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수필

이별에 관한 기록 (14)

12월 4일

by 이묵돌

12월 4일.


업무상 미팅이 있는 날이라 오전부터 일어나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업무라기보다 ‘업무가 될지도 모르는’ 미팅이었다.


몇 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작가님이 게임 시나리오를 써볼 생각이 있느냐며 내게 물었다. 나는 콘텐츠기획안이나 대본, 희곡 같은 것들을 몇 편 써본 적은 있다. 다만 돈을 받고 시나리오를 쓴 경험은 전무했기 때문에, 자신은 없지만 어떤 게임인지 정도는 봐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당장에 할 일도 뚝 끊긴 상태라 뭐라도 돈 될 거리를 찾아나서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렇지만 잘 할 수도 없는 일을, 단지 돈 때문에 덥석 받아버리면 나중에 꼭 탈이 난다. 그래서 자세한 내용은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작가님의 사무실은 예전에 갔던 사당역 근처에 그대로 있었다. 도착해보니 “일단은 점심때니 식사를 하자”고 말씀하셔서, 사 오신 김밥 몇 개를 집어먹으며 요기를 했다.


식사 후 가장 먼저 나온 얘기는 계약금에 대한 것이었다. 책 한 권이 될까 말까한 분량을 작업하는데 수당은 두 달 치 월급쯤 됐다. 마침 시나리오가 적용될 게임도 텍스트가 중심 콘텐츠가 되는 장르였다. 왜 나를 가져다 쓰려고 하는 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아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서는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는 옵션이겠지. 그러나 겁이 났다. 내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상황, 이런 정신머리에 생산적인 작업을 할 수 있을까. 작가님은 당장 결정하지 않아도 좋으니, 게임 개발사와의 화상미팅에 잠깐 참여하고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어차피 게임사 쪽에도 너를 소개해줘야 최종 결정이 난다는 모양이었다. 집에 돌아가 봤자 할 일도 없어서 그렇게 하겠노라 말씀드렸다.


개발사측 팀원들은 인상이 좋았다. 최소한 화면으로 대화해보았을 때는 그랬다. 작가님은 나를 상대 쪽에 간단히 소개했다. 얘기만 잘 된다면 이놈에게 시나리오를 맡겨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당장은 내가 어떤 글을 쓰는지 읽어보고 싶다고 해서, 주소를 알려주시면 제가 쓴 책을 몇 권 보내드리겠다고 이야기했다. 내 글이 과연 마음에 들지는 잘 모르겠지만, 회의자체는 썩 좋은 분위기로 마무리됐다. 남은 건 기다리는 일 뿐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발급받을 서류가 있어 주민센터에 잠깐 들렀다. 번호표를 뽑고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남루한 옷차림의 할아버지 한 분이 들어와서 번호표 뽑는 기계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눈이 안 좋으신 모양이었다.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할아버지는 번호표를 뽑았다. 그리고는 복지 창구에 그대로 걸어 들어갔는데, 내 차례가 끝나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도 되돌아 나오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 다 있다 싶었다.


나는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방금 받아온 가족관계증명서를 눈으로 훑었다. 딱히 볼 것도 없었다. 일찍이 죽은 아버지, 연락도 않고 생사도 모르는 어머니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가 각각 적혀있고, 그 아래쪽 칸에 내 이름과 번호가 나란히 덧붙여져 있었다. 또 나만 다른 칸이었다. 형이든 누나든 의지할 형제가 있었으면 지금보다 덜 슬펐을지도 모르는데. 하기야 정말 모르는 일이다. 세상에는 남보다 못한 가족사이도 많지 않은가.


집에 돌아와선 커피를 마셨다. 항우울제도 먹었다. 처음부터 먹고나갔다면 가족관계증명서 따위에 기분이 다운되진 않았을 것이다. 어쩐지 지친 기분에 잠깐 드러누웠다가, 일어나 글을 쓰기 시작했다. 두어 시간쯤 들여 짧은 글 한 편을 완성했다. 아주 엉망진창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잘 쓴 글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일단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기로 했다.


옷을 껴입고 저녁 산책을 나갔다. 의외로 코인노래방이 열려있었다. 작년에는 거의 매일같이 서연이와 함께 왔었던 곳이다. 거리두기 때문에 당연히 닫혀있겠거니 했는데. 묘하게 반가운 느낌이 들어 문을 열였다. 기계에 천 원 짜리 한 장을 넣었다. 천 원으로는 네 곡을 부를 수 있었다. 나는 한 곡도 다 부르지 못하고 나와 버렸다.


자정쯤 돼서 침대에 누워 기댔다. 수면제를 먹고 책을 읽다 잠들 생각이었다. 『말테의 수기』는 도저히 내 취향이 못 되는 소설이었다. 집중이 안 돼 금방 책을 덮어버렸다. 서연이로부터는 내내 연락이 없다. 나는 서연이에게 메시지로, 지금 뭐해, 나는 이제 자려고 누웠는데, 오늘도 네가 많이 보고 싶어, 라고 보내려다 도로 지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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