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페미니스트

by 이묵돌

민영은 말하자면 꽤 평범한 인생을 살아왔다. 학창시절 내내 학업에 충실한 학생은 아니었다. 다만 지나가던 교사에게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을 만큼의 귀여움을 받았고, 적당히 소심스런 성격 덕에 지도편달이 잘 이뤄지는 학생 중 하나였다. 고등학교 삼학년 학기가 시작되기 전, 민영은 담임 선생님과 한 시간 반 정도 개별상담을 했다. 민영이 고교생활을 착실히 마친 뒤 A대에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교사들의 편애, 부모님의 적절한 투자, 그리고 시키는 것에 군말 없이 따라가는 민영 나름의 성실성 혹은 수동성 덕택이라 할 수 있었다.

민영의 집은 경기도에 위치한 적당한 학군의 어느 적당한 아파트 단지의 칠 층에 위치했다. 가족은 민영 자신을 포함해 총 네 명으로, 올해로 같은 회사에 이십 년째 다니고 있는 회사원 아버지, 전업주부인 어머니와 두 살 아래의 남동생이 있었다. 현대적 핵가족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집안이었다. 아무튼, 민영은 대한민국의 표준적(이라 생각되는) 가정에서 무난히 자라왔고, 그 때문인지 특별히 모나지도 평평하지도 않은 성격을 가진 평범한 스무 살 여대생으로 자라났다.

A대라고 하면 인서울 중위권 정도의 대학이다. 비록 ‘초명문대’라고 할 만큼의 수준은 아니지만 충분히 ‘명문대’의 대열에 낄 수 있는, 두세 개의 간판학과는 국내에서 가장 좋다고 평가받곤 하는 학교였다. 민영이 공부를 못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고등학교 이학년 당시의 성적이었다면 A대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민영은 요즘도 목도리와 귀마개가 필요했던 지난 삼 월 초쯤의 입학식을 떠올리곤 했다. 칙칙한 하늘. 대강당까지 이어지는 큰 길 위로 살을 에는 바람이 불어, 옷 바깥으로 드러난 맨살에 생채기를 내고 가는 날씨였다. 그럼에도 민영은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차오르는 자부심, 지긋지긋했던 수험생활로부터의 해방감, 그리고 A대에 입학한 사실만으로도 장래 중위계층 이상의 삶이 보장된 것 같은 안정감으로 가득 차있었으며 앞으로 언제든지 이 기분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 막 두 번째 학기에 접어든 민영이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대학생활이라는 것이 그리 로맨틱하거나 유쾌하거나 멋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입학식 당시 교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함께 대강당으로 걸어가던 그 때. 민영은 고등학생이 된 이후 처음으로 아버지와 단둘이 이야기를 했다. 민영의 아버지는 8-학번으로, 당시의 대학생활을 ‘절제 없는 종교생활 같았다’고 표현했다. 민영은 아버지의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시대와 환경이 달라진 만큼 자신 앞에 펼쳐질 풍경 역시 똑같진 않으리라고 예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영이 경험한 캠퍼스 라이프라는 건 상상과 다를뿐더러…… 아니, 사실 무료하기까지 했다. A대의 정문으로부터 뻗어있는 큰 대로, 그리고 덩굴이 뒤엉킨 건물들로 가파르게 입구를 놓고 있는 넓고 긴 계단들과 교정 곳곳에 로맨틱하게 놓여있는 정체불명의 바위들은 민영의 맥박을 딱 한 달 동안 평균 이상으로 만드는데 그쳤다. 민영이 교정의 풍경과 정물들을 찍는 빈도는 날이 더해감에 따라 0으로 수렴했다. 점점 어려워지는 강의 내용과 함께, 민영에게 학교란 낭만적 지식의 전당으로부터 스트레스와 억압의 공간으로 탈바꿈해갔다.

‘형태소와 낱말의 형성 구조, 발음기호의 표기…… 이런 게 사회에 도움이 될까?’

민영은 수험생활 내내 어문학과 진학을 꿈이자 절대적 목표로 삼았고, ‘구민영 A대 국어국문학과 18학번 합격’ 같은 문구를 매일 들고 다니는 공책과 독서실 책상 등에 쓰고 붙여놓곤 했지만, 어문학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이라곤 상경계열이나 컴퓨터공학을 복수전공하지 않으면 취업에 큰 애로사항이 생긴다는 것 정도였다.

물론 대학교 새내기에 불과한 민영에게 진지하게 사회에 기여하고자하는 마음이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 전공학문의 실효성에 대해 고민하게 된 이유는, 엄밀히 말해 자기증명에 대한 욕구였다. 민영은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는 것에 모종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때문에 특별한 형태의 관심, 정확하게는 스스로가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으로부터 만족감을 느껴왔던 것이다. 물론 이 같은 욕구가 민영에게만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민영 스스로부터가 ‘A대 진학에 요행이 따랐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더 극대화됐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민영은 집에선 별다른 지원 없이도 인서울에 성공한 똑똑이 딸, 고등학교 동창들이 모인 단톡방에서는 얼굴도 예쁘면서 공부도 잘하는 팔방미인으로 취급됐다. 그러나 A대 교정 안에만 들어오면, 그냥 수많은 A대 재학생들 중 하나… 그마저도 미래가 불분명하고 달리 보람도 없어 보이는 어문학 계열의 여학생에 불과해지는 것이다.

새내기들 사이에서 오가는 ‘출신성분’에 대한 이야기는 민영의 감정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민영은 입학하자마자 가입한 댄스동아리 환영행사에서, 마주 둘러앉은 동기들과 함께 ‘서로 어떤 전형으로 이 대학에 오게 됐는지’ 같은 새내기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한 남학생과의 불쾌한 대화를 빼면.

“뭐야, 너 수시충이었어?”

민영은 처음에 당황했고, 그 다음으로 화가 났으며, 마지막에는 어이가 없었다. 아주 짧은 시간동안 일어난 화학작용이었다.

“뭐래는 거야, 수시 정원이 정시보다 더 많은 거 몰라?”

민영은 왼쪽 눈썹을 언짢게 올려 보인 뒤, 일갈하듯이 말했다.

“난 그게 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니까? 수능 등급부터가 엄청나게 차이가 나잖아. 난 한 과목 빼고 다 일등급이었거든? 수시로 들어온 애들은 자기 수능 등급 얘기도 못하잖아, 쪽팔려서”

남학생은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쳤다. 민영도 지지 않으려고, 최대한 빨리 받아치려고 노력했다.

“우린 대신 내신관리를 잘 했지”

“나도 팔학군만 아니었으면 그랬을 걸? 아, 나도 수시였으면 Y대나 K대에 갔을 텐데. 고등학교를 저 멀리 경기도 깡촌에 있는 곳으로 갈걸 그랬어. 난 처음에 정말 A대에 온 게 안 믿겼단 말야. 근데 수시로 대학 붙은 애들은 다른 의미로 안 믿긴다며? 붙을 줄 몰랐는데 붙었다고”

남학생은 재빨리 말을 맺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얘기를 듣고 있던 ‘정시출신’ 남자 동기와 함께 끅끅, 하고 웃어댔다. 민영은 입을 반쯤 벌리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한 뒤, 주위에 앉은 여자 동기들에게 보여줬다. 이윽고 그 남학생에게, 뭐야 쟤, 왜 저래, 그럼 재수나 하지 뭐 하러 동아리까지 왔대, 재수 없어, 같은 작은 웅성거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야, 그냥 하는 이야기잖아, 왜 그래? 웃자고 하는 얘기인데”

남학생은 웃던 표정을 굳히고, 무안하다는 듯이 말을 뱉고 일어나 떠났다. 민영은 옆 자리에 앉은 동기에게, 그럼 웃기지 그러셨어요, 하고 속삭이곤 함께 웃고 말았다. 그 남학생은 이후 술자리에 두세 번 정도 얼굴을 비추더니 행적도 연락도 뚝 끊겼다. 어디선가 중앙도서관에 틀어박혀 반수를 준비하고 있다더라하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그렇다면 민영은 첫 학기동안 뭘 했던가? 학교에서 가장 오래 있었던 곳은 동아리 연습실이었다. 공강 시간동안 동기와 선배들을 만날 수 있거니와 식사시간을 전후해 찾아가면 대개 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밥을 사주는 사람은 보통 한 학번, 드물게는 두세 학번이 높은 선배들이었고, 여자선배가 밥을 사주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었으나 남자 선배들에 비하면 가끔 있는 일이었다. 남자 선배들은 시도 때도 없이 민영, 그리고 민영과 어울리는 여자 동기들에게 다가와 ‘밥 먹으러 갈 건데, 같이 갈래? 내가 살게’ 라는 말을 했다.

‘왜 선배들이 밥을 사주는 걸까?’

민영은 궁금했던 나머지, 한 남자선배에게 직접 물어본 적이 있었다. 테가 굵은 안경을 쓰고 있었던 그 남자 선배는 질문을 듣고 잠깐 궁리하다가 대답했다.

“우리도 새내기 때 많이 얻어먹었으니까. 말하자면 내리사랑 같은 거랄까? 새내기는 또 귀엽잖아. 너도 나중에 선배 입장이 되면 이해하게 될 걸. 내가 새내기였을 때 생각도 나고. 밥 한 끼 사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거지 그냥”

민영은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먹던 음식을 마저 먹었다. 그리고 의례처럼 휴대폰 번호를 교환한 뒤에, ‘잘 들어갔어?…“로 운을 뗀 선배와의 카톡이 몇 번의 밥 약속과 술자리를 더 만들어내더니 어느 날은 사귀자는 고백을 받았다. 동아리 안에서 민영과 그 선배가 반 쯤 연인 사이라는 소문이 이미 파다했다는 것, 같은 동아리의 남자 동기들은 선배들로부터 밥 얻어먹은 적이 몇 번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건 고백을 받아들인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적어도 당시의 민영에게 선배는 나쁘지 않은 사람 같았다. 외모는 평범한 편이었지만 키는 백칠십 후반으로 꽤 컸고, 스타일도 나쁘지 않아 소위 말하는 ‘훈훈한 대학 선배룩’을 잘 소화하는 사람이었다. 선배는 남고를 나와 한 번의 재수 끝에 A대에 입학했는데, 민영이 태어나 두 번째로 사귄 여자친구라고 했다.

민영에게 선배는 세 번째 남자친구였는데, 고등학생 시절 다른 학교에 있던 동갑내기 남자와 첫 번째 연애를 했고, 어머니의 권유로 잠시 다녔던 교회의 어느 오빠와 두 번째 연애를 했다. 각각의 연애는 반년을 넘지 않았다. 실상 하루의 절반 이상을 학교에서 보내야했던 당시로서는, 그게 과연 제대로 된 연애라고 할 수 있는지조차 의문이었지만…… 민영이 내린 결론은 ‘것도 연애라면 연애지’였다. 두 번 다 상대 쪽에서 고백을 해오기도 했고, 당장은 남자친구가 된 선배에게 얕잡아 보이기 싫은 마음도 있었다. 이 전략은 생각 이상으로 파급효과가 세서 한동안은 선배로부터 ‘전 남자친구랑은 이런 거 해봤어?’ 같은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

민영과 선배의 관계는 첫 한두 달 동안 꽤 좋았다. 표면상으로는 그랬다. 민영은 선배와 함께 홍대, 신촌, 강남의 맛집들부터 시작해서, 주말에는 일산 호수공원과 북촌 한옥마을에 데이트를 가기도 했다. 민영의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는 민영의 얼굴이 앞에 나오는 커플 셀카가 잊을만하면 올라왔다. 그래서 다음 주 평일이 되면 동아리 연습실에서 ‘민영이와 도현 선배가 어디에 갔다더라’ 는 얘길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카톡 프로필사진은 기존의 삼색고양이 사진에서 남자친구가 찍어준 전신사진으로 교체됐다.

