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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May 22. 2020

습작

백쉰아홉번째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당시 나는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할머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덕분에 다섯 살 때부터 세례를 받고 성당을 다녔다. 밥을 먹기 전에는 늘 성호를 긋고 식전기도를 한 다음 숟가락을 들어야 했는데, 그보다 훨씬 길었던 미사 전 기도문이나 묵주기도 따위를 달달 외우고 다녔던 걸 보면 그 시절의 나는 지금처럼 머리가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기껏해야 예닐곱 살에 불과하던 어린 아이에게 진정어린 신앙심이 있었다고 말할 순 없다. 다만 그때의 나는 분명 만족하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적어도 그 땐 불행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대다수의 어린이들은 불행이란 개념을 이해하기에 너무 어린 측면이 있다.


 하여간 나는 주말에 성당 가는 일을 좋아했던 것 같다. 어른들 앞에서 성경 구절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외워낼 때면, 쏟아지는 칭찬은 말할 것도 없고 ‘어린 것이 아주 똘똘하고 기특해 죽겠다’면서 용돈을 건네는 어르신도 있었다. 쓰다듬는 손, 할머니의 흡족해 보이는 표정, 꽁돈으로 즐기는 오락 한두 판, 백 원짜리 아이스크림까지. 늘 새롭진 않아도 싫어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심지어 뭇 신자들도 잘 모르는 십계명마저 달달 읊는 수준이 되자 나는 세상일이 무척 쉽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하늘에 붕붕 떠다니는 어떤 전지전능한 존재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들이란 게 고작 ‘거짓말 하지 않기’나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기’같은 거라니. 어른들은 왜 이리도 쉬운 것들조차 못 지키고 살까? 왜 쓸데없이 죄 같은 걸 지어서 매주 고해성사실 앞에 서서 서성거리는 걸까? 알면 알수록 당최 이해가 안 되는 일들 투성이였다. 그야 나이를 먹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우리 강아지가 드디어 초등학교엘 다 들어가는구나” 입학식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할머니는 특유의 이북식 억양이 섞여든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너희 엄마도 내가 입학식에 같이 가주고 그랬더니만…… 우리 손자는 엄마보다 잘 할 거야. 잘 할 거지? 응?”


 “응. 잘 할 거야” 나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발음해 대답했다. 어떤 아이들은 어른들의 의미심장한 질문에 ‘일부러’ 아이 같은 말투로 답변한다. 말을 그렇게 밖에 못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하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뭇 어른들이 자신을 여전한 어린 아이로, 자신의 일방적인 보호와 사랑이 절실한 존재로 여기게 만든다.


 한편 할머니는 첫 등교일이 하루하루 가까워갈수록 안색이 안 좋아지셨다. 바로 전날 밤 쯤에는 시름시름 앓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때의 나는 잘 몰랐지만 할머니로서는 무척 심경이 복잡한 시기였다. 큰 삼촌과 작은 삼촌 그리고 엄마의 사례를 거쳐 오면서, 자신의 핏줄을 학교에 건너보낸다는 게 어느 정도의 실패 가능성을, 또 얼마만큼의 존재적 거리를 자아내는지 미뤄 짐작하고 계셨을는지 모른다. 


 난 그런 할머니를 안심시킬 필요를 느꼈다. 그야 나보다 열 배 오랜 세월을 살아온 노인의 마음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하루아침에 마음을 바꿔 “빈아, 너는 학교에 가지 말아라”하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럴 땐 기특한 손주아들을 연기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었고, 거기엔 할머니가 매일 달고 다니다시피 하는 성경 얘기도 빼놓을 수 없었다. 


 “할머니. 너무 걱정 하지 마. 나는 잘 할 수 있어. 왜냐하면 할머니가 맨날 기도해주잖아. 학교 가서도 친구들이랑 잘 지낼 수 있게 예수님이 도와주실 거에요. 응? 할머니도 그랬잖아. 예수님은 누구보다 베드로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걱정하신 거라고. 할머니가 걱정해주고 기도해주는 만큼 난 잘할 수 있어. 그러니까 잘 하고 올게. 믿어줘”


 “……아이구, 우리 새끼. 우리 귀여운 내 새끼” 할머니는 못내 감정이 복받쳐 오른 모습으로 날 껴안아왔다. “너희 엄마한테 어떻게 이런 애가 나왔을꼬. 그래, 빈이는 잘 할 수 있지. 누구 손주인데. 누가 걱정해주는데…… 그래, 오늘은 일찍 자자. 내일 첫 날부터 학교에 지각하면 안 되니까”


 “네!”내가 말했다.


 그렇게 이튿날 해가 밝았다. 나는 자그마한 책가방을 등에 걸머지고 등굣길을 나섰다.


