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일
12월 2일.
몇 번을 잠들다 깨길 반복했다. 완전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오후 세 시 무렵이었다. 잠들 당시에는 전혀 춥지가 않은데, 일어날 시간이 되면 온 집안에 한기가 가득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불에서 발 한 짝 빼기도 무서운 요즘이다. 오랫동안 보일러를 켜놓아도 별 차이가 없다. 난 추위를 핑계 삼아서 일분일초라도 더 피할 생각뿐이다. 어디서 피한다는 걸까? 이쯤 되면 도망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뭐가 있는지를 물어봐야할 판이다.
느지막이 하루를 시작하다보니 해가 금방 진다. 원래 프리랜서라면 평범한 직장인과는 시차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은 딱히 하고 있는 일이 없으니 한량백수라 보아도 무방하다.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닌데. 누르죽죽한 몰골을 보니 내가 뭘 할 수 있겠는가 싶다.
우연히 본 인스타그램에 서연이의 피드가 올라왔다. 횡단보도 위로 저무는 노을을 찍었다. 그런데 어랍쇼, 위치가 제주도로 되어있다. 내가 듣기로는 주 삼일동안은 부모님 회사에서 일한다고 했는데. 서연이가 이런 상황, 이런 분위기에서 제주도를 갔다는 게 믿겨지지 않아서, 처음에는 예전에 찍었던 사진이나 다른 사람에게 전해 받은 사진을 올렸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조심스럽게, 제주도에 갔느냐는 메시지를 보내 물었다. 내가 그 정도는 물어볼 수 있지 않나? 함께 했던 사람에게 어디 있는 지 물어보는 일조차, 지금의 내게는 자격의 소재가 돼버린다. 답장이 없다. 몇 시간이 지날 동안 읽지도 않았다. 혹시 못 봤을까봐 밤 아홉시쯤 카톡을 보냈다. 짧은 답장이 왔다. 지금 제주도고, 배터리가 없어서 곧 잘 것 같다는 얘기였다. 연락하지마라, 나는 더 이상 네게 답변하지 않겠다. 내겐 그런 대답으로 들렸다.
의아했던 건 아까부터 꺼져 있던 전화였다. 다시 걸어보니 여전히 꺼져있다. 정말로 배터리가 다 닳은 거라면, 적어도 잘 때는 충전 케이블에 연결해놓고 잘 것이다. 서연이가 쓰는 아이폰은 ‘전원을 켤 수 있을 만큼’ 충전된 상태에서 자동으로 전원이 켜진다. 그러므로 여태 휴대폰이 꺼져있다는 건, ‘충전됐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껐거나’, ‘충전을 하지 않았고 잠들지도 않았거나’의 두 상황을 예상할 수 있다……. 하물며 이 두 가설이 모두 틀렸다손 쳐도, 여러모로 의심쩍은 언행이라는 데에는 확신이 섰다. 나는 서연이가 휴대폰 배터리 없이 그토록 오랜 시간을, 심지어 여행지에서 그렇게 내버려두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우리가 연인사이로 발전한 뒤에, 처음으로 함께 간 여행지도 제주도였다. 그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여행이었는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간들이었고, 때문에 책에서까지 긴 분량을 들여 기록해놓았는데. 아. 나는 순간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도저히 떠올리고 싶지 않은 상상이 뇌리를 스쳤다. 어쩌면 서연이는 혼자 제주도에 간 게 아닐지 모른다. 몇 번을 다시 생각하다가…… 끝내 ‘혼자 간 거야?’라는 질문을 메시지로 보내놓았다. 적어도 오늘 내로는 대답이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랬다.
마침 나는 독서모임에서 만났던 사람 세 명을 만나서, 저녁 시간부터 간단히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별 생각 없이 봤던 피드 하나 때문에 모든 게 꼬였다. 당장이라도 발작이 일어날 것 같았다.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아니, 미리 말이라도 해주면 좋았을 텐데. 내게서 마음이 떠난 것은 이해한다. 정말로 그건 이해할 수 있다.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가슴 깊이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대체 이렇게까지 할 건 뭐란 말인가?’라는 말이 수천수만 번, 계속해서 머리채를 헝클어트렸다. 이제 내가 어떻게 생각할지, 어떤 마음으로 고통 받을 지는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다. 금방 목도한 사실들 하나하나가 정신을 찢어발겼다. 온 몸이 마구 짓밟히고, 가슴 깊은 쪽 어딘가가 뭉개지고 으깨지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그건 분명히 그 사람이랑 같이 갔다고 봐야죠.” 자리에 있던 사람 한 명이 말했다. “정말 너무하기는 하네요. 아무리 헤어진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텐데.”
“악몽, 악몽 같아요. 이게, 이제는, 저는…….” 나는 오랫동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싸늘한 정적이 네 사람 분의 공기를 깔고 앉았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가기가 벅차 일찍 자리를 정리했다. 그렇게 만나기도 쉬운 일만은 아닌데.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우울을 전염시키고 싶지 않았다. 나가는 길에 ‘누굴 좀 미워하는 법도 알아야한다’는 핀잔을 들었다.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전의 관계들로 말미암아 배웠다. 그런 건 누구에게도 위안이 되지 않는다. 상대방은 물론이고 나중의 나 자신에게도 그랬다.
이 같은 나의 사고회로가, 제삼자에겐 답답해죽을 것 같은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이걸 정답이라곤 생각지 않는다. 단지 정신적으로 나약하게, 하나하나의 일들에 슬프도록 태어났다면, 그런 건 하나의 비극적인 생존전략이라 불릴 수도 있을 것이다.
단 한 명을 죽도록 미워하는 일은 나머지 세상사람 전부를 미워하는 일보다 훨씬 어렵다. 결국엔 이 처절한 마음의 근원이 사랑이었음을 기억해낸다. 그렇다. 어차피 누군가에게 찔려죽을 운명이라면, 한때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에게 찔려야 한다. 오직 그 사람만이 나를 베고, 상처 주며, 원 없이 피 흘리게 할 자격이 있다.
알았다. 언젠가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든 걸 줬다. 나를 파괴할 권리까지도 주고 말았다. 이제는 뭘 어떻게 해야하나? 아! 잠이다. 오래도록 이어질 잠. 수면제, 수면제, 수면제와 미지근한 물 한 모금…….
―창밖에 밤이 너무도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