관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민영의 대학 첫 학기가 끝나갈 때쯤이었다. 당시 민영은 기말고사와 함께 동아리에서 새내기 합동 공연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번 기수에 유난히 남자 비율이 높은 것 같다’ ‘따로따로 하면 될 텐데 왜 혼성 공연을 준비하는지 모르겠다’가 당시 선배의 불평 레퍼토리였고, 이번 안무가 남자들과의 신체접촉이 과하다는 것, 자신과의 시간보다 다른 남자들이 있는 동아리 공연 준비 시간이 더 많다는 것으로 민영을 트집 잡다가 크고 작은 말싸움으로 번졌다. 결과적으로 ‘선배가 더 자주 동아리 연습실에 와서 연습하는 걸 지켜본다’는 타협안으로 마무리 됐지만, 막상 선배가 연습을 지켜보러온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결정적 계기는 학기가 끝난 뒤에 있었다. 민영은 새내기로서 맞이한 동아리 첫 공연을 무사히 마치고, 동아리 인원 전체가 참여하는 공연 뒤풀이에 갔다. 선배는 민영이 앉아있던 자리 근처로 와서 신호를 몇 번 보내더니, 1차가 끝나기 무섭게 민영의 손을 잡고 빠져나왔다. 민영과 선배가 함께 향한 곳은 A대 후문 근처에 있는 작은 포차였다. 선배의 자취방과도 거리가 멀지않은 곳이었다.

지난했던 공연 준비를 끝냈다는 성취감, 여름 학기를 무사히 마무리하고 휴식기간에 접어들었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술을 따랐다. 민영의 주량은 평균을 밑돌았다. 신나서 소맥을 네다섯 잔 씩 말아먹은 뒤로는 혀가 조금씩 꼬이더니, 급기야 꾸벅꾸벅 졸 지경이 됐다. 선배는 취한 민영을 부축해 ‘괜찮으니 잠깐 쉬고 가라’며 자신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민영은 방금 막 공연을 끝냈고, 술과 해방감에 취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으므로…… 아주 잠깐만 쉬었다 갈 생각으로 선배를 따라갔다.

민영은 선배의 방에 들어가자마자 구석에 있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선배의 방은 어설프게 정리 돼있었다. 한 쪽에 널브러진 옷가지들과 이불로부터 퀴퀴한 남자의 체취 같은 것이 풍겨와 민영의 코를 찔렀다. 민영은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은 채 얼굴을 찡그렸다. 선배는 화장실에서 나와 방의 불을 끄고는 민영의 옆에 나란히 누웠는데, 아주 잠깐 눈치를 보더니 민영을 껴안고 입을 맞췄다. 그리고 민영의 다문 입술을 비집고 혀가, 배 아래로부터 가슴팍의 브라 위쪽으로는 만지는 손이 치고 들어왔다.

‘읍! 냄새!’

민영은 본능적으로 머리를 돌리고 팔을 뿌리쳤다. 선배는 취한 민영의 손목을 제압해, 머리 옆으로 찍어 누르고 말했다.

“내가 언제까지 배려해줘야 돼?”

술이 확 깼다. 민영은 몸을 확, 하고 일으켜 선배를 떨쳐냈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벗겨지기 직전이었던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가방을 들고 선배의 방을 빠져나왔다. 다음 날 아침에는 선배로부터 ‘민영아 잘 들어갔니. 어제는 내가……’로 시작하는 장문의 카톡이 와있었다. 민영은 읽지 않은 채 닷새 동안 집에만 있었는데, 선배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건 사흘 째 되던 날이었다.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민영은 결정하지 않았다. 결정은 이미 내려졌고, 민영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방에 처박혀 이틀간 수시로 아이스크림을 퍼먹으며 우는 것뿐이었다. 이 문제에 관해 고등학교 동창들 몇 명과 이야기해봤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다음의 두 갈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남자가 쓰레기네. 어떻게 취한 여자친구한테 그럴 수가 있어?”

“남자가 많이 참은 것 같은데? 거기서 뿌리치는 건 네가 너무 했다고 봐”

민영은 가치판단을 할 수도, 할 생각도 없었다. 단지 확실했던 것은 민영 자신이 혼전순결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배와 잘 생각은 없었다는 것이다. 민영은 선배로부터 느낀 감정이 처음부터 사랑이 아니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민영은 선배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수백 번, 데이트 나가길 열댓 번, 그리고 수줍게 입 맞추기를 세 번(마지막에 있었던 일을 포함하면 네 번)했지만, 혀나 몸을 섞을 정도로 좋았던 건 아닌 것 같았다.

‘얼마나 좋아하는 상대와 섹스를 해야 하는 거지? 결혼할 정도로 좋은 남자와만 해야 하는 걸까?’

민영의 고민은 갈수록 고차원적으로 변해갔고, 이렇다 할 정답도 낼 수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페이스북에서 선배의 사진을 한꺼번에 삭제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민영은 헤어진 후로도 약 한 달 동안 선배의 인스타그램을 훔쳐봤다. 선배는 웬일인지 길었던 머리를 바짝 깎고, 모자를 쓴 모습으로 여자가 껴있는 술자리 사진을 몇 차례 올리더니 개강하기 정확히 열흘 전에 입대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시점의 민영은 선배가 이미 오래전부터 군 휴학을 예정해놨다는 말에도 슬프지 않게끔 돼있었다.




2


A대의 교정에 햇발이 들쑤셨다. 도로와 학생들이 다니는 길 사이의 좁은 흙더미 위로 어디선가 옮겨 심은 듯한 나무들이 차광막 역할을 했다. 매미가 쨍쨍 우는 소리 사이로 제각기 학생들이 걸어 다니는 모습, 한 손에 노트북 가방을 들고 정장 차림을 운반하고 있는 교수의 통화소리가 겹쳐 지나갔다.

민영의 새 학기는 유달리 긴장감이 없었다. 수강신청은 원하던 대로 됐지만 도통 흥미가 느껴지질 않았다. 전과를 생각한 적도 있었으나 맘처럼 되는 일도 아니었다. 오리엔테이션 수업을 듣고 나선 오랜만에 동아리 연습실에 들렀다. 지난 학기 종강이후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민영은 비학기 중 두 차례 있었던 동아리 엠티에 모두 불참했다. 명목은 ‘아르바이트가 바빠서’였지만, 비교적 널널했던 카페 사정상 휴가를 내고 다녀와도 괜찮은 상황이었다. 결국 민영은 뉴스피드에 올라온 동아리 엠티 사진을 들춰보면서, ‘그냥 가기 싫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시인해야 했다.

지리적 소재도 있었다. 민영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A대까지 가는 길은 지하철역으로 가는 버스와 지하철 그리고 다른 노선의 갈아탄 지하철과 내린 다음에는 학교 건물 인근까지 가는 마을버스를 한 번 더 타야했다. 시간은 도합 한 시간 반 정도였으나 네 개나 되는 교통수단을 번갈아 타야한다는 것이 민영에게는 상당한 거리감을 제공했다. 이 같은 거리감은 학교뿐만 아니라 첫 학기동안 친해졌던 다른 동기와 선배들 및 전공과목과 대학에서의 전반적 일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안녕! 오랜만이야……”

민영은 공연히 말을 꺼냈지만, 이내 후회했다. 차라리 아무 말 않고 들어오는 게 더 태연하지 않았을지? 잠시 어물거리던 민영은 그래 오랜만이다, 어디 갔었어, 하고 되물어주는 두세 명의 동기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민영은 가까이다가가 포옹을 하고, 주위 몇몇 동아리원들을 둘러봤다. 모르는 얼굴이 있었다.

“이번에 새로 들어왔어. 신소희라고 해”

“어 정말…… 반가워. 난 민영이야”

민영은 소희와 악수를 했다. 소희의 손은 우아하고 날렵한 한편으로 차가운 기운이 돌았다. 깎은 듯한 얼굴형에 검은색 티셔츠와 그보다 더 검은 레깅스를 입은 소희는 맨발임에도 민영의 키를 웃돌았다. 뒤로 짧게 묶은 머리와 늘씬한 체형을 보고 있으면 댄스보다는 무용과 발레가 먼저 떠올랐다.

“키가 엄청 크구나?”

“응. 백칠십이래”

옆에 있던 동기가 대신 대답했다. 소희는 A대의 간판학과 중 하나인 연극영화과 소속이었는데, 새하얀 얼굴과 매력적인 턱선, 눈썹 쪽으로 날렵하게 치켜뜬 아이라인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나 수긍할만한 사실이었다. 한 선배에 의하면 연극 전공의 학생이 들어온 건 동아리 창립 이래 두 번째 있는 일이고, 이미 많은 동아리원들이 소희와 인사를 나누고 친해졌으며 몇 명과는 술 약속까지 잡았다. 끊이지 않는 대화, 사람 좋은 웃음. 민영은 열 평 남짓한 연습실에서 점차 거대해지는 소희의 존재를 체감했다.

“난 이만 가볼게. 민영아, 다음에 또 보자!”

“안녕!”

“잘 가! 밥 먹기로 한 거 잊지마!”

소희는 민영을 콕 집어 살갑게 인사한 뒤 연습실을 떠났다. 연습실을 채우고 있었던 교묘한 긴장감은 소희의 발소리와 함께 서서히 증발했다.

“정말 좋은 애야. 앞으로 활동 많이 해주면 좋겠는데”

“맞아”

“아무래도 연영과니까 바쁘겠지? 학과생활도 빡세다던데”

“그래도…”

잠자코 휴대폰을 만지고 있던 민영에게 남자 동기가 물었다.

“학교 축제 때 우리 공연하잖아. 그래서 조 짜야하는데, 너는 같이 할 사람 있어?”

민영은 입을 살짝 벌리고, 눈알을 사선으로 올려 보이면서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다’는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어…… 잘 모르겠어. 내 말은, 이번 학기에 공연할 수 있을지를 잘 모르겠네. 알바도 계속 하고 있고…”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남자 동기는 입꼬리를 내리고 고개를 두 번 끄덕이더니, 벌써 수긍한 듯이 뒤돌아 연습하는 무리로 돌아갔다. 민영은 연습실 모서리에 오 분 쯤 더 앉아 있다가 빠져나왔다. 작별인사는 하지 않았다.


개강으로부터 보름이 지났다. 구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캠퍼스를 휘젓는 바람은 더 두꺼워졌고, 긴팔을 입은 사람이 드문드문에서 듬성듬성으로 옮겨 다니게 될 즈음이었다. 민영은 별 다를 것 없이 무료한 대학생활을 지속하다가, 우연스레 학생회관 정면에 붙어있는 게시판에 눈길을 맞췄다.


<중앙 페미니즘 학회 ‘여력’에서 신규 학회원을 모집합니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에 대해 궁금하신 분...

...여성으로서 노출된 이해 불가능한 경험들...

...오리엔테이션을 겸한 세미나...

...세미나 참여 후 가입하지 않더라도...

...2018년 9월 30일 오후 5시... 동백관 102호...


