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묵돌 May 08. 2020

습작

백쉰여섯번째


 “생각해보면 간단한 문제입니다” 남자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사지가 멀쩡한, 아주 건강한 몸을 가진 청년이에요. 가슴 안에는 뜨거운 열정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고, 눈빛에는 무엇이든 해내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져요”


 “……그렇습니까?” 나는 다소 쭈뼛거리는 태도로 되물었다.


 “그럼요. 모름지기 젊음이라는 건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에요.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순식간에 낡은 인간이 되고 맙니다.”


 “당신은 낡지 않았나요?”


 “저도 조금은 낡았죠. 그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저는 저 자신을 꽤 잘 다듬어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시간이 지나서 낡아가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이지만, 공들여 손질하면 최대한 천천히 낡아가는 건 가능하니까요” 남자는 말하는 도중에도 연방 구두를 까딱거렸다.


 “멋진 말이네요. 저도 그렇게 되고 싶어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정확히 그거에요. 아니, 당신은 저보다 더 대단하고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어요. 젊은이의 앞에는 무한하게 뻗은 하나의 길이 있고, 그 길을 따라 쭉 걸어가면 무엇이든 될 수 있어요. 능력 있는 직원, 매력적인 배우자, 모범적인 부모, 편안하고 안락한 노후까지요. 그 모든 것이 일을 시작함으로써 있는 겁니다. 집에서 허송세월이나 하며 사는 게 아니라요”


 “저도 놀고 싶어서 노는 것은 아니에요” 조금 비겁한 답변이었다. 다행히도 난 그런 자신의 비겁함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참이었다. 정말로 다행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랬다. 


 “당신과 저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글쎄요. 타고난 능력?”


 “아, 전혀 아니에요. 저는 노력형이거든요. 타고난 재능은 오히려 요즘 친구들에게 많죠. 하나같이 공부도 잘하고, 영어도 잘하고, 대학 졸업장도 있으니까요. 제가 무슨 특별한 능력을 타고났다, 그런 생각은 한 적이 없어요”


 남자는 정말이지 스스럼없는 표정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의 태도는 권위적이었지만, 정작 자신은 그런 권위를 인정하지도 않거니와 도리어 혐오하는 사람인 것처럼 행세했다. 낡았다거나 늙었다거나 또는 썩었다는 말에 격앙된 반응을 보이는가하면 본인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은근슬쩍 나와 비슷한 세대인척,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의 편인 척 했다. 애매하게 늙은 어른들은 종종 이런 실수를 한다. 우리보다 인생경험이 많지만 늙었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은 아니고, 우리만큼 젊기는 해도 어설프진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젊어서 얻는 열정과 늙어서 가지게 되는 지혜 가운데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는다.


 “……저는 당신 나이 때부터 기회를 잡는데 주저하지 않았다고요. 무슨 말인지 압니까? 참, 노력하라는 말을 요즘 친구들은 싫어한다고요. 그래서 노력하라는 말은 웬만하면 안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남자는 이쯤해서 다리를 꼬고 앉았다. 자연스레 발목을 붙잡는 손길에 웃옷소매가 슬그머니 젖혔다. 아주 비싸 보이는 손목시계가 금속성의 광택을 뿜고는 사라졌다. “적어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시도’는 해봐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앞에 있는 어떤 길목만 넘어가면 되는 거라고요. 아주 잠깐의 용기만 내면 됩니다. 도전하고 또 도전하라고요. 그 정도는 노력할 수 있잖아요? 아니에요?”


 “네, 아니에요” 나는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온 대답에 한 번, 그런 소름끼치는 반항을 저질러버렸다는 사실에 두 번, 결국 평소에도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는 자각에 세 번 놀랐다.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저는 못해요. 나갈 수 없어요. 앞으로 갈 수 없어요”


 “진짜 어이가 없네요.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서,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것들을 거저 얻으려드는 모습이……” 남자는 가증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그런 게 아니라고요. 노력하지 않는 게 아니에요”


 “노력하는데 왜 앞으로 나가지 못하나요?”


 “지금으로선 제자리뛰기 밖에 할 수 없어요”


 “왜요?”


 “왜냐하면” 내가 처연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이 쭉 거기 앉아있으니까요”


 “……” 남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우리는 그의 그림자를 쳐다보면서, 어쩜 불쾌한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을까 추측이나 할 뿐이었다.           



 <친절한 문지기>, 2020. 5     




< 그림자 >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



 'Reinette' 님이 값을 미리 치러 주신 덕분에 이 글과 그림을 작업하고 공개할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좋은 그림이 걸린 방에는 방향제가 필요없다고 합니다. 이번 기회에 작업도 후원하고, 당신만의 공간에 멋진 그림도 한 점 걸어두세요.  


아래 링크에서 다음 작업을 미리 후원해주시면, 이 작업을 더 오랫동안 지속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 2018년 ~ 2019년에 쓴 약 일흔 편의 작업물 및 미공개본을 묶은 첫 단편소설집, 「시간과 장의사」가 출간되었습니다. 표지에 고양이가 그려져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습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