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

백서른일곱번째

by 이묵돌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한 늑대가 있었다. 그 무렵 숲에는 배를 채울만한 것은커녕 마실 물조차 여의치 않았다. 몇 달간 극심한 가뭄이 이어진 까닭이었다. 흐르던 개울은 말라비틀어졌고, 바싹 마른 흙바닥에선 벌레 한 마리도 볼 수 없었다.


‘이러다 정말 굶어죽겠군. 사람 다니는 길에라도 가서 먹이를 구해봐야겠어. 나는 굶더라도 내 새끼들은 굶기지 말아야지’


늑대는 새끼들을 나무 밑동에 파인 땅굴에 숨겨둔 다음, 숲 가운데로 나있던 오솔길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인적이 뜸한 곳이긴 해도 이따금 쓸 만 한 물건이며 빵조각 따위를 흘리고 다니는 인간들이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


오솔길에 도착할 즈음엔 해가 넘어 저녁이 다 돼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얼마 걸리지 않는 짧은 거리였는데, 오랫동안 굶어서 좀처럼 속도가 나질 않았다. 더구나 늑대의 바람과 달리 주변에 건질 만한 것도 없었다.


‘이래서야 오랫동안 걸어온 보람이 없잖아. 좀 숨어 있다가 혼자 다니는 녀석이 있으면 수를 써봐야겠다. 아무래도 그냥 돌아가긴 힘 빠지니까……’


그렇게 길섶에 몸을 숨긴지 몇 분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희미한 등불과 인기척이 오솔길 끝에서부터 가까워왔다. 늑대는 눈가를 팍 찡그려 먼 쪽에 초점을 맞췄다. 빨간 망토를 뒤집어 쓴 소녀가 바구니와 등불을 하나씩 들고 어디론가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미처 생각할 틈도 없었다. 자신은 물론 자식들의 생존마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 때야 말로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는지도 몰랐다.


늑대는 자세를 낮추고 조심스레 소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내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소녀의 목덜미를 덮쳐 숨통을 끊어버리려던 그 순간…… 별안간 소녀가 두르고 있던 망토가 휘감기더니, 매서운 눈빛과 쇠로 된 총구가 늑대의 미간을 짓이겼다.


“한 발자국만 더 앞으로 와봐. 곧바로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줄 테니까”소녀는 빨강망토 뒤에 숨겨놓았던 엽총을 꺼내 겨누며 말했다.


“워, 워……” 늑대는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제발 진정해. 나는 그냥 먹을 게 있나 싶어서 물어본 거야……”


“웃기고 있네. 늑대가 하는 말을 누가 믿어?”


“믿든 안 믿든 그건 네 자유지. 그렇지만 내 몰골을 봐. 뼈가 다 드러나서 제대로 싸울 수도 없어. 난 정말 이 주변에 먹을 게 없나 해서 돌아다니고 있었을 뿐이야”


“늑대가 뭐 그래? 자고 있는 토끼라도 잡아먹든가, 아니면 풀이라도 뜯어먹으면 되지”소녀가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야. 초식동물들이 얼마나 재빠른데. 컨디션이 좋을 때도 기습을 잘 해야 겨우 잡을 수 있어. 맘 같아선 풀대기라도 잔뜩 먹고 싶지. 근데 비가 안 온지 벌써 몇 달이나 됐어. 나무열매는 고사하고 굴러다니는 풀조각도 찾기 힘들단 말이야. 또 동굴에서는 새끼들이 밥 달라고 울어대는데…… 나더러 뭐 어쩌란 거야?”


“그건 좀 딱하게 됐네”소녀는 조금 누그러진 얼굴을 하면서 가늠자를 시야 아래로 떨궜다. “그런데 어쩌지? 나는 지금 먹을 게 거의 없는데…… 요즘 다이어트 중이라서 채식밖에 안 하거든. 그래도 사과 반 쪽 정도는 줄 수 있어. 그거라도 먹을래?”


“나야 고맙지. 찬 밥 더운 밥 가릴 때가 아니니까”늑대가 대답했다. 소녀는 곧 바구니 안에서 사과 반 토막을 꺼내 늑대가 있는 쪽으로 던졌다. “아, 정말 고마워”


“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사과밖에 못 줘서 미안한 걸” 소녀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는 거야? 아픈 할머니 병문안인가?”


