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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Aug 25. 2020

습작

백일흔네번째

 남자는 “이럴 거면 차라리 헤어지든가!”라고 말했다. 그 말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쉽고, 간단명료했다. 최후통첩이라기에는 너무 길었고, 아랑곳없이 걸어가기에는 지나치게 짧았다. 


 “너는, 참 쉽게 말하는구나” 여자는 끝내 남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전에 없이 당당한 태도는 마주 선 남자의 화를 한층 돋울 지경이었다. “그런 말을 정말 쉽게 해. ‘이럴거면’, ‘차라리’, ‘헤어지자’거나 ‘그만하자’는 말……”


 “뭐? 나는 진심이야.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고”


 “그래. 진심이겠지. 진심이어야 할 거야”


 “방금 건 무슨 소린데?”


 “나는 네가 아니라서 네 마음을 모르지. 진심으로 나랑 있는 게 답답하고 힘들어서 헤어지자는 건지, 아니면, 그냥 그동안 쌓아온 관계를 인질삼아서 협박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몰라”


 “협박이라고?” 남자는 견딜 수 없이 불쾌해했다. “협박처럼 들려? 내가 없는 소리를 한다 이거지? 내가 못할 거 같아?”


 “다시 말하지만” 여자는 무미건조한 억양으로 말을 이었다. “협박인지 아닌지는 몰라. 나는 모르고, 그런 건 이제 아무 상관도 없어. 중요한 건 넌 네가 우리 관계에서 갑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는 거지. 넌 언제 헤어져도 아쉬울 게 없고, 관계를 이어가고 싶으면 내가 너한테 맞추는 게 당연하고…… 뭣보다 확신이 있지.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마지못해 네 말을 들어줄 거라는 걸 아는 거야…… 날 헤어지자고 해서 정말로 떠나버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그러는 사이에 넌 네 위치를 더 공고하게 하고, 나는 자존감을 깎아가면서 너한테 더 의지하게 됐어. 이렇게 별 볼 일 없는 인간마저 감지덕지하면서 살아야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고 속여야 했지”


 “별 볼 일 없는 인간이라고? 지금 나한테 별 볼 일 없는 인간이라고 했어? 너,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어? 그 말……” 남자의 얼굴이 상기된 채 잔뜩 일그러졌다. 


 “아니!” 여자는 남자의 말허리를 끊고 소리쳤다.


 “뭐? 넌 그럼 지금 책임질 수도 없는 말을……”


 “왜? 왜냐면, 난 이미 오랫동안 책임져왔어. 쉽게 말하는 너 때문에, 한 마디 말에도 몇 번이고 생각을 하면서 참고 견뎠어. 그러니까 난 이제 책임질 필요가 없어…… 이제 책임져야하는 건 너지. 넌 어떻게든 책임을 질 수밖에 없을 거야. 함부로 했든, 함부로 하지 않았든, 너는 이 대화를 후회할 수밖에 없어. 그리고 난 이제 더 이상 말할 생각이 없고……”


 “야! 어디가?” 남자는 화들짝 놀란 기색을 간신히 눌러 앉히며 물었다. 


 “말 하고 싶지 않아. 잡지 마”


 “누가 잡는다고 그래? 나중에 후회하는 건 너야”


 “그래, 그럼” 여자는 몸을 돌려 그대로 멀어져갔다. “잘 있어”


 “……”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동안 쌓아놓은 자존심이며, 관계에 대한 확신과 오만이 너무 공고했던 것이다. 이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외통수였다.           



<넌 쉽게 말했지만>, 2020. 8     



< 넌 쉽게 말했지만>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류승걸' 님이 값을 미리 치러 주신 덕분에 이 글과 그림을 작업하고 공개할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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