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수필

이별에 관한 기록 (11)

12월 1일

by 이묵돌


12월 1일.


물을 마시고 시계를 바라봤다. 정오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간밤에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전부 잊어버렸다. 그렇다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었겠지. 그다지 기억할만한 가치가 있는 내용은 아니었겠지. 남아있는 사실은 내가 무언가 꿈을 꾸었다는 것, 그 내용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 무척 슬펐다는 것뿐이다. 무엇이 슬펐는지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내 모습이 새삼 서글프다. 서연이와 보냈던 이 년의 시간도, 언젠간 어젯밤 꿈처럼 흐릿해지겠지. 언제, 어디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면서 울고 웃었는지, 기억도 못한 채 그리움에 잠기겠지.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울었다. 나중엔 눈물도 잘 나오지 않아서, 아예 정신 나간 사람처럼 흐느끼기만 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시간을 보내고 나니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분명 나는 배가 고픈데. 왠지 모르게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오롯이 슬프고 싶은 사람에게, 인생은 너무 번거로운 것들로만 이루어져있다. 바나나와 초코파이를 각각 한 개씩. 커피에 곁들여 천천히 먹었다. 살을 빼려는 건 아니지만 그 이상을 먹고 싶지도 않다.


달력을 봤다. 오늘은 일 년의 마지막 달, 십이월의 첫 번째 날이다. 이맘때면 다음 달 초에 있을 서연이의 생일에 어떤 선물을 줄지 고민하곤 했는데. 너무 저렴한 건 기분이 찝찝하고 지나치게 비싼 건 부담스럽다. 상대방을 아끼는 마음이 충분히 느껴질 만한 선물을, 적정가격대에 있는 물건으로 센스 있게 골라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받는 사람이 싫다면 도리어 피해를 주는 것 아닌가. 한 달이 지나서 집으로 돌아올지도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항우울제를 챙겨먹고 자리에 앉았다. 짧은 분량이나마 써보려고 달려들었지만 곧 힘이 풀린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못해 엉망진창으로 뒤엉켰다. 뭘 써도 진심이 아니다. 어떻게 써도 문장이 제멋대로 논다. 결국 초저녁이 될 때까지 의자에 앉아있기만 했다. 대체 지금 뭐하는 거야? 뭐가 됐든지 글을 써야지, 그게 네 일인데. 아니, 지금 일 할 정신머리가 있나? 서연이에게 일분일초라도 더 매달려볼 생각을 하지 않고? 글쎄, 이미 패색이 짙은 상황인데. 하루빨리 체념하고 잊어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책이라도 읽어. 영화라도 보라고…… 항상 이랬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릴 때. 나는 아무 것도 못하고 앉아있기만 했다. 내겐 너무 많은 명령어. 마치 과부하로 전원이 꺼진 컴퓨터 같다.


저녁에 약속을 잡아 나갔다. 정확히는 나오라고 해서 나가기로 한 건데. 시간이 되니 뭐라도 할 일이 생긴 게 마냥 반갑게 느껴졌다. 역시 독서모임을 인연으로 알게 된 사람이었다. 연락은 가끔 주고받았지만 얼굴은 오랜만이었다. 역 근처에서 술을 마시다가, 집으로 돌아가 좀 더 마시는 중에 옆집 사람이 벨을 눌렀다. 지금이 새벽 한 시인데 왜 이렇게 시끄럽냐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면서 죄송하다고 했다. 시끄럽게 한 건 사실이니까. 나로선 집에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면서 대화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다. 가끔은 옆집에도 사람이 산다는 사실 자체를 까먹는다. 하기야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집에서 마실 일도 없었겠지만. 시기가 좋지 않으니 상황도 꼬이고 만다.


취기 때문에 들떴던 기분이 다시 착 가라앉았다. 더 오래 이야기하기도 지칠 것 같고 해서 적당히 술자리를 마무리했다. 머리가 띵할 정도로 마셔댄 건 또 오랜만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편의점에서 숙취해소제라도 사놓을 걸. 머리를 누이자마자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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