특별히 관심이 있던 건 아니었다. 단지 어떤 형태로든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우연히 눈에 잡힌 그 전단지는, 민영의 과거 어떤 경험들보다도 새로운 것을 가져다주리라는 기대를 심어줬다. 민영은 대학생이었다. 새내기로서 있을 수 있는 나날도 고작해야 세 달 남은 것이다. 이 사실은 민영이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듯 했다. 방학 넘어 내내 하고 있던 아르바이트는 마침 관둘 예정이 됐다.


“이 번호표를 들고 들어가면 되나요?”

민영이 책상 위, 팜플렛 옆에 놓여있던 번호표(라고 하기에는 실상 순번이 적힌 종이인)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 네. 원래는 그런데… 그냥 들어가셔도 될 것 같아요. 사람이 얼마 없어서요”

학회원처럼 보이는 여학생 한 명이 대답했다. 민영이 잠깐 바라본 여학생은 안경을 쓰고 수척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느닷없는 질문에 어쩔 줄 모르고 구부적대는 허리 때문에 민영도 덩달아 허리를 굽히고 세미나실로 들어가야 했다.

세미나실은 위로 공동이 나있었다. 오육십 개쯤 돼 보이는 접이식 의사들이 세 개의 큰 행렬로 아래에 서있었고, 이 중 삼분의 일 정도의 의자를 몇몇 학생들이 메꾸고 있었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단상의 위아래로 바삐 쏘다녔다. 행사 시작까지는 오 분이 남아있었는데, 주최측같은 몇몇 학생들의 분주한 표정은 최소 이십 분 같았다.

“아, 아”

단상에 오른 여학생 한 명이 마이크 출력을 테스트했다.

“안녕하세요. 일단 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 시간이…… 정확히 다섯 시인데, 인터넷으로 사전 신청을 해주셨던 분들이 모두 도착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같은 여학생이 마이크를 그대로 쥐고 말하기 시작했다. 발목을 덮을 만큼 긴 통짜 슬랙스를 입은 여학생은 체구가 작았으나 목소리에는 설익은 파스타 같이 심지가 있었다. 민영은 이 여학생이 동아리의 장, 혹은 중책을 맡고 있는 핵심인물 중 한 명일 거라 추측했다.

“방금 전 다른 학회원들과 짧게 논의해본 결과로는, 사정상 못 오시거나 늦으시는 분들께는 양해를 구하는 것으로 하고 정해진 시간에 행사를 시작하기로, 결정됐습니다. 그럼…… 우선적으로 저희가 자체 제작한 영상을 시청해주시길 바랍니다. 소요시간은 이십 분 정도로, 본 세미나의 핵심적인 내용을 상당부분 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주의 깊게 감상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럼……”

단상 위에는 고등학교 미술실에나 있을 법한 목제의자가 놓여 있었다. 긴 바지를 입은 여학생은 마이크를 의자 위에 내려놓고, 단상 좌측의 스탠딩테이블로 향했다. 스탠딩테이블 아래로 복잡해 보이는 기계장치가 연결돼있었다. 여학생이 버튼 몇 개를 달깍, 달깍 만지더니 단상 가운데 펼쳐 내려온 스크린 표면에 영상이 비춰지기 시작했다. 영상의 시작과 함께 미색으로 밝았던 세미나실의 전등들도 일제히 꺼졌다.


아마추어 대학생이 만든 만큼 어설픈 영상이었다. 다만 나름대로의 서사가 있어서, 스무 명 남짓의 사람들을 집중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영상은 집안의 장녀로 태어난 한 여자아이, ‘지연’ 의 성장과정을 그리고 있었다. 유년기에는 연년생인 남자 동생과의 싸움과 부모님으로부터 받아야했던 모종의 차별, 폭언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등굣길에서 마주했던 변태성욕자 그리고 담당교사의 노골적인 성희롱을 담아냈으며, 고등교육의 기회(이 경우에는 대학 진학)를 두고 벌였던 부모와의 갈등도 포함돼 있었다.

‘지연’은 부모와의 오랜 갈등 끝에 간신히 서울권의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침 아버지의 무모한 사업추진으로 인해 가세가 크게 기울었는데, 그나마 줄어든 소득의 대부분은 남동생의 교육비로 지출됐다. ‘지연’은 부모의 무관심 속에서 홀로 대학생활을 지탱하기 위해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그러나 사립대학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전부 커버할 도리는 없었으며, 그사이 더 어려워진 가정형편은 ‘지연’으로 하여금 대학생활을 포기하게끔 끊임없이 압박했다.

결국 ‘지연’은 어렵사리 들어간 대학에 휴학사유서를 제출하고, 직원 수가 삼십 명 정도 되는 작은 중소기업의 사무보조직으로 채용돼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여느 사회초년생이 그렇듯 ‘지연’의 회사생활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사오십 대의 배나온 임원들은 ‘지연’에게 개인적인 잔심부름을 시키는 한편 수시로 심신양면의 성희롱을 해왔다. ‘지연’은 그나마 나이가 비슷한 남자 동기들과 친하게 지내던 와중에 사내연애를 시작하게 되는데…… 바야흐로 재앙의 시작이었다.

‘지연’이 다니던 회사에는 젊은 남자직원들로만 구성돼있는 단톡방이 있었다. 이 단톡방의 수위는 실로 천박하기 짝이 없어서, 같은 회사의 여직원을 대상으로 한 음담패설이 주말에도 활발하게 오갈 정도였다. ‘지연’의 남자친구는 당연하게도 이 단톡방에 소속돼 있었다. 처음부터 사내연애 사실을 밝힐 생각은 아니었다고 했다. 그러나 관계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날, ‘지연’과 ‘지연’의 남자친구는 회사건물의 비상계단에서 사소한 문제로 다투고 있었고, 이 장면을 동료 남자직원 중 하나가 목격한 것이다. 공개적인 추궁 때문에 다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으며, 그 이후로는…….

어느 날부턴가 회사사람들, 특히 남자직원들로부터의 눈빛이 달라진 것을 직감한 ‘지연’은 남자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남자친구는 아주 따뜻하게 ‘지연’의 고민을 경청해줬고, 단톡방은 남자친구, 아니, 그 남자의 주도로 다음 날 아침 해체됐다. 혐의를 입증할 증거는 그 때 대부분 제거됐는데, 동료 여직원 하나가 다른 남자직원이 술김에 한 ‘내가 재밌는 거 말해줄까, 지연이 걔 있잖아…’ 로 시작되는 말을 듣고 폭로하지 않았다면, 벌거벗은 채 잠든 ‘지연’의 사진과 영상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은 달리 알 길이 없었을 것이다.

남자와 남자 부모님의 애걸복걸이 경찰서 내부를 메웠다. 피해당사자인 ‘지연’은 강력한 처벌을 주장했다. 남자의 부모는 아이의 미래를 생각해 달라,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다, 한 순간의 실수다, 같은 말들을 토해내면서, ‘지연’보다도 ‘지연’의 부모님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물론 그 호소에 설득력을 부여한 것은 수천만 원에 달하는 합의금이었다. 합의가 모두 끝난 뒤, ‘지연’의 부모님은 경찰서를 빠져나오면서 ‘지연’에게 말한다.

‘그러게, 다 큰 여자애가 왜 몸을 함부로 놀리고 다니니’

남자는 사내 징계위원회에 회부돼 한 달 간 정직처분을 받았고, ‘지연’은 개인사정에 의한 휴가를 지급받았지만 실상 퇴사를 준비하게끔 주어진 시간이었다. 남동생은 출처가 명백한 자금으로 말미암아 호주로 유학을 떠났다. 왜 피해자가 회사를 나와야만 하는지, 제대로 된 의문을 가질 즈음 ‘지연’은 몸의 이상을 발견했다. 설마 하던 두 줄이 선명해지는 순간… ‘지연’의 정신은 아득해져 어떤 판단도 할 수 없게 됐다. ‘지연’의 번호는 남자로부터 차단돼있었다. 겨우 남자의 부모와 연락이 닿았지만 남자는 정직기간동안 유럽배낭여행을 떠나있으며, 합의는 이미 끝났다는 통보가 전부였다. 결국 ‘지연’은 홀로 임신중절 수술을 받는다.

‘지연’에게 남은 것이라곤 부모로부터의 차가운 시선, 대학에서의 제적, 일그러진 커리어, 약간의 퇴직금, 그리고 끔찍한 정신질환들이었다. 집안에 틀어박혀 악몽처럼 이어지는 나날들. 그러나 머지않아 바닥난 목돈과 경제적인 압박이 ‘지연’의 목을 쥐고 집밖으로 내몰았다. 두세 차례 작은 회사에 입사해봤지만, 대인기피증으로 인해 한 달을 넘기는 법이 없었다. 결국 ‘지연’은 변변찮은 소일거리를 전전하다가, 문득 유흥가 앞에 떨어진 <아가씨 모집> 전단지를 주워 쳐다보는 것을 클로즈업하며 영상은 끝이 났다.


‘시나리오를 누가 썼는지 모르겠지만……’

참 자극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민영의 등에는 식은땀이 일었다. 참고 있던 숨을 하나둘씩 뱉기 시작하자 전등에 불이 들어왔다. 영상이 띄워져있던 화면은 어느새 발표 자료로 전환돼있었다.

그 좌측으로 못 보던 단발, 아니, 남자만큼 짧게 머리를 친 여자가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길게 늘어진 베이지색 바지와 흰색 티셔츠는 단순한 조합이었는데, 큰 키와 쭉 뻗은 하반신, 지름이 넓은 원형의 은색 귀고리가 강렬한 인상을 줬다. 화장은 ‘티 나지 않게끔 노력한 화장’의 전형으로, 수수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얼굴형은 오똑 솟은 코를 중심으로 거의 완전한 대칭을 이루고 있었는데, 짧게 자른 머리와 함께 어우러져 미소년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귀고리와 은은한 입술화장이 없었다면 착각할 법도 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희가 준비한 영상은 어떠셨나요?”

청중은 아무 말도 없었다.

“흠, 나름 열심히 준비했는데… 괜찮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죠?”

“네”

청중 가운데 두세 명이 작고 짧게 대답했다.

“하하, 대답 감사해요. 저는 A대 중앙 페미니즘 학회장 조혜정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조’는 제 어머니의 성이에요. 얼마 전까지 제 이름은 김조혜정이었는데, 지난 유월부터 아버지의 성을 떼고 조혜정이 됐습니다. 말하고 보니 꽤 쓸데없는 얘기군요. 저한테는 꽤 중요한 건데……”

혜정은 꽤 들뜬 모양새였다. 말투에는 약간의 웃음기와 함께 친절함이 깃들어있었고, 세미나실에 자리한 사람들에게의 진정어린 감사와 호기심으로 가득 차있는 것 같았다.

‘키가 정말 크네… 아마도 백칠십 쯤?’

혜정의 키는 백육십칠, 컨디션이 좋으면 육십팔이었다. 그러나 길쭉한 비율과 바지 끝머리에 가려진 통굽신발 때문에 백칠십을 훌쩍 넘어보였다.

“삶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 멀리서보면 희극이라고들 하죠. 찰리채플린이 한 말인데요”

혜정은 어쩐지 미리 준비한 것 같은 느낌의 멘트를 꺼냈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을 즐기다가, 말을 이어갔다.

