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0일
11월 30일.
오후 두 시쯤 일어났다. 요즘은 일어나는 시간이 잠드는 시간과 별 관계가 없다는 생각까지 든다. 어쩜 그보다는 내가 얼마나 도망치고 싶은지, 또 얼마나 하고 싶은 일이 없는지에 더 영향을 받을 것이다.
전에 「역마」와 「시간과 장의사」를 함께 작업했던 편집자님과 만나 뵙기로 했다. 브런치에 올린 글을 봤는데, 긴 말 말고 그냥 밥이나 한 끼 하자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딱 봐도 집에 처박혀있을 것 같으니까 이렇게라도 바깥바람 좀 쐐라’는 의도가 숨어있음을 이젠 안다.
홍제동에 있는 서울혁신파크까지 차로 오십 분 정도가 걸렸다. 편집자님은 거듭된 야근 때문인지 다소 피곤해보였다. 그럼에도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는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그냥 불러서 밥이나 먹자는 얘기였단다. 저녁 먹으러 오기에는 좀 먼 곳인데. 아무튼 출판사 사무실에 앉아 꽤 오랫동안 대화를 나눴다.
편집자님과 서연이는 「시간과 장의사」 때 표지 작업을 같이 했었다. 사적으로도 친해져서 심심찮게 교류도 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어서 정말 안타깝고 슬프다고 말씀하셨다.
“솔직히 말하면 표정이 참 좋아졌거든요.” 편집자님이 말했다.
“제가요?” 내가 물었다.
“네. 서연씨가 주는 어떤 안정감이랄지, 즐거움이랄지, 하여튼 그런 것들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더 좋은 사람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느낌이었어요.”
“그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인격적으로도 배운 게 많고, 새로운 경험도 많이 했으니까요.”
“맞아요. 지난 이 년 동안……. 그럼 된 거 아닐까요?” 편집자님은 간단한 다과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두셨다.
“그동안 더 좋은 사람이 됐잖아요. 이별이 슬픈 일이기는 하지만, 그 사이에 현빈씨가 성장할 수 있었다면 그건 슬프기만 한 일은 아닌 거죠.”
“……그게 합리적인 이야기라고는 생각해요. 당장의 헤어짐에 대해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지나치게 슬퍼하기보다 그 다음 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효율적이겠죠……. 그런데 저는 그런 인간이 못돼요. 슬플 수밖에 없는 인간이에요. 거기에 대해서 슬프고 싶지 않아도 치미는 감정은 어쩔 수가 없잖아요.”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실 작정이에요? 상황이 좀 복잡해졌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죠.”
“최선을 다 한다는 게?”
“최대한 말할 수밖에 없죠. 내가 어떤 마음인지. 내게 이 관계와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그렇다고 단순히 서연이의 동정심을 사서, 내 옆에 조금만 더 있게 만드는 건 의미가 없고요. 결국 어떻게 결정할지는 본인의 몫이니까요. 타인의 마음을 내가 어떻게 할 순 없는 거고…… 적어도 표현하지 못한 채로 관계가 마무리돼버리는 건 하지 말아야죠. 아, 그 때 이런 이야기도 했어야 했는데, 같은 생각이 나중에 들면 안 되니까요.”
나는 말을 끝맺고 앞에 놓여있던 커피잔을 들어 마셨다. 쌉싸름한 맛에 묘한 향이 났다. 편집자님은 말없이 안경을 매만지고 있었다.
저녁은 뭐가 먹고 싶으냐기에 국밥이 먹고 싶다고 말했다. 사실 별로 뭘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하루 종일 식사를 안 하기도 했고, 기왕 먹는 거 영양가가 있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걸어서 오 분 정도 거리에 있는 국밥집에 가서 설렁탕을 먹었다. 그래도 배가 고프긴 했었던지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이런 와중에도 식욕이 남아있는 내가 어쩐지 싫었다. 어째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에 대해 잠깐 동안 이야기하다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할 무렵에는 밤 아홉시를 지나 있었다. 나는 글을 조금 쓰다가, 종잡을 수 없이 머리가 복잡해 그만두고 수면제를 먹고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