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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May 01. 2020

습작

백쉰다섯번째

 비오는 날을 좋아하는 것과 비오는 날 바깥에 나가길 좋아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비오는 날을 좋아했지만, 비가 오는 날씨 그 자체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비가 내림으로써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들을 사랑했다.

 

 가령 비가 내리는 아침의 음울한 햇발, 이불 속으로 기분 좋게 스며드는 습한 한기라든가, 살짝 열린 문틈으로 풍겨오는 물비린내, 방안에 불도 켜지 않은 채 내린 커피, 창문으로 후두두 떨어져 부딪히는 빗물을 감상하는 것이며 건물 모서리마다 방울방울 맺혀 떨어지는 물기와 새카만 자동차용 도로에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쳐 반사돼오는 모습,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은 물 분자들이 주변의 광원을 한 모금씩 삼키고 도로 뱉어내는 광경 같은 것들을 나는 사랑했다. 


 “엄밀히 말해, 그건 ‘비 오는날’을 좋아하는 게 아닌 거지” 곰곰이 듣고 있던 네가 대답했다. 그 말에 발끈한 나는 비오는 날의 일부만 사랑하는 것이 잘못이냐며 따지고 들었다. 


 그러자 너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이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잘못은 아니야. 잘못은 아닌데. 그런 걸 가지고 ‘나는 비오는 날을 좋아하는 사람이야’하고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건, 적어도 스스로에게는 아주 큰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지”


“좀 알기 쉽게 말하면 안 되는 거야?” 내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그러니까, 비를 좋아한다고 말하려면, 추적추적하게 내리는 가랑비나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소나기까지 모두를 좋아해야 한다는 거야. 그렇게 돼서 비를 왕창 맞게 되는 것까지, 모두”


“아, 난 그런 건 싫어. 낭만적이지도 않고, 옷도 몸도 젖어서 불편하기만 해”


 “그러니까” 네가 우산 한 쪽으로 고개를 쏙 빼며 말했다. “네가 치즈를 좋아한다고 해서 ‘난 피자까지 좋아한다’고 말할 순 없어. 거기 들어가는 토마토 소스를 싫어하면 더더욱 그렇지”


 “그 정도까지 말할 일인가, 이게?” 


 “나한테는 중요한 문제야”


 “가끔 너는 너무 진지해서 싫어” 나는 반쯤 답답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래?”


 “그래”


 “그래도 가끔이잖아. 그 정도는 내 일부로 받아들여주면 좋겠는데”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야”


 “좀 너무한데”


 “너무하기는? 오히려 네가 너무한 거 아니야? 너한테 내가 싫어하는 부분이 있으면, 그걸 좀 고쳐보도록 노력해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진심으로 날 사랑하면 그렇게 생각이 들어야지”


 “음”


 “아냐? 내 말 틀렸어?” 


 “아니. 그래, 네 말이 맞아.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네. 미안해” 네가 무척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마터면 비 내리는 소리에 파묻혀 듣지 못할 뻔 했다. “내가 노력해볼게. 가끔씩이라도 진지해지지 않도록……”


 “그래. 알았어. 됐으니까 얼른 가자. 영화 앞부분 놓치는 거 너무 싫어” 내가 말했다.


 다행히 우리는 제 시간에 도착해 스크린 앞에 앉았다. 다만 기대와 달리 영화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예매한 돈이 아까워 두 눈 부릅뜨고 끝까지 관람하기는 했지만. 터무니없는 결말과 함께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쯤엔 그 일련의 노력마저 후회스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영화에 대한 실망감, 좀체 비가 잦아들지 않는 그 날의 날씨며 뒷좌석에 앉은 아저씨 한 명이 잊을만하면 신발로 의자를 건드렸던 일 따위로 인해 무척 화가 나있었고, 마침 의자에 드러눕다시피 하고 잠들어있던 네 모습이 눈에 띄었다. 


 최악의 하루는 비로소 프롤로그를 끝낸 참이었다. 넌 우산도 없이 영화관 건물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사이 바깥에는 거세진 빗줄기와 함께 강한 바람이 불었다. 그래서 네가 그만큼이나 멀리 떠나버릴 줄은 미처 몰랐다. 더구나 그 때 내 손엔 네가 맡겨둔 접이식 우산이 들려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쫓아가는 시늉조차 못했는데, 이유는 그저 입고 있던 원피스가 젖거나 더러워지는 게 싫어서였다. 


 하여튼 요즘도 비가 오는 날이면 그 날 네가 했던 말들이 하나둘 떠오르곤 한다. 어쩌다 한 번쯤 마주쳤을 땐 꼭 물어보고 싶은 것도 생겼다. 


 ―그래, 아직도 비오는 날을 좋아하니? 나는 최근 들어 알았어. 내가 비를 참 싫어한다는 걸.     



 <rain drop>, 2020. 5          




<rain drop>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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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 2019년에 쓴 약 일흔 편의 작업물 및 미공개본을 묶은 첫 단편소설집, 「시간과 장의사」가 출간되었습니다. 표지에 고양이가 그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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