 누구나 첫 등교 일에는 긴장을 하기 마련이다. 다만 당시의 나는 성당에서처럼 뛰어난 아이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과 기대감에 휩싸여서, 그 이외의 어떤 부정적인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그렇게 처음 들어선 초등학교 교실. 내 또래인 아이들이 수십 명씩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게는 다들 낯선 얼굴들이었는데, 그 중 몇 명은 같은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다녔던 모양으로 벌써부터 잡담이며 장난을 주고받고 있었다. 나는 교실 맨 앞쪽 좌석에 책가방을 내려놓은 다음, 잡아 뺀 의자에 천천히 엉덩이를 붙여 앉았다. 


 교실의 소란은 한동안 계단식으로 커져가다가, 선생님처럼 보이는 사람이 앞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움푹 잦아들었다. 내 첫 담임 선생님은 적당히 깔끔한 옷차림의 중년 여성이었다. 할머니보다 훨씬 젊었지만 엄마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숙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교사는 교탁에 학생들의 명부며 간략한 신상정보가 적힌 서류들을 툭 내려놓았다. 그리고 얼마간 아무 말도 없이, 긴장감 어린 자세로 앉아있던 사십 명의 학생들을 눈으로 쓱 훑고서, 느닷없이 분필을 집어 들곤 칠판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쓱쓱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건대 그런 순간이야말로 초등학교 1학년 담임을 맡은 교사들의 가장 큰 보람이자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와 짧게는 구 년, 길게는 십이 년에서 이십 년 가까이 지루한 학업을 이어가야할 아이들을 목전에 두고, 바야흐로 최초의 침묵을 몇 분 즐기는 것 말이다. 


 담임교사는 짧게 자기소개를 했다. 그러고 나서 학생들 개개인에게 이름 순서에 따른 번호를 매겨주고, 어디론가 전학을 가지 않는 이상 적어도 일 년 동안은 그 번호가 우리들의 이름을 대신하리라고 말했다. 내가 받은 번호는 이십일 번이었는데, 맨앞에서 세는 것 보다 뒤에서 세는 것이 두세 사람 정도 더 빠른 번호였다.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다는 점에서 적당한 수준의 순번이었지만, 어중간한 것을 안정적이라 느낄 수 있기까지는 좀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일찌감치 무뚝뚝해 보이는 담임 선생님이며 저들끼리 친해 보이는 학급 친구들에게 눈도장을 찍고 싶어서 안달이 난 참이었다. 그래서 “그럼 1번부터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소개를 해보자”고 하는 교사의 말에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답답스러웠다. 그래도 당장은 기다리는 것밖엔 도리가 없었는데, 난 요즘도 그 때의 내가 그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교실을 뛰쳐나왔더라면 남은 인생이 어떤 식으로 변화했을 지를 상상해보곤 한다. 우연히 잡은 자리에 멍청한 얼굴을 하고 앉아서, 그저 내 차례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에.


 “안녕하세요. 저는 일학년 삼반 일번 강민수입니다. 저의 가족은 아빠, 엄마, 큰 누나랑 작은 누나, 바둑이랑 저입니다. 저희 가족은 학교 운동장 뒤쪽에 있는 궁전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와! 우리집도 궁전아파튼데!”


 “거기 조용히 해! 친구가 말하고 있는데 중간에 끼어들면 어떡하니?” 담임은 돌연 끼어드는 아이의 목소리를 제지하고 들었다. 그러나 발표 중간 중간에 아이들이 “오, 나도 저기 사는데”또는 “나도 저기 살아”, “우리 집에도 개 키워. 두 마리나 있어”, “우리 아빠도 의사선생님인데” 같은 말들이 오고가는 것까지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한편 나는 번호가 이십일 번에 가까워올수록 심장이 빠르게 뛰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건 예의 자신감이나 기대감으로부터 말미암은 흥분이 아니라, 오히려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오는 긴장이었다. 발표가 시작하고 열 명이 채 지나기도 전에 깨달아버린 것이다. 다른 아이들과 난 그저 같은 교실에 책상과 의자 하나씩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나 똑같을 뿐이지, 각자 살아가는 곳과 날 둘러싸고 있는 환경, 존경할만한 부모님의 유무, 매일 아침식사로 챙겨 먹는 음식, 심지어 등교 첫 날 가져온 책가방의 대략적인 가격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것에서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말았다. 


 머잖아 나는 다리를 파르르 떨면서, 어떻게 이 상황을 무사히 모면할 수 있을지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일찍이 내가 한 말이나 행동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서 변호해야 했다. 그런 건 난생 처음이었다. 왜 내가 나에 대해서 변명해야한단 말인가? 그 교실보다 좁은 단칸방에서 외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다는 것이나, 전날 저녁으로 먹었던 시래기 국을 그날 아침에도 먹고 왔다는 것, 엄마는 이렇다 할 직업도 없이 매일같이 술에 빠져 살다가 병원에 가 있고, 아빠와는 함께한 기억은 고사하고 뼛가루가 어느 먼 산에 뿌려져 묻혔는지조차 모른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 둘러대야 한 단 말인가? 


