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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Mar 16. 2020

습작

백마흔여덟번째


 길에서 히치하이커를 태운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많아야 이십대 중후반이나 돼보였던 여자는 엷은 갈색 단발을 하고 있었다. 또 거기 맞춰서 비슷한 색깔의 안경을 코 위쪽으로 올려 쓴 채였는데 힐끗 보니 안경알도 없이 테만 걸친 것이었다. 


 “태워주셔서 감사해요. 휴대폰 배터리도 다 떨어져서 막막했던 참이었거든요” 조수석에 앉은 여자가 대뜸 말을 꺼냈다.


 “뭘요. 어차피 그냥 가는 길인데요” 내가 대답했다. “그런데 젊으신 분이 겁도 없네요. 저야 건장한 남자니까 무서울 게 없지만……”


 “하하, 괜찮아요. 다행히 제가 관상을 좀 보거든요”


 “관상이라고요?”


 “네. 그래서 위험하겠다 싶은 사람이면 바로 느낌이 오거든요. 그런데 아저씨는 딱히 그렇진 않았네요”


 “그거 다행이네요”나는 약간 이죽거리듯이 대꾸했다.


 “네. 정말로요” 여자가 대답했다.


 제주시와 서귀포시는 각각 섬의 열두 시와 여섯 시 방향에 위치해있다. 직선거리상으로는 얼마 되지 않지만, 한라산 봉우리를 길 사이에 두고 있어 생각보다는 꽤 시간이 걸린다. 지루한 숲길을 내달리다보면 좀체 시간이 지나지 않는다. 


 한편 서쪽 해안선을 돌아 내려가는 도로는 우편에 바다가 놓여 있어선지 한결 즐거운 기분이 든다. 물리적인 길이가 길다고 해서 체감되는 시간까지 길다고는 할 수 없는 모양이다. 차선이 몇 개 되지도 않는 도로에는 뜨문뜨문 차가 지나다녔다. 이맘때에는 관광객도 드물어 길을 걸어 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다시피 해서, 길 한 쪽에 흰색 캐리어가방과 함께 우두커니 서서 엄지손가락을 휘두르고 있는 여자란 참으로 생경한 광경이었다.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낯을 꽤 가리기로 유명했다. 친구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빈말로라도 많다곤 할 수 없었다. 제주도로 적을 옮긴 뒤로는 그런 경향이 더 심해져서, 지나가는 길에 모르는 여자를 한 명 바래다주는 것조차 어마어마한 모험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 아저씨는 여자친구 있어요?” 난데없는 질문이었다.


 “……그건 왜요?” 나는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없나보네요. 하하하……” 눈치가 빠른 여자였다.


 “아니, 없기는 한데. 왜 물어보나 싶어서. 보통 처음 보는 남자한테는 안 물어보지 않나요?”


 “무슨 소리에요. 옛말에 사람이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저는 차까지 얻어 탄 마당이잖아요. 못 물어볼 이유도 딱히 없잖아요?”


 “네, 그럴 듯 하네요” 그쯤되니 귀찮아져서 대충 대답해주고 말았다. “모슬포항에 내려다주면 되나요?”


 “아, 네. 그냥 지나가는 길에 세워주시면 돼요. 적당히 걸어가면서 경치도 볼겸…… 물론 모슬포항 입구에 내려다주시면 더 좋지만요”


 “네. 안 그래도 돌아가는 길이라서. 항구 안쪽까진 데려다 주기가 좀 그렇고…… 그쪽 들어가는 입구에 버스정류장이 있거든요. 사실 걸어가기는 좀 먼 거리라” 내가 말했다.


 “에, 한 번 더 갈아타라구요?”


 “네?” 나는 잘못들은 것 같아서 되물었다. “아니, 그야…… 갈아타는 게 싫으시면 조금만 더 가서……”


 “아하, 괜찮아요. 제가 싫으시면 어쩔 수 없죠”


 “전 그런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잖아요? 목적지가 다르면” 여자는 자못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갈 수 있는 데까지만 같이 가다가 각자 갈 길 가는 수밖에 없죠” 


 “……”


 “안 그런가요? 사는 게 다 그렇죠”


 “……네. 다 그렇죠. 전부 그래요” 내가 대답했다.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모슬포항 근처까지 가서 속력을 더 냈다. 항구 안 쪽까지는 불과 몇 분도 되지 않는 거리였다. 까짓 거 태워주고 좀 늦는다고 한들 일에 엄청난 차질이 있을 것도 아니니까. 사실은 그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상황이 그랬다. 나도 그녀도 좀 더 갈 수 있었다. 잠시라도 더 함께 있을 수 있었고, 그렇게 경우 없이 떠나버리는 것보단 나은 선택지가 있었다. 


 몇 분 뒤, 여자는 내가 차를 세우기 무섭게 문을 열고 내렸다.


 “갑자기 여기까지 태워줘서 고마워요. 뭔가 떼쓴 것 같아서 미안하네요”


 “알면 됐어요” 나는 다소 차갑게 받아쳤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그런데 왜 마음이 바뀌었대요?”


 “……이왕이면 끝까지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주면 좋잖아요? 그러니까, 사는 게 다 그런 거니까”


 “그럼 기왕 가는 거 끝까지 가요, 저랑. 어때요?”


 “저는 할 일이 있어요. 서귀포에서 절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니까요”


 “그래봤자 그냥 업무 관계자라면서요. 미팅 같은 건 그냥 취소해버리라고요. 미팅은 언제든지 다시 할 수 있잖아요? 저같이 예쁜 여자애랑 마라도까지 가는 건 언제 있을지 모르는 일인데…… 그쵸?” 여자는 안경테를 코끝으로 내려 걸치며 빙긋 웃었다. 


 “아, 제기랄” 그렇게 차에서 내리면서, 나는 못내 짜증을 냈다.“……그럼 짜장면은 니가 사”


 “하하, 좋아요” 그녀가 대답했다.          



<42>, 202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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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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