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터미널, 논산
택시를 타고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도착하는 데에는 삼십 분 남짓한 시간이 걸렸다. 내릴 때 쯤해서 택시기사가 경부선이냐, 호남선이냐, 하고 물었다. 나는 두어 초쯤 생각하다가, 그냥 아무 데나 가려구요, 했다. 기사는 별 희한한 놈 다 보겠다는 눈빛을 보내며 터미널 어귀에 차를 멈췄다. 나는 문득 <오발탄>의 결말을 떠올렸다. 물론 내 사랑니는 멀쩡히 있다.
나는 택시에서 내려 호남선 터미널로 들어갔다. 호남선 터미널이라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들어간 곳이 마침 호남선 터미널이었다. 목적지가 좌판처럼 늘어져있는 승강장들을 둘러봤다. 목적지를 정하기 앞서 어떤 기준으로 목적지를 정해야할 지부터 정해야한다. 나는 퍽 재미있어서 웃었다.
논산행 표를 샀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굳이 이유가 있다면 삼십 분 내로 출발할 수 있는 노선 중에 논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표를 사고나서야 아차, 했다. 누가 보기에는 훈련소에 가는 줄 알겠군. 뭐 따지자면 글 쓰는 훈련을 하러 가는 것 아닌가. 아무래도 좋다는 기분으로 물 한 병을 사서 버스 좌석에 들어앉았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는 별달리 할일이 없다. 휴대폰을 들여다보거나, 창밖을 보거나.. 떠오르는 선택지가 두 개 뿐이라는 게 짜증이 났다. 그럼 이건 어떠냐. 난 노트북을 꺼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얼마나 반항적이고 생산적이냐. 나는 내가 대견했다. 유치한 감각이었다. 이런 유치한 것이 필요했다는 느낌이.. 불쑥하고.
논산 터미널은 작다못해 귀여운 크기였다. 아아니, 엄밀히 보면 출발했던 센트럴시티가 무식하게 큰 쪽 아닌가? 전국적으로 보면 논산 터미널같은 곳이 더 많을 텐데. 잡생각을 하면서 터미널 근처를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한 쪽은 개구리 소리가 들리는 논밭, 또 다른 쪽은 술집과 당구장 그리고 네온사인이 즐비한 상가.. 그 사이에 자리잡은 횡단보도는 무슨 조화를 부렸기로서니 거기 있는가 싶다.
한 시간 정도를 줄곧 걷기만 했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날씨였다. 비 대신 후덥지근한 공기만 쏟아졌다. 왜 하필 청바지를 입고 나왔을까? 다리에 습한 땀이 차기 시작했다. 다행히 가방에 농구할 때 입는 반바지를 챙겨왔다. 그러나 사람이 없다한들 길거리에서 바지를 갈아입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고생을 덜했기 때문이겠지. 그래도 출발한 날까지는 고결해도 괜찮은 것 아닌가. 나는 꾹 참고 걷다가, 길 한 켠에 처박혀 아무도 가지 않을 것 같은 모텔로 들어갔다.
사만 원이었다. 리모델링은 커녕 근 몇 년 제대로된 보수도 하지 않은 것 같은 건물과 방. 아주머니는 그나마의 경치감상도 어렵도록 일층의 방을 내줬다. 분명 이삼 층에 방이 없는 것은 아닐 텐데. 생각하다 물 흐르듯 묵고 가는 것도 뜻이겠거니 했다. 막말로 일 이층 더 올라간들 뭐가 더 보이겠는가. 인생도 경관도 더 멀리 보려는 욕심은 매한가지였다.
침침한 형광등 불빛, 배려없이 딱딱한 침대, 할머니 옷장에서 갓 꺼내온듯 한 침구, 맨발에 쩍쩍 달라붙는 방바닥. 그러나 뭣보다 곤혹스러운 것은 온수가 나오지 않는 수도꼭지였다. 나는 두 번이나 나가서 온수가 나오지 않는다 했다. 아주머니가 보일러 문제가 있다며 크게 미안해했다. 난 의심하지 않는 마음으로 방에 들어가 찬물을 뒤집어 썼다.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온수는 다음 날 아침부터 잘 나왔다.
피곤했다. 꽤 걸었던 탓이다. 돌침대와 다름없이 딱딱한 잠자리에도 절로 눈이 감겼다. 나는 글 몇 자라도 더 쓰다 잠들겠노라는 각오로 일어나 노트북을 띄웠다. 알고보니 모텔은 논산역으로 뻗은 철길 옆에 있었다. 십 분, 십오 분 간격으로 기차 지나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그 소리를 반찬삼아 글을 술술 쓰는 스스로가 변태같았다. 나쁘지않은 텐션이었다.
쓰던 부분을 마무리하고, 떠나온 것에 대해 얼마간 전화를 하다가 새벽 두세 시 쯤 지쳐 잠들었다. 그 시간에 수면제 없이 잠든 건 오랜만이었다. 이튿날 눈을 떠보니 암막커튼 사이로 꿉꿉한 햇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시간은 점심 때를 지났다. 여기는 체크아웃도 따로 없나? 모든 것이 꾸질꾸질하군. 나는 비로소 내 자리를 찾은 것만 같았다. 네다섯 평 되는 모텔방에 역마가 찾아왔다. 난 여유로이 떠날 채비를 했다. 오늘은 비가 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