“사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라 생각합니다. 저희가 보여드린 영상, 이 영상에서 등장하는 ‘지연’의 삶은 그야말로 비극인데요. 그러나 우리가 ‘지연’의 삶이 비극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은…… 영상이 ‘지연’의 비극적인 삶을 총체적으로 봤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멀리서 본 셈이죠. ‘지연’이 여성으로서 겪어야했던 차별과 갈등, 불합리와 폭력에의 노출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다르죠. 우리들 세대는 부모 세대로부터의 압박으로 인해 하루하루를 억지로 살아가기에 바쁩니다. 그 사이에 겪는 자잘한 차별과 부조리들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취급되거나, 대부분은 인지조차 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는 사회에 소속된 모든 여성에게 불평등을 학습시키고, 그게 자연스럽고 별 거 아닌 것처럼 느끼게 만드니까요. 이런 맥락에서 여성학, 그리고 페미니즘에 대해 고찰하고 연구하는 것은 큰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어쩌면 역사적 과제라고도 할 수 있죠. 우리 세대에서 여성으로서 겪은 차별을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의무인 셈이고……”

혜정은 능수능란했다. 약 삼십 분 동안 이어진 발표는 청중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던져줬고, 몇 명은 이미 감화된 것 같았다.

“저는 오늘 정말 기쁩니다. 왜 기쁘냐구요? 여기 이 세미나에 남자 분이 한 명이라도 왔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거든요. 지금 여기 네 분이나 앉아계신데, 저는 한 명이라도 오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페미니즘을 정말 잘 이해하고 받아들여야할 대상은 다름 아닌 남자입니다. 인종차별에 있어 백인들의 주장이 절실하듯이…… 좀 더 래디컬한 분들은 부정하시기도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회의 구성원 전체가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받아들여야한다고요”

혜정은 노골적으로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맨 처음 단상에 섰던 작은 체구의 여학생에게 허리를 굽혀 귓속말을 했다. 여학생은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서 서류더미를 집어 들어, 다른 학회사람들과 함께 한 장 씩 나눠주기 시작했다. 민영이 <입회신청서>라고 적힌 종이를 손에 들고 항목을 쳐다볼 즈음, 혜정이 마이크에다 대고 웅변하듯 말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당장 가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들고 가셔서, 오늘 세미나 내용이 마음에 들었다면 언제든지 찾아와주세요. 저희 사무실은 학생회관 9층에 올라오셔서, 왼쪽으로 꺾고 쭉 걸어가다 보면 나옵니다. ‘여력’이라고 크게 포스터가 붙어있으니까 알아보시기 쉬울 거에요. 아니면 제 전화번호로 연락을 주셔도 돼요! 제 전화번호는 공일공…”

민영은 작성 항목을 대충 훑어봤다. 눈에 띄는 건 ‘지금껏 여성으로서 살아오며 받았던 차별, 피해를 써주세요(선택사항)’ 빠져나가는 청중들은 하나같이 말이 없었다.




3


“도재하입니다”

신입회원 환영회는 A대 근처의 한 민속주점에서 조촐하게 열렸다. 환영회에는 열아홉 명의 학회원이 참가했다. 이중 세미나에 청중으로 참여했던 사람은 민영을 포함해 다섯 명이었다. 나머지 열네 명은 이 다섯 명을 위해 모인 셈이다. 다섯 명의 신입회원 가운데 남자는 단 한 명이었는데, 앞선 네 명의 짧은 자기소개가 끝난 뒤 비로소 그의 차례가 된 참이었다.

“뭐야, 그게 끝이야? 과는 어딘데?”

“국어교육과입니다”

재하는 기계처럼 대답했다. 첫인상이 이런 사람에게는 얄궂은 질문이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름이 예쁘네. 성은 어느 쪽 성이야?”

마침 사선에 앉아있던 혜정이 물었다. 재하를 제외한 누구도 같은 질문을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민영은 그 질문이 명백한 심술이라고 생각했다.

“음, 잘 모르겠어요. 그건”

“아니, 엄마랑 아빠 중에 어느 쪽 성이냐고 물은 거야”

혜정은 턱을 괴고 재차 물었다.

“네. 그건 이해했는데…… 정말 모르겠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혜정은 대놓고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재하는 천장을 한 번 바라보더니 다시 대답했다.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다 도씨거든요. 성주 도씨…”

“뭐…… 뭐? 그게 가능해?”

혜정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재하는 혜정의 눈을 피하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네. 어쩌다보니”

“도씨 자체도 희귀한 성씨 아니야?”

“그렇죠. 전국에 십만 명도 안 되는 걸로 아는데”

“참 신기하네. 한자까지 똑같다 이거지?”

“네. 본관도 같구요”

“과연. 모르겠다고 할 만 하군”

혜정은 익살스런 표정을 하고 턱을 만지는 제스처를 했다. 그러면서, 하긴 도도재하는 좀 이상하잖아, 같은 말을 뇌까리더니, 일순간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근데 여긴 왜 들어온 거야? 혹시…… 여자가 많아서?”

혜정은 가볍게 던지곤 혼자 히히, 하고 웃었다. 주위의 회원 두세 명도 덩달아 웃었다. 듣기에 따라 비웃음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그냥 관심이 있어서요”

“그으래?”

재하는 전혀 동요한 기색이 없었다. 그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왜 혜정이 도발과 다름없는 질문을 던지는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여자 분들은 사범대에도 많아요. 오히려 거기 더 많겠죠, 페미니즘에 관심 없는 여자는”

“흠! 방금 답변은 엄청난데? 인정이야, 인정”

취기가 돌던 혜정은 하이파이브 하자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재하는 장단을 맞춰줬다.

재하는 무척 진중한 사람이었다. 가끔 고의로 입꼬리를 내리거나 억지로 웃는 경우가 아니면 무표정했다. 기본적으로 말수가 적었고, 그나마도 ‘응’ ‘네’ ‘아뇨’ 같은 짧은 응답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생각과 의사표현만큼은 명확했다. 여초집단에서의 견제와 압박을 여유 있게 소화할 수 있는 재치도 있었다. 학회로부터 비정기적으로 요구되는 과제나 잔업도 빼먹는 법이 없었고, 가끔은 음료수나 먹거리 등을 예고 없이 사와 건네는 센스도 있었다. 재하는 이런 행동을 하면서도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받으려 하는 사람들’이 으레 내뿜는 비굴함으로부터 자유로웠다.

한편, 혜정은 학회의 그 누구보다도 재하의 존재를 불편해했다. 혜정이 느끼는 거의 모든 불편함은 세미나에서 했던 본인의 주장─누구보다도 남성이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져야한다는─에서 기인했다. 표면적으로는 조직의 우두머리로서 철학적 모순을 보이면 안 된다는 강박이 있었고, 그 너머에는 ‘남성 페미니스트’라고 자칭하는 이들에 대한 유서 깊은 증오가 있었다.

혜정의 아버지는 대학 교수였다. 철학 박사로서 십 수 권의 외서를 번역했고, 소위 ‘석학’이라 불릴 만큼 학계에서의 입지도 튼튼했다. 또한 공공연한 페미니스트였다. 여성이 계층 사다리를 오르며 경험하는 ‘유리천장’에 대해서 강도 높은 비판을 해왔고, 프로이트의 시대착오적 성관념을 조목조목 짚어 비판하는 페이퍼를 냈으며, 방송과 강연에 나가 대한민국에 자리 잡은 여성 차별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혜정 본인은 부정하고 싶은 사실이겠지만, 대학에서 페미니즘 학회를 이끌게 된 사상적 배경에 그녀의 아버지가 있었다는 것은 명백해보였다. 적어도 제삼자의 시선으로는 그랬다.

혜정의 시선으로 경험한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나? 혜정의 아버지는 두 번 이혼했다. 혜정은 아버지가 세 번째 결혼을 계획할 즈음에 따로 나와 살았다. 놀라운 사실은, 첫 번째 부인이었던 혜정의 어머니를 포함해 모든 결혼이 사제관계로부터 비롯됐다는 것이다.

혜정은 페미니스트 교수로 널리 알려진 아버지가 아내 몰래 자신의 학생과 만나 입 맞추는 장면을 집에서 목격했다. 다섯 살 때의 일이었다. 마흔을 넘긴 아버지가 딸뻘 되는 여학생의 혀를 집어삼키며, 탐욕스럽게 가슴의 크기를 재던 모습을 떠올리면 구역질이 나오곤 했다. 실제로 혜정은 이 이야기를 꺼내며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사건은 저질러졌고, 혜정의 어머니는 딸을 남겨두고 떠났다. 그러나 임신으로 인해 단절된 학업과 커리어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학구열로 불타오르던, 아름답고 풋풋한 스무 살의 철학도는 지금 경기도 어딘가에서 작은 꽃가게를 하고 있다. 이런 사실이 왜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았는가? 어떤 협상과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혜정이 아무런 금전적 어려움 없이 대학에 진학한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혜정은 자취를 했지만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았고, 이것이 아버지에게 작은 골칫거리로나마 영향을 주리라 굳게 믿었다.


“남자들은 있지”

혜정이 말을 꺼냈다. 재하는 책상 아래로 책을 읽고 있었다. 혜정을 바라보고 있는 건 민영뿐이었다.

“남자들이 얼마나 영악하냐면…… 여자들이 좋아할 법한 남자의 모습을 연기한다는 거지. 예컨대 민영이 전 남자친구처럼. 좀 추워지니까 맞지도 않는 트렌치코트 입고 다니는 걸 봐. 지네들이 공유라도 되는 줄 아나본데”

혜정이 말했다. 재하는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

“이제 그 얘긴 하지 마요. 생각할수록 머리아파”

민영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그놈의 선배룩은 언제쯤 유행이 지날까? 거지같은 니트에 땅딸보처럼 땅에 질질 끄는 코트나 가디건을 보면 눈이 썩는 것 같다니까. 하다못해 옷으로도 우위를 강조하는 거지. 여자들은 최대한 어려보이는 화장, 어려보이는 옷… 조금이라도 어른스럽게 입으면 쫄아서 아무 말도 못해. 여자가 지들 밑에 없으면 불안해죽을 것 같나봐. 아, 민영이 너는 지난 번 그 테니스 치마 버렸어?”

혜정이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아, 그거 이제 안 입어요. 돈 아까워서 버리지는 않았는데……”

“안 버렸단 말이야? 아직도?”

혜정이 어이없다는 듯 입을 벌려보였다. 당황한 기색이 민영의 표정에 올랐다.

“그냥 버리기엔 돈이 아깝잖아요? 동생한테나 주려고요”

민영이 간신히 대답했다.

“뭐? 너 남동생밖에 없는 거 아니었어?”

“그러니까요!”

“와우!”

혜정이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혜정은 대화에서 상당히 집요한 구석이 있었지만, 해학적으로 재치 있는 답변에 관대했다. 그래서 죄인을 심문하듯이 심각한 질문이 이어지다가도, 한 번 웃음이 터진 뒤에는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 같은 분위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도 옷을 그따위로 입는 건…… 취향의 영역으로 봐줄 수 있는 부분이지. 절대 용서가 안 되는 건”

그렇게 혜정은 ‘지나치게 어려보이는 민영의 테니스 치마’에 대해 관심을 떼고, 자연스럽게 새로운 대화로 이어갔다. 민영은 ‘용서가 안 되는 건?’ 이라고 대답하려다 말았다. 지나치게 비위를 맞추는 느낌이 아닌가 싶었다.

“페미니스트 흉내를 내는 남자야! 악!!”

혜정이 소리쳤다. 동시에 책상을 치는 소리가 방에 울렸다. 민영은 겁먹은 모양이었다. 재하는 혜정에게 잠깐 시선을 돌리더니, 아랑곳 않고 계속 책을 읽었다.

“한국 남자들…… 요즘 이거 줄여 쓰면 큰 일 나지. 아무튼 몇몇 남자들은 학습했다는 거야, 페미니스트 흉내가 여자 꼬시는 데 유효하다는 걸!”

