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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May 30. 2020

습작

백예순번째

 아침조례와 함께 짧은 자습시간이 끝났을 무렵이었다. 그즈음의 교실에는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시끄러우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주는, 그런 이상야릇한 느낌의 평화가 흐르곤 했다. 담임이 교실 앞문으로 빠져나가는 소리, 누군가 가방지퍼를 당겨 여는 소리와 먼 뒷자리에서 들려오는 코골이 소리, 조심스레 화장실로 향하는 학생들의 사부작대는 소리와, 여전히 문제풀이에 골몰하고 있는 아이들이 내는 볼펜 소리에 이르기까지. 쓸데없어 보이는 소리들이 하나둘 짝을 이루더니 이윽고 교묘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미정은 공부를 좋아해서 열심히 하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그런 일상적인 평온함 속에서 제 할 일을 이어가는 것에는 제법 보람을 느꼈다. 수능을 앞둔 고삼 수험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그 답답한 교실에서 딱 한 가지 사회에 갖고 나가고 싶은 게 있다면 바로 그런 종류의 평화라 할 수 있었다. 분명히 그랬다.


 “너, 아침에 먹는 사과가 금사과란다” 채영은 어느 순간 미정이 앉은 자리 옆구리에 붙어 서있었고, 꼭 대본을 읽을 때나 나오는 억양으로 말을 건넸다. 이쑤시개에 꽂힌 사과 한 쪽이 미정의 눈앞에 아른거리듯이 날아다녔다. 


 “난 아침 챙겨먹고 왔거든. 너나 먹어” 미정은 아주 귀찮다는 태도로 손사래를 쳤다. 모름지기 평화란 길지 않고, 길지 않아서 소중하다는 격언이 떠올라 기분이 복잡스러웠다. 


 “아니, 진짜 몸에 좋은 건데…… 우리 미정이가 싫으면 어쩔 수 없지. 나 혼자 다 먹어야겠다. 응? 너무 슬프지만 그럴 수밖에 없어. 미정이가 싫다니까……”


 “……아!” 미정이 보고 있던 교과서를 팍 젖혔다. 책이 얼마나 세게 덮혔는지 한바탕 작은 바람이 일어 채영의 앞머리가 들썩했다.“야. 내가 사과 싫어한다고 말했잖아. 몇 번을 말해?”


 “몇 번은 아니고 몇 십 번 쯤은 말했지” 채영은 능청스럽게 어깨를 들썩거리며 대답했다. 


 “그런데 왜 자꾸 난리냐고. 염병할 다이어트는 너 혼자 하라니까. 가만히 공부하고 있던 사람 방해하지 말고”


 “무슨 소리야? 나는 다이어트로 먹는 게 아니라, 정말 사과가 맛있어서 먹는 거라니까. 솔직히 이렇게 맛있는 걸 네가 왜 안 먹는지 이해가 안 돼”


 “싫은데 이유 같은 게 어딨어? 그냥 싫은 거지”


 “사과한테 너무하다고 생각은 안 해?”


 “안 해” 미정이 딱 잘라 말했다. 


 “정말 너무하네. 사과의 맛있음을 모르는 미정이가 불쌍해” 채영은 자그마한 락앤락 통에서 사과 하나를 더 꺼내 집었다. “하지만 난 포기 안 해. 어떻게든 너한테 사과를 먹이고 말 거야. 그게 이번 학기의 내 목표니까”

 “넌 완전히 돌았어. 수험생활의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일까?”


 “네가 그렇게 말할 때가 난 너무 좋아, 미정아. 그럼 왠지 더 오기가 생기거든……” 채영이 사과를 으적으적 씹어 먹으며 말끝을 흐렸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며, 무언가 음흉한 일을 꾸미고 있는듯한 눈빛이 오싹했다. 


 “채영아, 너 진짜 미친 사람 같아”


 “응. 고마워”


 “농담이 아니라”


 “그래서 고마운 건데”


 “그만 좀 해”


 “알았어” 채영이 말했다. 미정은 몇 초간 채영의 거동을 지켜보다가, 비로소 안심한 듯 읽고 있던 교과서를 도로 펼쳤다. 


 그러나 그 짧은 사이 교실은 새삼스레 시끄러워져 있었다. 미정이 사랑했던 그 순간의 평화가 채영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증발해버린 것이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상실감에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 마른 세수를 몇 번 했다.


 “야” 얼굴을 감싼 미정의 목소리였다. 다소 먹먹한 것이 어디 좁은 창고에서 몰래 이야기하는 느낌이었다. “요즘 사과 엄청 비싸지 않아? 내가 알기론 그런데”


 “비싸? 음, 그러고 보니까 좀 비싼 것 같긴 하던데. 매번 엄마가 사오는 거라서 난 잘 모르지만. 요즘 과일 값이 전반적으로 다 올랐다더라고. 태풍이 불어서 그런가?” 채영은 뜻밖의 질문에 노상 쭈뼛거리며 말했다. 