“아, 애인한테 가. 저 안쪽에 있는 별장에 혼자 살고 있거든”


“애인이라고?” 늑대가 의아하다는 투로 되물었다.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 저 안쪽에는 집이 한 채밖에 없는데”


“나도 알아”


“거기 살고 있는 건 괴팍하고 볼품없는 영감 한 명뿐이야. 자식은 도시로 다 떠났고 아내도 얼마 전에 죽었지. 그런데 애인이라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아니, 맞아. 제대로 들었어”


“아” 늑대는 뒤늦게 뭔가 알아차렸다는 듯 표정을 팍 찡그렸다. “이런, 왜지? 너처럼 예쁜 애가 뭐가 아쉬워서?”


“돈을 많이 주니까”소녀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돈 벌 방법이 그것밖에 없는 건 아니잖아? 넌 한창 때 나이고, 공부든 막일이든 다른 할 만 한 일은 얼마든지 있는 거 아냐. 그런 짓이나 하고 다니기엔 넌 너무 어리지 않니?”


“남 말이라고 함부로 하지 마. 먹고 사는 일에 쉬운 게 어디 있어? 사는 게 너만 힘든 줄 알아?” 소녀가 표독스럽게 쏘아붙였다. “나도 집에 챙겨야할 동생들이 있어. 부모님은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네 말처럼 더운 밥 찬 밥 같은 거 가릴 수 없는 상황이야. 주어진 선택지 자체가 별로 없어. 살아남으려면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하는 거지…… 자, 이제 비켜줄래? 시간 맞춰 도착하지 않으면 페이가 깎이거든”


늑대는 말없이 몸을 비껴 길을 내줬다. 그리고 소녀에게 건네받은 사과 반쪽을 재갈처럼 물곤 동굴로 향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세상 말세군…… 나중에 다시 태어나도 사람은 아니길 바라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반쯤 되돌아왔을 찰나였다. 늑대는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을 마주했다. 환하게 비치는 달빛 아래로 잘려나간 나무 밑동이, 그 위로 커다란 고깃덩어리 하나가 놓여있었던 것이다.


‘착하게 살다보니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구나. 곧 배가 고파서 걷기도 힘들 지경이었는데, 잘 됐다’


아무리 제 자식들을 위한 일이라지만, 사흘이나 굶은 상태에서 향긋한 사과를 입에 물기만 한 채로 먼 길을 가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결국 늑대는 입에 물고 있던 사과를 그대로 먹어 삼켰다. 그리고 밑동 위에 놓인 고기에 이빨을 깊게 깨물어 넣은 뒤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늦게 밑동에 박혀있던 경고문이 눈에 들어왔다.


<주의! 곰을 잡기 위해 놓아뒀으니, 곰이 아니라면 먹지 마시오>


삽시간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세상에 이렇게 미련한 일이 어디 있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깊은 숲속에 다 손질된 고깃덩이가 떡하니 놓여있다면 뭐라도 이유가 있는 법일 텐데. 너무 배가 고팠던 나머지, 평소같이 의심 한 번 하지 못하고 일을 저질러버렸던 것이다.


후회가 막심했다. 그렇다고 목뒤로 넘어간 사과가 도로 빠져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 수확도 없이 동굴로 돌아가기에 자식들은 너무 지쳐있었다. 뭐라도 음식을 먹지 못한다면 그날 밤도 넘기지 못 할 게 불 보듯 뻔했다. 굶어죽는 일은 둘 째 치고 먼저 죽는 아이의 시체라도 파먹어야 할 판이었다.


고민 끝에 늑대는 그대로 고깃덩이를 끌고 동굴로 돌아갔다. 곰에게 먹히는 독이 늑대에게는 안 먹힐지 모른다는, 도박과 다름없는 심정으로 자식들과 마지막 만찬을 즐겼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튿날 새벽이었다. 소녀는 영감이 깨지 않게 조심히 일어나서 별장을 나섰다. 때마침 숲 속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로소 가뭄이 끝났다. 단지 소녀에겐 우산이 없었다. 땅 속에서 죽은 늑대 가족들이야 계속 썩어 들어갈 따름이었다. 돌아가는 오솔길에서 비릿한 물 냄새가 잔뜩 풍겼다.



<빨간 망토의 비밀>, 2020. 1





KakaoTalk_20200108_221106583.jpg < 빨간 망토의 비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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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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