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쉰여덟번째
매일 우울해 죽어가는 내가
써주는 글 따위 읽지 않겠다던 네게
마지막으로 시집 한 권을 엮어 주었다
그래 가난한 내가 널 사랑해서
오늘도 바깥에는 비가 죽죽 내리는데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는 널 위해 말했다
언젠가 반드시 비극적이고 비극적인
미워하던 그들조차 못내 안타까울만큼
그런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이하겠다고
내가 주는 건 정확히 그 땔 위한 글이야
애초에 그 시가 어떻게 쓰여졌는 지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거든
그때 되면 내가 쓴 단어 하나 문장 한 줄
심지어 띄어 쓴 공간에까지 가격표가 붙겠고
넌 이튿날 묻어 뒀던 내 글 위의 먼지를 털어
누구에게 단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시집이라고
텅 빈 종이에 뭘 써도 상관없다는 점에서는
백지수표나 고흐의 그림처럼 될 수도 있어
그러자 몸서리를 치며 가지 말라던
사랑했던 네가 그렇게 죽어버리면
더 견딜 수 없이 슬플 거라던 네게
그래 나는 참 다행이라고 말해주었다
네가 나로 인해 슬프고 슬퍼할 만큼
더 많은 돈을 받게 될 것이므로
그만한 돈으로 살 수 없는 거라곤
차게 식은 밥과 되돌릴 수 없는 가난과
그토록 미워하던 나와의 추억뿐이겠지
<나와 나룻배와 흰 초승달>, 202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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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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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준' 님이 값을 미리 치러 주신 덕분에 이 글과 그림을 작업하고 공개할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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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 2019년에 쓴 약 일흔 편의 작업물 및 미공개본을 묶은 첫 단편소설집, 「시간과 장의사」가 출간되었습니다. 표지에 고양이가 그려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