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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Nov 30. 2019

습작

백스물여덟번째

 “가끔은 너무 슬프고 우울해요. 어떤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고, 아무 것도 하기 싫어지고요” 나는 상담실에 놓인 자그마한 테이블을 응시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럴 땐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글쎄요, 꼭 뭔가 해야 할 필요가 있나요?” 상담사가 되물었다.


 “다른 데서도 그런 말을 많이 듣기는 했어요. 꼭 뭔가를 할 필요는 없는 거라고요” 나도 모르게 조금 비딱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음, 그러던가요?” 


 “네. 그런데 말이 안 되잖아요. 아파 죽겠다는 사람에게 그냥 참고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으라니. 보통은 약을 주던가, 좀 나아지는 방법을 제안하거나 그러잖아요? 그런데 유독 정신이 아플 땐 도움 안 되는 짓거리나 해댄단 말이에요”


 “아하. 예를 들면 어떤?”


 “꼭 뭘 할 필요는 없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그런 걸로 슬퍼하기엔 네가 너무 소중해, 넌 충분히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 같은 거요……”


 “그런 말들이 기분이 나쁘던가요?”


 “늘 그런 건 아닌데, 가끔은 정말 싫을 때도 있어요. 그게 정말 내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아서요. 그냥 ‘누군가를 위로할 줄 아는 자기 자신’이 되려고 하는 말 같은? 너무 삐딱한 생각이긴 하지만” 나는 왠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너무 우울하면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죠”


 “네. 너무 우울하면 그렇게 돼요. 혼자 우울한 걸로 모자라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우울감을 전이시킨다고요. 그럴 땐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루 종일 잠만 퍼질러 자는 것도 한계가 있고요. 근본적인 해결책도 아니거니와……”


 “아! 우울한 걸 어떻게 해결하죠?” 상담사는 난데없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어…… 저도 그걸 알고 싶어서 상담에 온 거겠죠?”


 “그런 건 없어요”


 “네?”


 “해결책 같은 건 없다고요. 우울한 마음이 한 순간에 사라져버리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항우울제 같은 약물로 보조 정도야 할 수 있겠지만”


 “하지만, 이렇게 상담을 받는 것도 우울감을 해소하기 위한 일종의 해결책 아닌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왔는데”


 “네. 애초에 우울하다는 건, 감정이라는 건 해결할 수 있는 문제 같은 게 아니니까요. 문제도 아닌 걸 ‘해결’한다니 좀 이상하죠?”


 “문제가 아니란 말씀은” 나는 잔뜩 의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문제가 아니에요. 굳이 말하자면 현상이겠죠. 맑은 날이 있으면 비가 오는 날이 있고, 안개가 자욱한 날이 있는가하면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 있는 것처럼요. 그런 것들을 ‘문제’라고 하진 않잖아요? 그날그날의 날씨라고 하지. 당연히 해결이라는 것도 없고요. 약간의 대비 정도야 할 수 있겠지만. 애초에 사시사철 맑고 쾌청한 날씨만 이어질 필요가 있나요? 비오는 날이 좀 우중충하지만 나름의 쓸모가 있을 텐데”


 “그렇긴 한데…… 그럼 우울감을 비오는 것처럼 받아들이라는 건가요?”


 “비슷한데 조금 달라요. 제가 말씀드리려는 건” 상담사는 앞으로 내밀었던 허리를 꼿꼿이 세워 보이고, 다시 말했다. “비가 올 땐 비가 오는 것부터 알아야한다는 거죠. 팔을 창문 밖으로 쭉 내밀어 손바닥에 떨어져 닿는 빗방울을 느껴보든지, 유리벽에 이리저리 부딪혀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모습을 후두둑 소리와 함께 지켜보든지…… 일단 비가 올 땐 비가 온다는 것부터 마음 속 깊은데서 받아들여야 해요. 어제까지 밝게 떠있던 해를 오늘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 한편으론 언제 그칠진 모르지만 영원히 내리는 비가 없다는 것도. 뭘 해야 할지는 그 다음에 생각할 일이죠. 그건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을 거고요. 자, 그럼 비가 오는 걸 알았어요. 이제 뭘 하실 건가요? 보통 비오는 날에는 뭘 하세요? 할 일이 없는 날이라고 하면?”


 “……그냥 빗소리를 들으면서 멍하게 있어요. 어두컴컴한 와중에 사람들이 우산을 쓰고 이리저리 다니는 모습도 지켜보고요. 그게 다에요”


 “좋아요. 방금 건 괜찮은 대답이 됐나요? 우울할 땐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에”


 “네. 도움이 많이 됐어요. 이제 우울할 때 뭘 해야 할 지 알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요? 다행이네요. 그럼…… 여쭤 봐도 될까요? 우울할 때 뭘 하실지”


 “꼭 뭘 해야 하나요? 하하” 나는 일어나 겉옷을 챙겨 입었다. “꼭 해야 하는 게 있다면 그런 거겠죠. 우울할 땐 최선을 다해서 우울해할 수밖에 없어요. 있는 힘껏……”


 대답을 들은 상담사는 말 한마디 없이, 무척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배웅했다. 놀랍도록 편안한 표정이었다. 소나기 내리는 오후, 인적 없는 암자의 불상에서나 피어오를 것 같은.               


 

<해가 없는 연립방정식의 풀이>, 2019. 11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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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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