“정말요?”

민영이 물었다.

“너는 참 새내기로구나”

혜정은 대답하면서 민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본적으로 여자는 특별한 남성에게 끌린다 이거지. 알파메일, 스페셜 원…… 그런데 지금 문화적 헤게모니는 여성주의로 넘어가고 있고, 가부장적인 남자는 경쟁력이 없어. 그런데 가부장적이지 않은 걸 넘어서 페미니스트라면? 소위 말하는 ‘뇌섹남’이 되는 거야. 어때?”

“전…… 잘 모르겠어요”

민영이 대답했다.

“빠가야로!”

혜정은 민영에게 딱밤을 날렸다. 민영은 혜정이 드디어 미쳤다고 생각했다.

“뭐 그건 좋다 이거야. 표면적으로나마 페미니스트를 흉내 낸다는 건, 적어도 관심은 있다는 거니까. 문제는, 하필 남자 같지도 않은 새끼들이 지가 페미니스트라고 하고 다닌다는 거야. 뻔하지 않니? 피지컬로는 경쟁이 안 될 걸아니까, 자연도태될 걸 본능적으로 느끼니까, 뭣도 모르는 주제에 ‘나 페미니스트요’ 하고 여자들한테 어필하는 거라고. 그럼 대화라도 할 수 있으니까. 참내, 여자를 얼마나 바보로 아는 거야?”

혜정은 열변을 토했다. 재하는 탁, 하고 책 덮는 소리를 냈다. 민영은 그제야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라는 제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왜 책을 덮어! 네 얘기 같애?”

“회장님이 너무 크게 얘기해서 읽을 수가 있어야죠”

재하가 의자등에 기대며 말했다.

“것 참 미안하구만”

혜정은 목을 내리깔고 말했다. 재하는 멍한 표정으로 혜정을 바라봤다.

“회장님 말이 맞죠. 다 동의해요. 당장 제 친구들 중에도 꽤 있는 것 같고……”

재하는 푸념하듯이 말했다. 혜정은 잠자코 듣자는 눈치였다.

“어쩌면 저도 비슷할지 몰라요. 그런데 핵심은, 그런 게 통한다는 거죠. 뭇 여자들한테요. 선배처럼 잘 걸러낼 수 있으면 모르겠지만……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이 사람이 진짜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 흉내인지 진심인지를요”

“그런 건 대화해보면 금방 알 수 있어”

혜정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런가요? 전 잘 모르겠어요. 애초에 페미니스트가 뭔지도 의견이 갈리잖아요. 채식주의자는 기준이라도 있지, 페미니즘은 어디까지 알아야 ‘안다’고 할 수 있나요? 애초에 남자가 ‘성평등을 지향한다’고 해봤자 설득력 없게 받아들이지 않나요? 남자주제에 뭘 알아, 남자면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여자나 꼬시기 위해서겠지, 이렇게 생각이 된다면요”

재하는 꿋꿋한 어투였다. 혜정은 전에 없던 논의 소재로 인해 다소 혼란을 겪는 모습이었다. 머릿속으로 논리적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민영은 말릴 타이밍을 가늠하고 있었다.

“차라리 솔직히 말하세요. 남자는 평생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고”

“……그래. 남자는 평생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어”

혜정이 대답했다.

“그게 회장님의 답변인가요?”

“정확해”

“알겠습니다. 그럼……”

재하는 의자 뒤편에 널브러져있던 가방을 들쳐 매고 나갔다. 혜정은 그 모습을 잠자코 보고 있다가, 민영아, 쟤 삐진 거야? 하고 실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다는 걸 증명하려는 듯 서류를 들춰보기 시작했다. 민영은 재하가 두고 간 책을 집어 가방에 넣었다. 민영은 재하가 책 읽는 모습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혜정과 재하의 짧은 논쟁이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일그러트릴 것이라는 민영의 우려와 달리, 학회는 전보다 잘 굴러갔다. 여러 대학이 참여하는 연합학회에 가입하는가하면, 페미니스트로 이름이 꽤 알려진 기성작가를 초대해 강연을 주최하기도 했다. 설립으로부터 일 년 반밖에 지나지 않은 학회로서는 눈부신 성과였다.

A대 중앙 페미니즘 학회 ‘여력’이 이룩해낸 여러 종류의 성과에 있어서, 재하의 행정적 기여는 상당한 것이었다. 재하는 학회의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다. 시키는 일은 물론이고 시키지 않은 일도 도맡아 했다. 학과를 등한시하는 것도 아니었다. 재하의 출석률은 백퍼센트에 수렴했다. 그나마 두어 번 빠진 것도 학회나 동아리 활동 때문이었다. 혜정은 재하를 더러,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이해가 안 돼”

라고 말하곤 했다. 고마움과 투덜거림이 결합된 기묘한 코멘트였다.

재하는 중앙 축구동아리의 핵심멤버이기도 했다. 민영은 재하가 미드필더로 출전한 축구 경기를 보러간 적이 있는데, 수비 진영으로부터 상대편 골대 근처까지 쉴 새 없이 뛰어다니는 모습이 몹시 재하답다고 생각했다. 재하는 그 날 경기에서 골을 기록했지만 세리머니는 하지 않았다.

민영을 포함한 학회의 그 누구도 ‘재하 잘생겼지?’ 라는 질문에 토를 달지 않았다. 심지어 재하가 탐탁지 않은 혜정조차, 좀 기생오라비처럼 생기긴 했지, 하고 우회적인 동의를 내놓았다. 재하는 백칠십육 정도의 훤칠한 키에, 어딘지 모르게 소년 같은 인상을 풍겼다. 버스에서 고등학생 요금을 내도 위화감이 없을 것 같은 외모는 시종일관 진지한 말투와 묘한 균형을 이뤄서, 사람들로 하여금 열정적이며 순수한, 이제 막 재능을 꽃피우려하는 청년의 모습을 바라보게끔 했다.

다만 페미니즘 학회인 ‘여력’에서는 ‘재하의 이성적 매력에 대해 이야기 않는 것’이 일종의 불문율처럼 자리 잡았다. 그도 그럴 것이, 혜정을 필두로 형성된 ‘여력’의 사상, 그 이면에 있는 거의 모든 혐오적 정서는 재하로 인해 손상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같은 불문율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잘생긴 남자들에게 젠더감수성 같은 걸 기대하지마, 애초에 걔네는 감수성 같은 걸 키울 필요가 없었거든’ 같은 혜정의 주장에, ‘근데 재하는 그렇지 않잖아’ 같은 말이 뒤따랐을 것이 분명했다.

이런 측면에서, 혜정이 재하에게 가지는 복잡한 불쾌함은 충분히 이해될만한 것이었다. 학회장으로서 혜정이 내놓는 의견들은 대부분의 여성들로부터 경험적인 공감을 이끌어냈지만, 재하의 존재는 학문적으로도, 사상적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영역에 있었다.

혜정은 재하로부터 차라리 이성으로서 어필하려는, 학회의 아무 여성과 한 번 자보려는 추악한 의도라도 느껴졌으면 했다. 재하의 지나치게 의연한 태도는 사실 동성애자가 아니냐는 의심을 빚을 정도였는데, 재하에게 지난 학기 말까지 사귀던 여자친구가 있었으며, 같이 손잡고 걸어 다니는 모습을 봤다는 증언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해소됐다.

학회 행사의 출석률은 재하의 출현확률에 노골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심지어 학회의 몇몇 여학생은 ‘자연스러운 화장’의 기준을 넘어선 도발적인 모습을 하고 나왔다. 이런 시도들은 혜정의 권고로 말미암아 줄어들었으나, 일부에게는 학회 내에 재하가 미치는 영향력을 체감하는 계기가 됐을 뿐이었다. 혜정은 재하를 두고 기이한 긴장감을 형성하고 있는 학회 분위기에 짓눌리는 것 같았다.

재하의 영향력은 철저하게 재하가 인지할 수 없는 영역에서만 발휘됐다. 어느 순간부터 학회 사람들은 재하를 ‘유니콘’이라 불렀다. 무지개를 타고 다니는 뿔 달린 백마…… 크든 작든 기성 시스템에 대한 증오나 환멸을 갖고 학회활동을 시작한 이들에게, 재하의 존재란 실로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유니콘’은 재하의 비현실성을 나타내는 매우 적절한 표현이기도 했다. 누구나 한 번쯤 올라타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도 비슷했다.

본인을 둘러싼 여러 기류들에도 불구하고, 재하가 학회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사상적인 유연함 덕택이었다. 재하는 여성학에 놀라울 정도로 순수한 학구열을 갖고 있었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페미니즘의 정의를 두고 세 시간 넘게 다투는 사람들보다 본질적이었다. 혜정은 재하에게 ‘차라리 사상검증에 가까운 질문’들을 몇 번이나 던졌다. 그럴 때마다 재하는, 그 부분은 생각지 못했어요, 아직 많이 부족하네요, 또 배웠어요, 같은 말들로 모든 도전들을 소화해내는 것이다.

재하는 남성이 페미니즘의 어느 부분까지 관여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학회에서 이뤄진 여러 차례의 토론을 통해 재하가 깨달은 것은, 주관적 경험과 감정의 작용에 따라 제각기 다른 페미니즘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페미니즘의 형태에 따라 남성으로서의 스탠스를 조절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재하는 과열된 논쟁과 토론으로부터 자신이 위치해야할 사상적 좌표를 정확하게 찾아내곤 했다.

민영은 재하와 같은 새내기이자 유일한 동갑내기였다. 둘은 함께 밥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면서 열띤 토론을 벌였다. 주로 소리치는 쪽은 민영이었고, 받아들이고 정리하는 쪽은 재하였다. 민영은 재하의 대화 태도가 자신과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재하와 말하고 있노라면, 특별한 사상적 성장을 이룩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한편 민영은 재하와 함께 다닐 수 있는 명분상의 우위를 즐기기도 했는데, 실제로 몇몇 학회원들은 민영이 재하의 시간을 지나치게 점유하는 것에 대해 불쾌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민영은 다른 회원들과의 격차를 계속해서 벌려갔고, 재하에 대한 논쟁은 암묵적인 종결을 향해 치닫는 모양이었다.




4


“정말 말도 안 돼”

혜정이 말했다.

“말이 안 될 것까진 없잖아요. 어차피 관점의 차이라는 게 있는 거고……”

민영이 눈을 마주치지 않고 중얼거렸다. 재하는 입술을 물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니. 말이 안 돼. 다른 것이 있고 틀린 것이 있는데, 내가 봤을 때 이건 틀린 거야. 아무리 학회라고는 하지만 일관된 입장은 있는 건데……”

혜정의 목소리가 떨렸다. 재하는 혜정이 분노와 싸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그렇지만, 집회에 참여하는 건 자유잖아요? 학회의 입장이 어떤 들 저는 성노동자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건데……”

“그럼 인터뷰는 거절했어야지! 네 개인 의견 때문에 왜 학회 전체가 피해를 봐야하느냔 말야!!”

혜정이 민영의 말을 끊으며 소리쳤다. 여기서 ‘피해’라는 단어 사용이 적절한지는 먼 나중의 논쟁거리였다.

“저…… 회장님 마음은 이해하지만, 조금 진정하는 게 좋겠어요. 소리쳐봐야 되돌릴 수 있는 일도 아니잖아요. 이미 정정하는 성명도 냈고……”

재하는 상황을 수습하려 애썼다. 민영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혜정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엎드렸다.

