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9일
11월 29일.
오전 열시 반쯤에 일어났다. 여덟 시쯤에 눈을 붙였으니 두 시간 반 정도 잠든 셈이다.
다시 일요일이 돌아왔다. 사회인야구팀에 연습경기가 예정돼 있었다. 갈지 말지 한참을 고민했다. 이런 와중에 공놀이라니. 집중은커녕 민폐나 안 끼치면 다행일 것이다. 잠에서 깨면 가고 못 깨면 못가는 거지, 하고 누웠는데 깨버렸으니 별 수 없이 유니폼을 차려입었다. 그래도 외출을 하고 몸을 움직이는 게 가만히 집에 처박혀있는 것보단 낫겠지.
차를 타러 내려가면서, 서연이가 “너는 경기 전날만 되면 잠을 못자. 긴장해서 그러는 거야?” 하고 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땐 ‘야구를 하루 이틀 한 것도 아니고 긴장할 게 뭐 있느냐’고 대꾸했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나는 그 말대로 긴장했던 것 같다. 이전의 결과가 좋든 나빴든 나는 긴장했다. 분명히 긴장한 게 맞는데, 누가 물어보면 전혀 떨리지 않는다는 듯 대답했었다. 인정하기 싫었다. 긴장한 티가 역력한 투수는 마운드에 올려주지도 않으니까. 적어도 겉으로는 그러지 않은 체 해야 한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사람조차 그런 흉내는 내보여야한다.
연습경기는 경기도 광명에서 치렀다. 나는 선발투수로 등판해서 세 이닝을 던지고 내려왔다. 결과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감독님이 오늘따라 공 던지는 폼이 이상하다고 말씀하셨다. 나도 왠지 그럴 것 같았다. 하기야 지난 한 주 동안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별 뜻 없이 “다음에는 더 잘 해볼 게요”라고 대답했다. 난 대체 뭘 더 잘 해보겠다는 걸까. 그게 뭐든지 기회가 남아있기는 할까.
지난주에 같이 식사하지 못한 친구에게 밥이나 먹자고 얘기했더니, 이번에는 그 쪽에서 여자친구 때문에 어렵겠다고 했다. 사람 일이라는 게 참 희한스럽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곧장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서는 씻고 글을 조금 썼다. 잠을 얼마 못 잤던 것 치고는 정신이 말똥한 편이었다. 닥치는 대로 쓰다가 메시지를 확인했다. 내가 운영하던 독서모임의 회원분이셨는데, 집이 가까우니 오늘 저녁에 맥주나 한 잔 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음, 내가 대화를 잘 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도 역이면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고, 요즘은 술집도 오래도록 하는 곳이 없다. 쾌히 가겠다고 답변했다.
나가기 전에 널어놓은 빨래를 걷었다. 서연이의 옷가지도 몇 벌 있었다. 옷걸이에 걸어 옷장 속에 걸어두었다. 입을 옷을 꽤 많이 가져갔는지, 전보다 옷장속이 널널해보였다. 입안이 씁쓰름했다. 머잖아 이곳이 텅텅 비게 될 날도 올지 모른다. 그 때가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 빈 자릴 다 채울 만큼 내가 많진 않은데.
역 근처에서 세 시간 쯤 맥주를 마셨다. 사람들과 대화를 하니 좋았다. 위장이 작아지면 간도 작아지는 걸까. 맥주 두세 잔에 금방 취기가 돌았다.
“그런데, 정말 마음이 아프시겠어요. 전시 때에도 잠깐 봤었는데.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거든요.”
“뭐…… 그 때도 싸우긴 많이 싸웠죠.” 나는 말하면서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게 벌써 일 년 전이네요. 시간이 참 빨라요. 맨날 하는 얘기지만.”
“손가락에 반지는 아직 안 빼셨네요? 커플링.” 다른 사람이 물었다.
“아, 네. 서연이는 빼고 다닌 지 꽤 됐는데…… 그럼 커플링은 아니니 그냥 링이네요.” 내가 대답했다.
“이유가 있어요?”
“겁이 나요.”
“어떤 게 겁이 나시는데요?”
“잊어버리는 거.” 내가 말했다.
오후 아홉시에 맞춰 집으로 돌아왔다. 서연이로부터 연락이 와 있었다. 내가 브런치에 썼던 글을 읽어봤다면서. 지금 연락하는 사람의 신상정도만 조심해달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는 글 쓰는 거 응원한다고. 썼던 것처럼 계속 쓰라고 했다.
알게 되면 몹시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적인 관계에 대해 너무 구체적으로 썼기 때문에. 어쩌면 일종의 고발이나 폭로로 보이진 않을까 싶어 부단히 조심하면서 썼다. 나는 뭐라도 해야할 것 같아서 쓰는 거지, 누군가를 상처주기 위해서 쓰는 게 아니니까. 다행히도 본인이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고맙다고 답장했다.
그러고 보니 서연이는 지난 이 년 간 내가 쓴 글 대부분의 1호 독자이기도 했다. 리액션이 다양한 편은 아니었지만. 가끔가다 “이런 건 어떻게 쓰는 거야?”하고 놀란 기색이 역력할 때…… 그럴 때 나는 더할 나위 없는 뿌듯함을 느꼈다. 그래서 언젠가는 ‘너랑 나를 주인공으로 한 수필을 하나 더 쓰겠다’며 장난스럽게 이야기했는데. 그 주제가 이별이 될 줄이야 꿈에도 모르고 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