 죄책감이 돌연 온 몸을 감싸 돌았다. 등줄기를 따라 땀 몇 방울이 흘러 내렸고, 머릿속이 새하얘 몸을 일으키기도 힘이 들었다. 귀가 먹먹하고 현기증이 나는 가운데 마침내 이십일 번의 차례가 도래했다. 나는 꼭 어디가 아픈 아이처럼 비틀거리며 섰다. 같은 반 친구들은 아까와 달리 등받이에 편히 몸을 기댄 채, ‘쟨 어디서 누구와 사는 어떤 친구일까’하는 순수한 호기심을 만면에 띠고 날 쳐다보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일학년 삼 반 이십일 번……”


 같은 시대, 같은 세대의 다른 사람들보다 아주 약간 조숙하도록 태어난 사람들은, 그 작은 성숙의 대가치고 지나칠 정도로 잔인한 발명을 강요받는다. 발명이란 것이 그랬다. 누군가 한 번 시작해놓기만 하면, 나머지는 그 부산물에 업혀 비교적 쉽게 어른이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가 그 발명으로 인한 결과물들을 혐오하고 욕을 퍼붓게 되더라도. 상관없다. 사람들은 오늘 폭탄을 터트린 사람보다 어제 폭탄을 발명해낸 사람을 욕하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통찰력 있는 어른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가족으론 아빠, 엄마, 큰 형과 작은 누나, 회색 고양이인 든든이와, 마지막으로 제가 있습니다. 저희 가족은 다른 친구들처럼 저쪽 뒤의 궁전아파트에 살고 있고……” 나는 쭈뼛거리는 말투로 간신히 단어를 이어붙이고 있었다. “우와, 너도! 궁전아파트 사는구나?”하는 어느 뒷자리 남자 아이의 목소리, 그 옆쪽 끝에 앉아“몇 동 몇 호에 살아?”라고 물어오는 여자아이의 명랑한 얼굴, 그 너머로 담임교사가 내 뻔뻔한 증언과 서류에 있는 신상정보를 몇 번이고 교차해보며 당황해하는 모습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회사원이신데, 지금 먼 나라에 출장을 가계시고요. 엄마는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계세요. 저는 엄마아빠를 너무 사랑하고 존경해요. 나중에 꼭 친구들에게도 소개해주고 싶어요……”


 진실이라곤 없는 자기소개를 끝마치고, 휘청거리는 몸을 필사적으로 버텨가며 자리에 앉았다. 일곱 살의 나는 이제 막 거짓말을 발명해낸 참이었다. 반 아이들은 의심이라곤 하나도 없이, 기계 같은 동작으로 손뼉을 치다가 곧 이십이 번 아이의 자기소개에 귀를 기울였다.


 그 날 담임은 첫 교시가 끝나자마자 날 교무실로 불러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왜 친구들 앞에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는 묻지 않겠다. 그런데 어린 나이부터 그렇게 자신을 속이는 건 나쁜 행동이야. 알겠니? 나는 네가 진심으로 반성하길 바란다”


 “네. 선생님. 다시는 안 그럴게요”라고 대답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집에 돌아갈 때에는 다시 혼자였다. 할머니는 내가 집 현관으로 들어서길 내내 기다렸다는 듯, 신발 한 쪽을 다 벗기도 전에 “처음 가본 학교는 어땠니, 재밌었니?” 하고 물어왔다. 노인답지 않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그런 할머니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환하게 웃으며 모든 게 재미있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내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쓰다듬어주고, 갈비뼈가 패여 들어갈 정도로 세게 껴안아 주기도 했다. 어린 귓가에 안도의 한숨이 스쳐지나갔다.  그렇게 난 하루가 다 가기도 전에 총 세 번의 거짓말을 했다. 인생 처음 거짓말을 발명했던 그날에만 꼭 세 번이었다. 


  그 날 저녁, 할머니는 식사가 끝난 후 언제나처럼 짧은 기도와 함께 성경의 한 쪽 구절을 내게 읊어주셨다. 그건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죽음을 맞이하러 가던 예수님이 자신의 충직한 제자들과 이야기하는 장면이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러자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할머니는 그쯤해서 무언가 가득 찬 표정으로 성경책을 덮으시고, “아멘”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할머니를 따라 “……아멘”하고 말했다. 합장한 손이 저도 모르게 떨렸다. 정말이지 고해성사를 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거짓말의 발명>, 2020. 5          



< 고해성사 >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TAEHONG' 님이 값을 미리 치러 주신 덕분에 이 글과 그림을 작업하고 공개할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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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 2019년에 쓴 약 일흔 편의 작업물 및 미공개본을 묶은 첫 단편소설집, 「시간과 장의사」가 출간되었습니다. 표지에 고양이가 그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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