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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Nov 28. 2019

습작

백스물일곱번째

 “이제는 완전히 겨울이라니까요. 저는 어제 집안 창문에다가 문풍지 싹 다 발라서 붙여놨잖아요. 어째 바람이 일주일 상간에 그렇게 차가워지는지……” 로비 저 옆쪽에 앉은 어느 아주머니의 목소리였다. 


 병원에는 사람이 꽤 많았다. 다만 하나같이 말이 없는 통에 유별나게 크지도 않은 통화소리가 귀에 꽝꽝 울려댔다. 나는 현기증이 조금 나서, 좀 조용히 해 주시겠어요, 하고 언질을 주려다 말았다. 여기가 어디 독서실도 아닌데. 병원에서 통화 좀 했기로서니 뭐가 그리 큰 잘못이란 말인가. 잘못이 있다면 제멋대로 살다가 때맞춰 몸살에 걸려 찾아온 내 쪽이겠지.


 이맘때 병원에서 대기하는 시간만큼 지루한 것도 없다. 그동안 읽어보겠답시고 가져온 소설책을 폈다. 눈이 팽글팽글 돌아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려본들 몸이 따라주지 않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 하는 수 없이 휴대폰을 켜서 손가락을 움직거렸다. 


 어느덧 연말연시였다. 시쳇말로 올해 구정이 지나간 지도 엊그제 같은데. 친구들은 벌써부터 크리스마스며 송년회를 준비하는데 한창인 모양이었다.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녀석은 공기업에 취직하더니 인터넷에서 쓰는 말투부터 싹 바뀌어버렸다. 모든 게 변하는 줄은 알지만 영 적응이 어려운 것들도 있다.


 “환자님, 열 좀 재볼까요” 간호사가 말했다. 나는 벽에 기대앉은 채 말없이 모지를 벗어 내렸다. 귓구멍으로 뭉뚝한 플라스틱 체온계가 스며오는 느낌. 곧 ‘딸깍’하고 스위치 누르는 소리가 이어서 났다. “열이 꽤 있네요. 7도 9부에요”


 “아, 그래요?” 나는 어쩐지 생경한 체를 했다.


 “네. 조금만 기다리세요. 호명하면 진료실 들어가시면 돼요”


 “네” 내가 대답했다.     


 진료는 2분도 안 돼 끝났다. 의사는 내게 면역력이 많이 약해졌다, 요즘 갑자기 날씨가 추워져서 많이들 힘들어하신다면서 링거액 좀 맞는 건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물었다.


 “저도 맞고 싶긴 한데, 비싸지 않나요?” 내가 물었다.


 “요즘은 싼 것도 많이 나와요. 포도당 주사만 맞으면 삼만 원이면 되고요”


 “아, 예……”


 “하나 놔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래요. 그럼” 의사는 능숙하게 웃어보였다. 진료가 끝났다는 제스쳐였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 뒷걸음질로 진료실에서 빠져나왔다. 그사이 로비에는 환자가 나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대체 뭘 기대했던 걸까?’


 건물 아래쪽에 위치한 약국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처방약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당최 뭘 기대했던 걸까. 열이 있다거나 감기몸살이 있다는 것쯤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병가도 정상처리 됐겠다, 집에 있는 해열제나 두세 알 까먹고 따뜻하게 자고 일어나면 머잖아 나을 것이었다. 초겨울 날씨에 굳이 옷까지 차려입고 밖으로 나올 필요까진 없었는데.


 해가 짧아 다섯 시 남짓해서도 날이 어둑어둑했다. 가파른 하늘은 회색 구름이 잔뜩 끼어 우중충했고, 그믐달 주변으로 희미하게 낀 노을이 분홍색 홍조처럼 보여 퍽 몽환적이었다. 벌써부터 달이 뜨고 찬  바람이 불다니. 불과 한 달 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이렇게 내가 아프고 열이 날 줄은. 이런 상황에 또 다시 혼자일 줄은.


 밖은 추웠지만 집으로 돌아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외로운 냄새 나는 이불에 뒤엉켜있다간 없던 병도 불쑥 생길 것이다. 하릴없이 도로가를 따라 쭉 걸어 다녔다. 습관처럼 꺼낸 휴대폰에는 배터리가 없기만을 기도했다. 그러나 모바일 기기라는 건 꼭 이럴 때만 방전되는 법을 잊어버린다.


 처음에는 전화를 걸려고 하다 말았다.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받으면 어떡하지, 그게 아니라면 아예 차단이 돼 있을 수도 있다. 그땐 어떻게 하지, 몇 가지 걱정 너머로 나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오붓한 크리스마스며 송년파티를 준비하고 있을 네 모습이 비쳐보였다.


 「날이 많이 추워졌네. 따뜻하게 입고 다니고, 감기 조심..._」     


 나는 네게 보낼 메시지를 쓰다가 말고 몽땅 지워버렸다. 그 전지전능한 휴대폰으로도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모든 게 불과 한 달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산뜻한 날씨에서 별안간 겨울로 접어든 것도, 사랑하던 네가 내게 영영 닿을 수 없는 세계가 돼버린 것도. 그마저도 들이닥치고 나서야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기를 겨울이라 부르는 걸지도 모른다. 겨우 우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아서, 쉽게 열이 나고 수시로 아픈 시기. 네가 해맑게 웃어보이던 얼굴이며, 코인 노래방에서 즐겨 부르던 노래가사가 떠올라 온몸이 파르르 떨리는 날 말이다. 이제 나는 딸기향 해열제 같은, 환상적인 해결책이 필요해…….          



<후천성 짝사랑 증후군>, 2019. 11




<구름의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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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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