“연합학회가 그런 입장인줄은 저도 몰랐어요. 알았으면……”

민영은 변명하는 투였다.

“알았으면 안 갈 거였니?”

혜정이 엎드린 채 대꾸했다.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안 가지 않았을까요. 학회에 피해가 되는 건 저도 싫으니까……”

“것 봐, 엄청난 신념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혜정이 말을 끊었다.

“뭐라구요?”

“네가 페미니즘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해? 네가 뭘 아는데?”

혜정이 다그쳤다. 동시에 회의실의 공기가 추를 매단 듯 내리깔렸다.

“진정하세요, 잠깐……”

재하는 본능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이런 말로는 진정되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말해봐! 네가 뭘 알아? 겨우 책 몇 개나 읽었다고 다 아는 것 같아?”

“그 사람들도 여성이에요”

단호한 목소리였다. 혜정은 전에 없던 민영의 태도에 당황했다. 민영은 멈추지 않았다.

“혜정 언니가 추구하는 페미니즘에 성노동자는 예외인가요? 더 나은 미래를 위한다고 하지만, 이미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고요. 우리한테 자격이나 있나요? 기존의 사회에서 어떻게든 적응해서 먹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당신은 남성이 만들어낸 여성억압구조의 피해자니까, 하던 일을 때려치고 다른 일이나 알아보라’고 할 자격이 있어요? 보상금이나 좀 쥐어주고요? 그런 자격은 누가 만드는데요? 언니는 자격이 있어요? 대학의 페미니즘 학회장이라서? 아니면 아빠가 저명한 페미니스트 교수라서……”

혜정이 민영의 뺨을 때렸다. 짝, 하는 소리가 이후의 정적과 공명했다. 민영은 얼빠진 표정으로 뺨을 매만졌고, 혜정은 그 앞에 서서 미동도 없이 민영을 지켜봤다. 재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민영은 조용히 가방을 챙겨 회의실을 나갔다. 재하를 비롯한 다른 회원들은 약속이나 한 듯 차례대로 자리를 떠났다. 재하는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는데, 혼자 있게 해달라는 혜정의 요청에 말없이 빠져나왔다.

성매매 시장의 여성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이 주어지지 않으며, 성매매를 노동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연합학회의 입장은 변함없었다. A대 페미니즘 학회 ‘여력’은 자체징계위원회를 열어 민영에게 한 달간의 활동중지를 통보했다. 당초 연합학회 측은 민영을 탈퇴 조치할 것을 권고해왔지만, 그럼에도 잠깐의 휴식으로 징계가 완화된 것은 혜정 나름의 배려 또는 죄책감이라 말할 수 있었다. 혜정에게 민영이 학회활동을 지속할 것인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그럼에도 민영의 적극성이 학회에 꼭 필요한 요소라고 판단됐고, 적어도 혜정에게는 ‘뺨을 때려서 미안하다. 돌아와 달라’는 말을 직접 하는 것보다는 징계수위를 줄이는 것이 더 쉬운 일 같았다.


민영은 오랜만에 연습실을 찾았다. 축제를 앞두고 공연 준비가 한창이었다. 학회 활동은 잠정 중단됐고, 학과 공부에는 힘을 뺀 지 오래였으므로 한동안 동아리로 돌아와 머리를 식힐 작정이었다. 민영은 축제 공연에 직접 참여하진 않았지만, 대신 동아리 부스를 준비하고 전반적인 행사를 기획하는데 기여하기로 했다. 첫 가을 축제를 맘 편히 즐기고 싶다는 새내기스런 소망도 함께 했다.

물론 가늘어진 관계를 복원하는 것은 적잖은 수고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다행히 민영에게는 그만큼의 수고를 감당할 만큼의 에너지와 시간이 있었고, 어쩌면 이것이 스무 살이면서 새내기대학생인 이들의 바꿀 수 없는 특권이라 생각했다. 민영은 데면데면해진 동기들과 함께 밥을 먹었고, 연습실에 이온음료를 들고 찾아갔고, 연습을 지켜보며 동작과 박자 같은 것에 대해 성의 있는 피드백을 해줬다.

민영은 미처 친해지지 못했던 새 구성원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그 중 소희는 민영이 들인 일련의 노력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응해주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지금의 댄스 동아리를 실효지배하고 있는, 세련되고 아름다우며 친근하기까지 한 동갑내기 여성과 친해지는 과정은 민영이 한때 품었던 경계심을 완벽하게 지워버렸다. 민영이 소희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둘은 뒤로 몰래 다가가 슬그머니 껴안아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관계가 됐다.

소희가 무엇보다 특별했던 것은, 새로운 인간 자체에 대해 근원을 알 수 없을 만큼 깊고 넓은 호기심을 보인다는 점이었다. 이 호기심은 소위 오지랖이라 불리는 불쾌하고 무례한 레벨의 관심과는 다르게 느껴졌는데, 순수하고 명랑하며 악센트 구석구석까지 꾸밈없는 친절로 가득 채워진 듯한 소희의 목소리와, 동시에 인생에서 가장 젊고 생기 있으며 머리에서 손끝과 말초신경에 이르기까지 우아한 곡선으로 그려진 것 같은 존재적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기실 친한 친구 사이에서도 약간의 불쾌함과 어색함을 느낄법한 질문조차, 소희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인간본위에 대한 가장 진실된 관심과 흥미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소희는 처음 만나거나 일면식 정도만 있는 사람에게 엉뚱하고 깊숙한 질문을 던지곤 했는데, 겨우 관계의 정의나 골몰하고 있던 사람들은 안절부절못하다 거의 모든 걸 실토하곤 했다.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존재에게서 받는 관심은 불쾌감은커녕 압도적인 기쁨과 환희, 그리고 거역할 수 없는 노예적 사고를 심어주기 때문이다. 민영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희와 민영은 연습실, 혹은 커피나 이온음료를 함께 사러가는 길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소희는 민영의 페미니즘 학회활동에 유달리 큰 관심을 보였는데, ‘남성들의 시선을 끄는 여성’(실제로 소희는 이렇게 말했다)들이 경험하는 불쾌한 경험들─크고 작은 오해, 시선강간, 느닷없는 번호교환요청, 성희롱, 스토킹 같은─에 깊은 분노를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민영이 너도 알거야. 남자들은 예쁜 여자들이 아주, 아주 조금만 웃어줘도 자기한테 관심이 있는 줄 알잖아”

“응, 그렇지”

민영이 맞장구를 쳤다. 진심에서 우러난 말이었다.

“넌 귀엽게 생겼으니까 더 심했겠지? 이게 또, 순하게 생기면 만만한줄 알고 계속 집적대거든. 난 그래서 일부러 화장도 세게 하고 다녀. 아이라인을 매섭게 그리면 쫄아서 말도 못 거니까. 얼마나 한심한 애들이니? 남자라고 다 똑같은 애들만 있는 건 아니겠지만……”

“맞아. 그래도 쓸 만한 애들이 있긴 하겠지? 드물게……”

“아주 드물게 말이야”

소희가 힘주어 말했다. 이때 민영은 재하에 대해 이야기할 것인지를 잠깐 고민했지만, 끝내 말하지 않고 넘어갔다.

한편 민영은 징계처분이 내려진 뒤 재하와의 연락이 뜸해진 참이었다. 같은 학회소속이라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접점도 없었고, 사범대와 인문대는 캠퍼스 안에서도 꽤 떨어진데다 동선도 달랐다. 민영은 새삼스레 재하의 빈자리를 느꼈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고, 학회활동을 시작한 뒤부터 재하에게 받았던 에너지와 영감들을 떠올렸다. 관계의 빈자리는 조바심으로 채워졌다. 민영이 재하를 동아리의 축제 부스에 초대한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축제부스라고 해봐야 사면고깔이 있는 천막을 세 개 붙여놓은 것이었다. 이 부스는 작은 주점을 겸하고 있었는데, 마련해놓은 거라곤 테이블 몇 개와 등받이도 없는 플라스틱 의자가 전부였고, 안주도 편의점에서 무더기로 사온 육포와 땅콩 정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소주만 있으면 용서가 되는 곳이 대학 축제였다. 그나마도 자리가 없어서 공연을 준비하던 동아리원들은 서서 휴식을 취해야했다.

다행히 재하는 사람이 거의 다 빠져나간 뒤에야 부스에 나타났다. 민영은 오랜만에 만난 재하와 함께 부스의 가장 바깥쪽 테이블에 앉아 바쁘게 대화했다. 안부인사, 학회의 근황, 다른 학회 사람들에 대한 얘기,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성담론들이 오고갔다.

공연을 끝낸 동아리원들이 부스로 돌아온 것은 오후 아홉시쯤이었다. 공연팀은 바쁘게 수건으로 땀을 닦으면서 방금 전 공연에 대한 피드백을 주고받았다. 덕분에 비교적 조용했던 부스는 부산스럽게 변했는데, 이와 동시에 민영은 편안했던 대화의 흐름이 일그러졌음을 느꼈다. 재하는 전에 없이 당황한 기색이었다. 급기야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하고 황급히 일어나다, 팔꿈치로 술병을 쳐서 떨어트리기까지 했다. 병이 깨지고 술이 쏟아지는 소리가 울렸다. 재하에게 몰린 시선 가운데로 소희의 경멸 섞인 표정이 비집고 들어왔다.

“죄, 죄송합니다. 민영아, 나…… 나는 집에……”

재하는 말을 마저 끝내지도 못했다. 가방을 들고 도망치듯 뛰쳐나가는 재하의 뒷모습으로, 쟤 뭐야, 왜 저래, 민영아 괜찮니, 같은 말들이 달라붙었다. 민영은 아주 잠깐 동안 소희와 눈이 마주쳤다. 감히 어떤 질문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눈빛이었다.

민영이 재하를 다시 만난 건 해프닝으로부터 사흘이 지나서였다. 밥을 사주겠다는 핑계로 만나는 자리였지만 재하에게 평소와 같은 여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재하는 꼭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걸어 들어왔고, 좀처럼 민영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으며, 손과 발을 어디에 둬야할 지 계속해서 고민하는 것 같았다.

제대로 된 대화가 이어지기까진 시간이 걸렸다. 간단하게 점심을 함께 먹은 뒤에, 민영은 재하를 카페로 데려갔다. 재하는 캐모마일을 반 넘게 마신 뒤에야 진정이 된 모양이었다.

“미안해. 그때 먼저 가버려서……”

“괜찮아”

민영이 짧게 대답했다.

“소희랑 아는 사이야?”

“뭐, 뭐?”

재하는 전혀 생각지 못한 질문이 들어온 것처럼 굴었다. 민영은 쪼르르, 소리를 내며 앞에 있던 아이스티를 바닥까지 빨아마셨다. 답답하다는 제스처였다.

“너랑 눈이 마주쳤잖아. 그래서 뛰쳐나간 거고”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어. 시간이 늦기도 했고”

“계속 의미 없는 대화만 하다 갈 거야? 너 지금 완전 이상해. 알지?”

민영은 재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재하는 피하려는 듯 고개를 내리깔고, 음, 으음, 같이 고민하는 소리를 몇 번 내다가, 심문 중에 자백을 결심한 죄수처럼 한숨을 푹 쉬었다.




5


재하와 소희는 같은 학교를 다녔다. B고등학교는 위치한 지역구 내에서 유일한 인문계 고등학교였는데, 덕택에 교육인프라가 미흡한 교외지역에서 전입해오는 학생이 많았다. 재하는 그 중 한 명으로 교외에서 손꼽히는 대농의 장손이었다. 본가와 B고등학교는 이렇다 할 대중교통도 없었고 통학할만한 거리도 아니었으므로, 재하는 부모님이 마련해준 전세 아파트에서 홀로 생활하며 학교를 다녔다. 생활비는 매달 계좌로 부쳐졌으며 집안일을 대신 해줄 가정부까지 고용했다.