 “어, 태풍 때문에…… 말 그대로 금사과지. 아침이든 저녁이든 똑같은 금사과인 거야” 


 “사과 싫어한다더니. 비싸진 건 어떻게 알고 있어?”


 “뉴스에 자주 나와. 사과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랐다고. 그렇게 흔해빠진 과일을 왜 못 먹어서 안달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미정은 이제 겨우 얼굴에서 손을 떼고 안경을 도로 썼다.


 “흔하다고 해서 가치가 줄어드는 건 아니지. 사과는 항상 사과야. 기본적으로 맛있는 과일이니까. 영양가도 있고”


 “그건 그렇지”


 “그러니까 한 입 어때?” 채영이 마지막 사과 한 쪽을 꽂아 내밀었다.


 “싫어” 미정이 말했다. 


 “아니, 그러지 말고 한 입만 먹어보라니까? 아침사과가 금사과라고”


 “아, 나 엄마한테 전화를 해야 해서”


 “아, 뭐야. 수업 시작까지 오 분도 안 남았는데?” 


 “진짜야” 미정은 휴대폰 화면을 들어 ‘엄마’라고 적힌 발신자 정보를 채영에게 보여준 다음, 복도 바깥쪽에 있는 건물 외벽에 기대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무척 길었다. 기다리는 동안 미정은 태풍이 지나간 교정을 눈으로 훑었다. 보도 곳곳에 웅덩이가 패여 빗물이 고여 있었다. 그 뒤에는 야트막한 언덕이 비에 젖어 휘늘어졌고, 그 위쪽으론 새벽잠 자러가는 기숙사 건물 두 채가 비딱하게 균형을 맞추고 솟아 있었다.


 “미정이니?” 엄마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부터 뚫고 들어왔다. 몇 백 키로나 떨어져 힘을 썼는지 무척 지친 듯한 기색이었다. 사람인지 목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유, 공부하느라 바쁠 텐데 왜 아침댓바람부터 전화를 걸고 그래…… 밥은 잘 챙겨먹지? 잠 못 자는 건 좀 나아졌고?”


 “응. 난 괜찮아, 엄마. 성적도 유지하면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고” 미정은 어렴풋이 망설이는 투였다. “엄마는 괜찮아? 집은……”


 “집이야 뭐, 고치면 그만이지만. 너희 아빠랑 나는 과수원이 더 걱정이다. 가뜩이나 경기도 안 좋은데 고놈의 태풍이 바람이 얼마나 억세던지! 작은 것들은 뿌리까지 뽑혀나갔어, 얘. 그래도 그 와중에 버티고 달려있는 것들이 있어서 그것들이라도 따고 있고 그래. 너도 알다시피 이게 사과는 약간만 멍이 들고 생채기가 나도 도매로 안 나가잖니? 그렇다고 버리기는 아깝고 그래서 우리도 매일 아침마다 사과 파티야, 파티. 썩을 놈의 태풍 때문에 먹을 복이 아주 터져버렸어. 사과 먹을 복이…… 호호!”


 “……그랬구나. 그럼 나도 한 광주리 싸서 보내줘. 기숙사 애들이랑 나눠먹어도 좋을 것 같고”


 “어이구, 그렇게 보내준다고 했을 땐 안 받는다고 하더니. 사과 질린 게 이제는 좀 나아졌어?”


 “그런가봐. 하도 안 먹은 지 오래 돼서. 보내주기 힘들면 안 보내도 돼”


 “그럴 줄 알고 이미 준비해놨다. 오늘 보낼 거야”


 “아, 그래?”


 “그럼. 준비해놨고말고” 엄마는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말투였다. 분명히 힘들어하고 있을 텐데. 미정은 물론이거니와, 미정이 알고 있는 그 누구보다 힘든 상황일 텐데. 금방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철딱서니 없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정은 그런 엄마가 철이 없게 느껴져서, 그게 아니면 여전히 자신을 세상물정 모르는 갓난애로 취급하는 것 같아서, 불쑥 부아가 솟아 전화를 끊었다. 몇 번이고 엄마가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날따라 미정은 좀체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맨 앞에 앉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태도, 때문에 담임교사에게 불려가 한 소리 얻어듣기까지 했다. 


“많이 힘들겠지만, 지금부터가 중요해. 백 일쯤 남았을 때 좀 더 힘을 내서 끝까지 가야하는 거야. 지쳐도 포기하지 말고 계속 버텨. 미정이는 그동안 잘 해왔으니까. 선생님은 널 믿는다”


 “네. 선생님” 미정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 날은 열람실에서 새벽까지 자습을 하다 잠이 들었다.


