 칼끝이 유산계급자의 검과 맞부딪히며 몇 번이고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공산주의 혁명을 이룩하기 위해 매일같이 단련에 단련을 거듭한 더벅머리 남자였지만, 어렸을 때부터 강도 높은 엘리트 교육을 받아온 유산계급 도련님도 만만치 않은 실력을 갖고 있었다. 싸움은 쉽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계속해서 합을 겨루며 지쳐갈 무렵, 경찰이 출동했다. 비포장도로를 지나온 앰뷸런스는 그보다 늦게 도착했으나 공주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경찰에 의해 연장 체포된 두 남자는 납치 및 감금치사를 사유로 나란히 거열형에 처해졌다. 그럼에도 분이 가시지 않은 왕은 갈기갈기 찢긴 두 남자의 시신을 들소의 여물로 주라 명령했다.


 머잖아 공주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얼마 후, 왕은 공주의 죽음과 같은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CPR교육을 제도화 했다. 그 덕분일까? 왕국의 내원 전 뇌졸중 사망률은 최근 5년간 급격히 감소추세를 보였으니, 인간의 죽음은 순간인 반면 예방은 대를 넘어 이어지는 것이라 하겠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로 보는 심폐소생술의 중요성>, 2019. 10



<영원한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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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 'Reinette' 님이 값을 미리 치러 주신 덕분에 이 글과 그림을 작업하고 공개할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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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it.ly/2MeKV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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