재하의 집안은 대대로 부유했다. 다만 재하의 아버지는 집안에 대학 교육을 받아본 사람이 없다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농사꾼으로서의 삶만 강요받아왔던 자신과 다르게 재하만큼은 반드시 ‘서울에 있는 번듯한 대학’에 보내겠다는 일념을 갖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재하는 어렸을 때부터 남부럽지 않은 교육환경을 제공받았고, ‘공부하는데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해라’는 말을 귀 따갑게 들으면서 자랐다.

그러나 재하는 아버지의 기대와 과도하리만큼 쏟아지는 투자에 적잖은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와 홀로 학업에 집중해야하는 상황, 전혀 연고가 없는 새 학교와 인간관계에 대한 어려움에 지쳐갈 때쯤…… 삼 분도 안 되는 통학로에서 소희를 발견한 것이다. 소희는 얼이 빠진 채 자신을 바라보는 재하에게, 웬만한 사람들은 인지할 수도 없을 만큼 섬세한 미소를 지었다. 주위의 모든 풍경이 흐려졌고, 재하의 모든 초점과 정신은 교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소희의 뒷모습에 집중됐다. 재하는 그날 단 한 개의 수학 문제도 풀 수 없었다.

다음 날부터 재하는 같은 시간, 같은 등굣길에서 매일같이 소희를 찾았지만, 웬일인지 한 번도 마주칠 수 없었다. 보름동안 두리번거렸다면 한 번은 마주 칠만 한데, 물어물어 찾자니 이름도 모르잖아, 그렇다고 여학생 교실을 모두 찾아볼 만큼의 배짱은 없었다. 재하는 이틀에 한 번 꼴로 소희에 대한 꿈을 꿨고, 얼굴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떠오르는 대로 스케치도 했다. 그러나 소희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렇게 생긴 사람이 있긴 할까? 그냥 내가 착각한 건 아닐까? 사실 없는 사람일수도 있는 거잖아? 그만 포기하는 게…… 라고 생각하는 재하의 마음을 꿰뚫기라도 한 듯, 소희가 나타났다. 보충수업을 빼고 몰래 빠져나가던 하굣길이었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재하는 소희가 소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드디어 찾았다, 찾았는데, 찾은 뒤에는…… 어떻게 하지, 한 번도 생각 안 해봤는데, 재하는 정신차려보니 소희의 뒤를 쫓고 있었다.

재하의 아버지가 마련해준 아파트는 그 동네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그 뒤로는 크고 작은 언덕이 솟아 있었고, 그 위에 조그마한 연립주택들, 허름한 술집과 담배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 밤이면 전등과 간판 불빛들을 뿜어내곤 했다. 재하는 아파트 창문으로 내려 보던 동네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었다. 만약 소희가 없었다면, 재하가 그 동네에 제 발로 들어가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재하는 미행에 재능이 있었던 것 같다. 원체 조용한 성격인 것도 있거니와, 어려서부터 인기척 없이 숨 쉬고 걸어 다니는 걸 잘했다. 그래서 재하의 어머니는 삼계탕을 할 때마다 재하를 불러 닭을 잡게 했다. 재하가 걱정한 거라곤,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너무 커서 소희에게 들킬지 모르겠다는 것 정도였다.

소희는 학교에서 나와 사오십 분은 걸었고, 마침내 큰 언덕 중턱에 지어진 이층짜리 맨션에 들어갔다. 맨션의 원래 뜻을 생각해보자면, 소희가 문을 열고 걸어 들어간 그 건물은 결코 맨션이라고 할 수 없었다. 외벽은 칠해놓은 베이지색 페인트가 반 넘게 벗겨져 지저분한 회색무늬처럼 돼있었고, 오르내리는 돌계단은 관리가 안 돼 이곳저곳에 금이 가있었다. 그럼에도 건물 옆구리에는 ‘신일맨션’이라는 글자가 붙어있으므로, 재하는 그 건물을 맨션이라 부르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 뒤로 재하의 하굣길은 소희를 따라 맨션까지 갔다가, 저녁이 돼서 건물들이 불을 밝힐 즈음에야 아파트에 돌아오는 것으로 바뀌었다. ‘오늘은 말이라도 한 번 걸어볼걸……’ 하는 후회 뒤에는 항상 공허함이 남았다. 지은 지 이 년이 채 안된 아파트는 넓고, 쾌적하고, 지하층에 대형마트까지 갖추고 있었지만, 다 쓰러져가는 소희의 맨션보다 더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이내 화까지 치밀어 올랐다. 걔처럼 예쁜 애가 그따위 맨션에 살다니, 말도 안 돼,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어.

재하가 맨션을 찾은 첫 번째 주말이었다. 여느 때처럼 맨션에서 오십 미터쯤 떨어진 곳에 앉아있었는데, 맨션 방향에서 뭔가 깨지는 소리와 여자의 비명소리 같은 것이 섞여 나왔다. 그리고 소희가 맨션 밖으로 뛰쳐나왔다. 소희는 묶은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머리채 끝부분이 잡아 뜯긴 듯 이리저리 꺾이고 엉켜있었다. 노란색 티셔츠는 허리가 찢겨졌고, 회색 반바지는 춤이 조금 내려가 있었으며, 맨발로 나온 다리는 불규칙적으로 떨렸다. 재하는, 뭐야, 왜 그래! 크게 소리치며 소희에게 뛰어갔다.

소희의 아버지가 경찰에게 조사를 받는 동안, 재하는 소희를 자신의 아파트로 데려왔다. 너무 넓어서 쓰지 않는 두 개 방 중에 하나를 내줬다. 그리고는, 한동안 맨션에서 떠나 여기서 지내도 괜찮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을 테니 편하게 지내라, 같은 말들을 했다. 가정부 아주머니에게는 가까운 친척이 이사 왔다고 둘러댔다. 아주머니는, 아이구, 그래도 남녀가 단 둘이…… 남사시럽구만, 하고 말았다.

소희는 아파트에 와서 이틀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에만 있었다. 학교도 가지 않았다. 방에서 나오는 건 가끔 물을 마시러 나올 때뿐이었다. 사흘 째 되는 날, 소희는 나 진짜 여기 있어도 돼, 하고, 아주 작게 속삭이듯이 말을 걸어왔다. 재하는 소희와 함께 맨션을 찾아가서, 소희의 교복과 가방 그리고 옷가지 몇 개를 챙겨 돌아왔다. 재하는 그제야 소희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신소희, 신소희.

재하는 소희에게 부지런히 말을 걸었다. 잘 잤어? 오늘 기분은 어때? 떡볶이 좋아해? 평소에는 뭐하고 지내? 재하는 소희의 마음을 열기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동거한지 삼 개월이 넘었을 즈음에는 자연스러운 대화가 가능해졌다.

소희는 재하와 같은 나이로,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 동네에 살았다고 했다. 어머니는 소희가 일곱 살일 때 도망쳤다. 아버지는 공사판을 전전하는 노동자였는데, 최근에는 허리를 다쳐 집에서 요양 중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소희의 가구는 기초생활수급대상으로 인정됐다. 그러나 정부보조금만으론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에, 소희는 주말마다 아르바이트를 뛰어야했다. 정식으로 수입이 잡히면 보조금 지급이 중단되므로 4대 보험 등을 적용하지 않는 곳에서만 일했다. 그러다보니 점주로부터 수시로 부당한 대우를 받았으며 종국에는 임금체불까지 당했다는 것. 일을 했는데 돈을 안 주니까, 나름대로 파업을 한답시고 주말에 집에서 버티고 있었는데, 술에 잔뜩 취한 아버지가 ‘돈도 안 가져오고 일도 안 하느냐’며 때리고 물건을 던졌다는 것이다…….

재하는 소희를 알면 알수록 더 깊이 사랑하게 됐고, 지금까지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보여주겠노라 다짐했다. 뭘 하더라도 전보다 행복하게 해줘야지, 여태껏 겪었던 불행을 보상받을 수 있을 만큼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해줘야지. 소희는 태어나 처음으로 백화점에 갔다. 재하는 소희에게 맞는 예쁜 옷들과 적갈색의 높은 구두를 사줬다. 장미향이 나는 향수도 사줬다. 점심 땐 식당가의 경양식집으로 가서 식사를 했고, 영화도 봤다.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해, 라고 말하는 재하에게, 소희는 서점에 가자고 말했다. 소희가 서점에서 고른 책은 모두 일곱 권이었다. 다섯 권은 보충수업시간에 사용하는 문제집이었고, 나머지 두 권은 <행복한 왕자>, 그리고 <데미안> 이었다.

어느 날, 소희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낡은 나무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다. 재하는 소희가 집중하기 좋도록 독서실에서 쓰는 책상을 사다줬고, 문구점에 가서 만 원이 넘어가는 비싼 샤프와 사색 볼펜 같은 필기구들도 사줬다. 이미 B고등학교에서 전교 일이 등을 다투고 있던 재하는 물심양면으로 소희를 도와줬으며, 기껏해야 중하위권 수준의 학생이었던 소희는 반 년 만에 상위권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느닷없이 시작된 동거생활이 일 년을 넘어갈 때 쯤, 소희와 재하는 같은 방을 쓰고 있었다. 소희는 첫 번째 섹스를 하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 재하는 부드럽게 입을 맞추면서, 다 괜찮을 거야, 아무 걱정 마, 내가 여기 있잖아, 하고 속삭였다. 둘은 거의 매일 밤마다 관계를 가졌다. 당시의 재하는 스무 살도 되지 않았고, 소희는 재하가 애무할 때마다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밀월 생활이 일 년 반쯤 경과했을 때였다. 재하는 방학을 맞아 한 달 동안 본가에 가있었고, 소희는 아파트에서 혼자 지내고 있었는데, 재하가 본가에 간 줄 몰랐던 고모가 반찬을 갖다 주러 찾아온 것이다. 별생각 없이 받았던 인터폰이 화근이었다. 재하가 아닌 낯선 여자의 목소리를 들은 고모는 곧장 경찰에 신고했다. 어떻게든 집안에서 버텨보려 했던 소희였으나, 지금 문 열지 않으면 강제로 들어가겠습니다, 라는 경찰의 최후통첩에는 별 수 없었다.

“내 아들한테 감히 손을 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년이……”

아직 성인도 안 된 두 남녀가 일 년 반 동안 동거했다는 사실도 충격이었지만, 재하의 부모님은 소희처럼 ‘근본도 바탕도 없는 길바닥 출신의 여자’가 집안의 장손을 홀렸다는 것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재하의 해명과 핑계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고, 소희는 벌써부터 남자한테 빌붙어 사는 화냥년이 됐다.

다만 재하의 부모님은 재하가 수험생활을 코앞에 두고 B고등학교를 떠나는 걸 원치 않았다. 반드시 이사를 가고 학교를 옮겨야하는 사람이 있다면 소희였다. 어린 나이에 계집을 옆에 두면 공부가 제대로 될 리 만무할 것이며, 떼놓는다면 확실하게 떼놓아서 정을 못 붙이게끔 해야 한다는 것이 부모님의 결론이었고, 최종적으로 소희에게 삼천만 원의 돈을 쥐어주며 어디로든 떠나라했던 것이다.