 “미정아, 미정아!” 아침 댓바람부터 채영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미정아. 여기서 자고 있으면 어떡해? 기숙사에 너 택배 받아가라던데”


 “아, 음. 그래?” 미정은 거의 시체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깨어났다. 입가에 묻은 침은 교복소매로 닦아올렸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가능하면 지금 갖고 가래. 엄청 크고 무거운 거던데”


 “뭐? 그게 뭐지?”


 미정은 채영과 함께 기숙사 경비실로 향했다. 바깥은 해가 미처 뜨지도 않은 아침이었는데, 공기며 바람이 몹시 산뜻해 기분이 좋았다. 생각해보니 태풍이 다 지나간 뒤로는 줄곧 그런 바람만 분 것 같았다. 꿈도 한 번 안 꾸고 그렇게 깊이 잠든 것도 오랜만이었다. 이제는 어쩐지 좋은 일만 생길 것 같은, 그런 막연한 희망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용솟음 치려던 찰나…… 문득 전날의 기억이 되돌아왔다.


‘……맞다, 나 사과 받기로 했었지. 얘한테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사과 싫어한다고 그렇게 말했었는데’

 하지만 그런 노파심과는 달리, 채영은 별 일 아니라는 듯 대답해왔다.


 “아니, 부모님이 과수원 한다는 얘긴 왜 안 했어? 그럼 사과 싫어하는 게 당연한 거 아냐? 진작 말했으면 그렇게 안 괴롭혔지. 가족 문제인데”


 “그냥 설명하기 귀찮았어. 딱히 해야 할 이유도 없고” 미정은 채영과 함께 택배로 온 사과박스를 책상 위로 옮겨놓았다. 


 “그건 좀 서운한데. 우리 친구 아니야?”


 “아, 누가 그래?”


 “이거 뜯어봐도 돼? 나 하나만 주라. 미정이 부모님 사과는 어떤 맛인지 궁금해서”


 “맘대로 해. 네가 다 먹든 말든” 


 “정말이지? 나중에 딴 말하지마”채영이 커터칼로 박스 양쪽에 붙어있던 테이프를 잘라 뜯었다. 박스 윗부분이 활짝 열리기 무섭게 짙은 사과향이 비바람냄새와 섞여와 코를 때렸다. “어, 근데 이게 뭐야. 쪽지 같은 건가?”

 “뭐, 잘 먹으라고 썼겠지. 그냥 보내긴 좀 그러니까” 미정은 팔짱을 끼고 서서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채영은 빨간 사과들 사이에 꽂혀있던 종이를 쑥 내밀며 말했다. “내 생각에 이건 니가 읽어야할 것 같아”


 “뭔데 그래”


 “읽어봐”


 미정은 별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채영이 내민 쪽지를 멋쩍게 받아들어 읽기 시작했다.      

 ‘―그 태풍 속에서도 흠집 하나 없이 버틴 사과들이야. 다 모으니까 딱 한 상자만큼 나왔음. 반은 혼자 먹고 나머지 반은 친구들과 나눠먹길 바람.  - 늘 미정이를 사랑하는 엄마아빠가’     


 미정은 한동안 말이 없었고, 채영은 그런 미정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쪽지의 내용을 읽고 말을 꺼냈다.


 “와우. 너 부모님 정말 대단하시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하셨대?”


 “……” 


 “어. 미정아. 왜 그래?”


 “……”


 “너 설마 울어? 우는 거야? 응? 어디 봐봐!”


 “닥쳐” 미정은 반대쪽으로 몸을 굽히고 아주 조금 울먹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 옷소매로 눈가를 훔쳐 닦았는데, 좀 전에 닦았던 침이 얼굴에 엉겨 붙었다. 그래서 언뜻 봤을 땐 그 몇 초 사이 눈물콧물로 범벅이 된 사람처럼 보였다. 


 “이야, 미정이 이런 모습 오랜만인데. 일학년 때 이후론 정말 처음 같아”


 “닥치라니까”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채영의 다정한 손길이 머리를 감쌌다. “아침에 먹는 사과가 금사과라니까……”     




 

<Apple of my eye>, 2020. 5        




<덜 익은 사과>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댕걸이' 님이 값을 미리 치러 주신 덕분에 이 글과 그림을 작업하고 공개할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좋은 그림이 걸린 방에는 방향제가 필요없다고 합니다. 이번 기회에 작업도 후원하고, 당신만의 공간에 멋진 그림도 한 점 걸어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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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 2019년에 쓴 약 일흔 편의 작업물 및 미공개본을 묶은 첫 단편소설집, 「시간과 장의사」가 출간되었습니다. 표지에 고양이가 그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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