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묵돌 Mar 22. 2020

습작

백마흔아홉번째

 “저, 이분은 지구가 둥글다는 걸 알고 계셨을까요?” 여자가 등산용 모자를 벗어들며 내게 물었다. 


 “……네?”나는 순간 당황한 나머지 눈을 휘둥그레 떠보였다. 여자에게 ‘방금 내게 한 질문이 맞는지’되묻는 제스쳐였다. 여자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수십 년 동안 바다를 보면서 남편이 오길 기다렸다면서요”


 “아, 수십 년인지 몇 년인지는 기록에 나와 있지 않아요. 그냥 오랫동안 기다리다가 그 자리에서 돌이 됐다는 정도로 나와 있거든요……” 나는 뒤늦게나마 그럴듯한 대답을 내놓기 위해 애를 썼다. 모름지기 관광 가이드는 임기응변이 좋아야했다. 모르는 것도 아는 것처럼, 별 것 아닌 바위에도 무언가 로맨틱한 서사가 깃들어있는 것처럼 꾸밀 수 있어야 했다. 


 다만 ‘바다를 건너간 남편을 기다리다 돌이 된 부인’이 지구가 둥근 걸 알고 있었겠느냐, 하는 건…… 내가 대처 가능한 영역을 아득히 뛰어넘는 질문이었다. 집근처 산에서 가이드 일을 한 지 어느덧 삼 년차에 접어들었음에도 그런 질문을 하는 관광객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살면서 지구가 둥그네 마네 하는 질문을 들을 일도 몇 번 없었다. 지구가 둥글다는 건 현대인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기도 하거니와―물론 아직도 지구평면설을 믿는 사람이 있더라는 모양이지만―그다지 재미있을만한 이야기도 아니니까. 바다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굳어있는, 그 여인 모양의 바위를 골백번은 봐왔지만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흠. 가이드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여자가 거듭 질문해왔다.


 “제 생각이 궁금하세요?”


 “네”


 “글쎄요. 민간에서 돌아다니는 전설이 다 그렇거든요. 실제로 있었던 일보다는 구전되면서 크고 작게 각색되는 게 대부분이라” 나는 어쩐지 여자의 눈치를 보며 대답하고 있었다. “굳이 말해보자면요. 먼 삼국시대 사람이니까 지구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잘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겠죠? 아무렴 자연환경에 대한 지식이라는 게……”


 “아뇨” 여자가 말허리를 자르며 말했다. “아니에요”


 “네?” 나는 다시금 의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이런, 이래서 혼자 관광 온 사람들이랑은 오래 대화하면 안 되는 건데, 같은 생각을 하면서.


  “알고 계셨을 거에요. 아니면 정말 굳게 믿기라도 했겠죠”


 “으으음,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나는 못내 궁금한 투로 물었다.


 “매일매일, 하루 종일 눈이 빠져라 수평선만 쳐다보면서 기다렸을 텐데. 아무리 쳐다봐야 티끌도 보이지 않잖아요. 그럼 지구가 둥글지 않으면 안 되죠.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려면…… 지구가 평평했다면 끝에서 이미 떨어져 죽었을 거 아니에요?”


 “아아……”


 “어때요? 그럴 듯 하지 않나요?”


 “그럴 듯 하네요, 정말” 나는 진심이었다. 여자의 눈빛도 그랬다.“어떻게 보면 이 부인이 우리나라 최초로 지구구형론을 생각한 사람일 수도 있겠어요. 결국 어떤 이론이라는 것도 굳건한 믿음과 다름없으니까요”


 여자는 내 이야기를 듣자마자 대답도 없이 활짝 웃었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마주 웃었다. 


 바위산은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 더 오래 걸린다. 올라가다 넘어지면 대부분 찰과상에 그치지만, 내려오는 길에 발을 헛디딜 경우 순식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누구 하나 발 한 번 삐지 않고 내려올 수 있었다. 이번 산행도 별 탈 없이 끝난 셈이었다. 저 멀리 마을 입구가 눈에 들어오자 지쳐있던 관광객 몇 명이 탄성을 내질렀다. 


 내가 태어나 자란 산 밑의 마을이었다. 여느 시골처럼 인구는 얼마 되지도 않고, 꽃피는 봄이나 단풍이 지는 가을 무렵이 되서야 관광객들로 몇 번 붐비는 동네였다. 성수기가 지난 마을 입구에 현수막 몇 개가 펄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두어개 정도는 마을에 관한 소식이었고, 나머지는 실종자가족이 내건 것이었다.     


 <실종된 딸을 찾습니다. 지난 20XX년 ○○산 국립공원에서 아홉 살의 나이로 홀연히 자취를 감춘 이 여자아이는 갈색 등산모자를 쓰고 있었으며, 함께 사라졌던 남동생만이 무사귀가한 뒤 지금껏 아무런 연락이 없어……>     

 주변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관광객을 유치하기 시작한 지도 어언 수십 년이 흘렀다. 그러는 동안 몇몇은 놀러온 바위산에서 길을 잃어서, 며칠 뒤 산중턱에서 주검으로 발견되거나 영 실종돼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둘 다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라는 점에선 비슷하지만 가족입장에선 시신으로나마 발견되는 쪽이 나았다. 어쩔 땐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아주 자그마한 가능성에 기댄 채 십 수 년 넘게 기다릴 수밖에 없는, 그런 실낱같은 희망이 더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자, 이제 다 왔으니까요. 기념품점까지 노래나 한 곡 부르면서 갈까요?” 나는 불쑥 뒤돌아 관광객들을 향해 말했다.“자자, 이 노래 아세요?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아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여자가 따라 불렀다.


 “다 만나고 오겠네―” 나머지 사람들도 따라 불렀다.




 <망부석>, 2020. 3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아래 링크에서 이 글과 그림을 구매하거나, 혹은 다음의 작업물을 미리 예약함으로써 이 활동을 후원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더 오랫동안 쓰고 그릴 수 있게끔 작업을 후원해주세요. 후원자 분께는 오직 하나 뿐인 글과 그림을 보내 드립니다. 


-


+ 이 글과 그림 구매하기.



+ 2018년 ~ 2019년에 쓴 약 일흔 편의 작업물 및 미공개본을 묶은 첫 단편소설집, 「시간과 장의사」가 출간되었습니다. 표지에 고양이가 그려져 있을 뿐 아니라, 남녀노소 부담없이 읽을 수 있어 선물용으로도 탁월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습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