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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Jan 18. 2020

습작

백마흔번째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부터, 할머니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 십 수 년째 손녀딸 생일을 챙기셨던 분이 오늘의 날짜를 헷갈리는가 하면, 이따금 찾아오는 사위의 얼굴도 긴가민가한 끝에 겨우 알아보시곤 했다. 


 “어떻게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바로 그러시는지 모르겠네” 짐을 챙기던 엄마가 푸념하는 투로 이야기했다. “일흔 넘게 잔병치레 한 번 없으셨거든, 너희 외할머니는……”


 “엄마가 건강한 것도 할머니 닮아서 그런가 봐” 내가 말했다. 


 “얘 말하는 것 좀 봐. 내가 건강하긴? 엄마도 나이 먹고 몸 움직이는 게 하루하루가 다른데”


 “내 주변 친구들 부모님 보면 벌써부터 성인병이다 뭐다해서 병원 안 다니시는 분이 거의 없던데…… 엄마 정도면 정말 건강한 편이야”


 “아이구! 그건 타고난 게 아니라 관리를 잘 해서야. 관리를. 그리고 내가 어디 맘편하게 아플 수라도 있는 입장이니? 자기 먹는 밥도 제대로 못 챙겨먹는 딸 때문에라도 건강할 수밖에 없지”


 “어련하시겠어요” 나는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할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지셨다. 곧았던 허리가 부쩍 휘어선 거동이 어려워지셨고, 검게 윤기가 흐르던 머리칼도 오랫동안 염색을 하지 않아 하얗게 샜다. 다만 딸자식과 손녀딸과 함께 느지막이 동네 산책을 나갈 때만큼은, 곧 죽을 사람이라곤 볼 수 없을 만치 생기가 넘치시곤 했다.


 할머니와의 산책은 천천히 걸어 왕복 한 시간쯤 걸리는 길이었다. 할머니 집 현관을 빠져나와 자그마한 근린공원을 지나고 나면, 완만한 오르막길이 야트막한 둔덕 너머로 이어졌다. 그 길로 쭉 걷다보면 어느덧 시야가 확 트여 근처 동네가 한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는 거기 놓인 나무벤치에 걸터앉아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면서 저 아래 동네에서 장을 보러 가는 부모들, 그 뒤를 따라 걷는 대여섯 살배기 꼬마아이와 오후 장사를 준비하는 과일가게 아저씨, 커다란 헬멧을 쓴 채 지나다니는 오토바이 청년 그리고 학교에서 막 돌아오는 길의 여고생들을 내려다보시다가, 어느 순간 대뜸 말을 꺼내시는 것이다.


 “내가 몸이 안 좋아지긴 했어”


 “……새삼스럽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조금쯤 당황해서 되물었다. “그래도 산책하시면서 많이 나아지셨다면서요. 내일은 더 좋아지겠죠. 그쵸?”


 “으응, 몸은 좋아졌지. 그런데 눈은”


 “눈이요? 할머니, 눈이 이상해요? 그런 말 안 하셨었잖아요”


 “꽤 오래전부터 그랬어. 눈앞이 흐릿흐릿해가지고, 어떨 땐 바로 앞에도 잘 안 보인다니까……” 할머니는 자못 태연하게 대답했다. 얼마나 자연스러운 말투인지, 언뜻 듣기론 당신과 아무 상관없는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엄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할머니가 눈이 안 좋으시대. 앞에 뭐가 낀 것처럼 흐릿하시다는데 혹시 백내장이면 어떡하지 내일 내가 안과모시고 가보려고 하는데 엄마 생각은 어때……’


 그러던 와중에 할머니가 말을 꺼냈다. “새롬아”


 “……네, 할머니”


 “좀 흐릿하지만 괜찮다. 뭐든지 자세히 볼 필요도 없고”


 “일상생활 하는데 불편하시잖아요, 그래도. 내일 저랑 같이 병원 가요”


 “아이고, 이 나이에 병원은? 됐다. 됐어…… 흐릿한 것도 나름대로 멋이 있지”


 “앞이 안 보이는데, 멋은요”


 “왜 멋이 없어?”


 “왜 멋있는데요?”


 “……어느 정도 되면 세상이 다 그림처럼 보여 가지고” 할머니가 말했다. “나이 들어선 너무 자세한 건 볼 필요가 없어. 색깔만 구분하면 돼”


 “……잘 모르겠어요” 


 “허허” 하고 할머니는 웃고 말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할머니는 그날 새벽에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정확히 반 년 되는 날이었다. 엄마는 하필이면 그런 날 비번이었던 것이 평생의 한이 될 것 같다며 우셨고, 의사는 그런 엄마에게 “편안하게 떠나셨으니 너무 자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며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실제로 영안실에서 본 할머니는 너무도 평화로운 얼굴을 한 채 누워계셨다. 그렇게 될 순간을 아주 오랫동안 참아왔다는 듯, 책임질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길 기다렸다는 듯이. 그런 표정으로 떠나신 할머니 때문에, 슬퍼하는 엄마를 이해하는데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엄마와 나는 할머니 집에 남아있던 유품이며 잡다한 짐들을 하나둘 정리했다. 열 평 남짓한 방에 혼자 사시던 할머니는 흔적이 너무 적어서 야속할 정도였다. 하루 종일은커녕 반나절 만에 거의 모든 정리가 끝났다. 따로 사람을 부를 필요도 없었다.


 우리는 근린공원에 딸려있는 공터로 가서 작은 불을 피웠다. 할머니가 덮고 주무시던 이불, 베개솜, 아끼던 색동저고리와 보자기들을 하나둘 태워 올렸다. 


 돌아 나올 무렵엔 때마침 해가 지고 있었다. 할머니가 동네를 내려다보시던 그 장소가 앞에 보였다. 다가가 고개를 내밀면 지금이라도 벤치에 할머니가 앉아계실 것 같았다. 


 “……그만 가자” 엄마가 뒤에서 내 옷끝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잠깐만 보고갈래요”


 “아니, 그러지 마” 엄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요?”


 “엄마는 더 이상 못 보겠어. 앞이 흐릿해서……”


 “……”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엄마의 손을 잡았다. 공원으로 향하는 길섶에는 초저녁의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엄마는 딱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눈물을 흘렸고, 길가 수채화는 빛이 바래 꼭 할머니의 눈을 닮아 있었다.           



<슬픈 수채화>, 2020. 1



<아랫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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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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