본가에 잡혀있던 재하는 필사적으로 빠져나와 아파트로 향했다. 함께 살던 아파트에는 소희가 홀로 짐을 싸고 있었다.

“어떻게 왔어? 마침 잘 됐다. 이삿짐 싸는 것 좀 도와줄래. 어디까지가 내 물건인지 헷갈려서……”

먼저 말을 꺼낸 건 소희였다. 재하는 잠깐 동안 짐 싸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물건을 담고 있던 박스를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밀쳤다.

“짐 쌀 필요 없어. 가지마. 여기에 있어”

“……무슨 소리야? 너희 부모님이 짐 싸서 나가라고 했어. 돈까지 주면서”

“돈? 돈을 줬다고? 너한테?”

재하는 분노와 당혹감이 반씩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깔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뭐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돈은 상관없어. 그건 돌려주고, 계속 여기에 있어”

“싫어”

소희가 딱 잘라 말했다. 소희가 잘라낸 대화의 단면이 얼마나 깔끔했는지, 재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왜, 왜 그러는 거야. 아니면 그냥 그 돈으로…… 몰래 여기 근처에 방을 구해도 될 거야. 그치?”

“아니. 안 그럴 거야”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재하가 소리 질렀다.

“내가 어떤 식으로 말했는데?”

소희는 눈길도 주지 않고 받아쳤다.

“그렇게 차갑게…… 우리가 아무 사이가 아니라는 듯이 말야……”

“우리가 무슨 사이였어?”

“……뭐라구?”

재하가 눈물을 뚝 그치며 되물었다.

“애초에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어. 그냥 서로간의 니즈가 맞아서 같이 산 것 뿐이지…… 난 안정적으로 살 곳을 원했고, 넌 날 원했고, 그게 다야. 그것도 이젠 끝났지”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했잖아”

“네가 그걸 원했으니까”

소희의 대답은 준비라도 한 것처럼 바로바로 튀어나왔다. 재하는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감히 어딜 간다는 거야…… 내가 허락도 안 했는데……”

“……뭐? 난 네 소유물이 아니야. 애초에 네가 좋아서 같이 산 것도 아니고”

“그럼 왜 우리 집에 왔어? 왜 내 방에 들어왔어? 왜 나랑 입을 맞췄어? 왜 나랑 했어? 왜?”

“그만해, 추해”

“대답해봐! 그래놓고 이제 와서 가버리겠다고?”

“이거 놔”

소희는 어깨에 올라온 재하의 양팔을 뿌리쳤다. 그리고 재하가 밀쳐놓은 박스를 끌어당긴 뒤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재하는 이성을 잃고 온 힘을 다해 소희를 밀었다. 소희는 마룻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야!”

소희는 고함을 질렀다. 재하는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듯 소희의 몸을 깔아뭉갠 뒤, 블라우스를 찢고 속옷을 벗겼다. 소희가 발로 재하의 몸을 걷어차고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재하는 되려 소희의 뒤꽁무니를 붙잡아 내리고, 음부를 자신의 몸 쪽으로 잡아당겼다.

재하는 한 시간 넘게 계속 움직였다. 소희는 더 이상 반항하지 않았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재하가 입을 맞춰도 혀를 내밀지 않았고, 그저 시체처럼 누워 재하의 욕구를 받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재하는 질내에 사정했다. 재하의 사정이 끝나자마자, 소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다시 짐을 옮겨 담기 시작했다. 재하는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결코 소희가 떠나는 걸 막을 수 없음을 뒤늦게 깨닫고 울기 시작했다.

“가지마, 가지마,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

소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다 그래? 남자가 모든 걸 줘도, 언제든 맘대로 떠나버리고. 여자라는 거 참 편하겠어, 나도 여자로 태어날 걸……”

재하는 자포자기한 상태로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소희와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다면 영혼조차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소희는 바쁘게 짐을 담던 손동작을 멈추고 재하를 쏘아봤다. 그리고 전에 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누군 여자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줄 알아?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대화가 끝난 건 자정이 넘어서였다. 민영과 재하는 막차가 끊긴 지하철역으로 말없이 걸었다. 두 사람은 택시를 타기위해 횡단보도 앞에서 갈라지기로 했다. 신호가 바뀌고, 민영은 길을 반 쯤 건너다 우뚝 서더니 도로 돌아와 재하에게 입을 맞췄다. 민영은 그날 밤 재하와 잤다. 다음날로 이어지는 새벽은 지겨울 만큼 길었다.




6


혜정은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었다. 호텔의 암막커튼은 늘 무거웠다. 십칠 층의 창밖으로는 잔잔히 물결치는 한강, 그 위로 차들이 개미처럼 오가는 양화대교, 또 그 위로 연하늘에서 쪽빛까지 이어지는 선형의 그라데이션이 쌓여있었다. 혜정의 그림자 바깥으로 튀어나온 빛이 침대로 향했다. 소희는 빛에 감응하는 식물처럼 뒤척였다.

“몇 시야?”

소희가 물었다.

“열 시야”

혜정이 대답했다. 소희는 누워있던 몸을 한 바퀴 돌려 침대 오른쪽 끝에 붙어있는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 소희의 손에 잡힌 것은 혜정의 휴대폰이었다.

“어, 정말이네…… 체크아웃이 몇 시지?”

“열한 시인데, 돈 주고 연장하면 돼”

소희는 휴대폰 잠금을 풀고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혜정은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그리고 소희의 왼쪽 팔을 끌어당겨 머리 아래에 놨다.

“조식 시간은 끝났겠지?”

“당연하지. 한참 전에 끝났어”

혜정은 뜸들이지 않고 말했다. 소희는 으, 으으, 하며 조금 짓궂은 소리를 냈다.

“지금 가서 싹싹 빌어보면 어떻게 안 될까? 연어 몇 조각이라도……”

“됐거든”

“너무 배고프단 말야”

소희가 옆에 누운 혜정을 마주 보며 말했다. 혜정은 싱긋 웃으며 소희의 목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나가서 뭐라도 사올까? 빵이라든가”

혜정이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옷 입기 귀찮잖아”

“아냐. 그냥 티셔츠에 바지만 입고 갔다 오면 돼. 바로 앞인데 뭘”

혜정은 소희의 눈을 응시했다. 소희는 잠시 웃다가, 얼굴 근육이 정상적으로 움직이는지 확인하려는 듯 찡그려보였다.

“그렇게 해도 예쁘네”

혜정이 말했다. 소희는 시선을 반대로 돌려 선반을 바라봤다. 선반 위에는 누가 그렸는지 모를 유화 같은 것이 액자로 놓여있었다. 꽃? 태양? 뭐가 그려져 있는지 골몰하는 동안, 혜정은 소희의 목 더 깊숙한 곳에 얼굴을 밀어 넣었다. 소희의 뒷머리와 목덜미 사이에는 손가락 한두 마디쯤 되는 솜털이 소용돌이 모양으로 나있었다. 이곳에 입을 맞추고 혀로 핥는 것이 혜정의 오락거리였다. 소희의 몸이 목덜미를 중심으로 파르르 떨렸다.

“……아니야, 그냥 좀 참고, 좀 이따 나가서 같이 먹든가 하자”

“그래, 그럼”

혜정은 말하자마자 머리를 아래로 집어넣었다. 한 손으로는 소희의 오른쪽 가슴을, 나머지 손으로는 허벅지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소희의 배꼽 위를 혀로 쓸어 올렸다. 목 깊숙한 곳에서 미약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혜정이 볼륨을 키우려고 하던 찰나, 선반 아래쪽에서 전화벨소리가 울렸다.

“아! 잠깐만……”

소희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의 근원으로 향했다. 혜정은 일순간 깨진 분위기가 아쉬웠지만, 바쁘게 뛰어나가는 소희의 뒷모습이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여보세요? 이 시간에 웬 전화에요?”

소희가 가방에서 전화를 꺼내 받았다. 혜정은 잠자코 누워서 바라봤다.

“응, 응, 밥은 아직 안 먹었어요, 나가서 친구랑 같이 먹을 거야”

소희는 한 손으로 전화를 받으면서, 나머지 손을 가방에 집어넣고 뭔가 찾는 모양이었다. 그 가방은 검은색 가죽으로 돼있었고, 작은 노트북이 들어갈 법한 크기에 촌스런 바둑판무늬를 하고 있었다. 소희가 손을 빼내자 가방의 덮개가 도로 닫혔다. 두 개의 C가 좌우를 바라보며 겹쳐진 금색 로고가 보였다.

“일본에 있던 거 아니었어요? 다음 주 월요일에 돌아온다며…… 아, 아아……”

소희가 꺼낸 건 립스틱이었다. 알파벳 와이, 에스, 엘이 새겨진 그 분홍색 립스틱은 혜정이 싫어하는 물건이었다. 소희는 허리를 굽히고, 거울을 보면서 입술을 분홍색으로 칠했다.

“그래요! 어차피 오늘은 할 일도 없고. 저녁? 아, 와인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 물론이죠. 응, 응, 나도 사랑해요……”

통화시간은 십 분 정도였다. 혜정은 손동작으로 통화가 끝났는지 물었다. 소희가 오케이사인을 보내자 비로소 한숨을 쉬었다.

“그 사람은 왜 주말 대낮부터 전화를 한대?”

“주말 대낮이니까 하는 거지”

소희가 속옷을 입으면서 대답했다. 혜정도 몸을 일으켰다.

“자기야”

혜정이 말했다.

“싫어”

소희가 딱 잘라 대답했다.

“내가 무슨 말 할 줄 알고?”

혜정은 황당하다는 듯이 물었다. 소희는 침대에 걸터앉아 팬티스타킹을 신어 올렸다.

“그만하라고 할 거잖아. 이런 거”

소희가 발끝을 매만지면서 말했다. 혜정은 눈도 마주치지 않는 소희에게 미운 마음이 들었다.

“그 사람은 네가 이러는 거 알아?”

혜정이 소희 앞으로 다가가 앉으며 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지 않는 소희에게 눈을 맞춰보려 안간힘을 썼다.

“바이라고는 말해놨어”

소희가 왼쪽으로 시선을 확 꺾으며 말했다. 이내 옷 찾는 시늉을 했지만 옷은 반대 방향에 있었다.

“그걸로 돼? 그 사람은 괜찮대?”

“괜찮을 걸? 아니, 아마 신경도 안 쓸 거야. 원래 가진 게 많은 사람이거든”

소희는 중얼거리듯이 대답했다. 그럼에도 혜정은 똑똑히 들었다.

“……넌 괜찮아?”

“안 괜찮을 게 뭐 있어? 오히려 즐거운 걸”

“……”

혜정은 마땅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괜찮다는 사람을 더러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사실은 괜찮지 않을지도 몰라. 그러나 소희가 고개를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혜정은 소희의 표정이 정말 괜찮다고 말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소희와 혜정은 정오가 넘은 시간에 체크아웃 했다. 그리고 호텔 맞은편의 레스토랑에서 점심 특선을 함께 먹었다. 혜정은 스테이크로 나온 고기가 질기다고 생각했지만, 아랑곳 않고 먹는 소희의 모습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소희는 계산을 끝내고, 혜정에게 레스토랑 앞에서 기다리라고 하곤, 근처에 있던 스타벅스로 가서 커피를 두 잔 사왔다. 혜정이 무지방라떼를 홀짝이는 동안, 소희는 커피를 낮은 담벼락 위에 올려놓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주황으로 융해되는 담배, 소희의 코와 입으로 회색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겨울을 앞둔 하늘은 너무 푸르렀고, 혜정은 연기가 모여 먹구름이 된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