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수필

이별에 관한 기록 (15)

12월 5일

by 이묵돌

12월 5일.


정오 무렵에 일어났다. 대낮인데도 하늘이 흐릿했다. 북향으로 나있는 창문 때문에, 이런 날이면 집안에 볕이 들지 않아 온종일 어둡게 살아야한다. 집에 처박혀있는 대신 바깥에 나가기라도 하면 좋겠지만. 집이 어두울 땐 나가고 싶다는 생각도 잦아들고 만다. 악순환이다.


전날 마트에서 사뒀던 시리얼로 아침을 때웠다. TV를 틀어 잠깐 뉴스를 봤다. 거리두기는 여전하고 좋은 소식이라곤 코빼기도 없다. 뉴스가 끊긴 막간에는 수시로 캠페인 영상이 송출됐다. 검사는 일찍 받고, 손을 잘 씻고, 웬만하면 밖에 나가지 말며, 연말모임이나 행사는 가급적 취소하는데, 마음의 거리만큼은 넓히지 말라고…… 그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따뜻하게 해서 달라는 주문과 비슷하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기 마련이니까. 평범한 인력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작년 이맘때는 전시 준비에 한창이었다. 서연이로서는 제대로 그림을 그린 지 일 년도 채 안 돼 치르는 첫 전시였고, 나야 살면서 전시를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둘 다 처음이다 보니 어려운 점도 많았다. 싸우기도 했고 화해도 했다. 사람들이 마구 몰려올 때는 어떻게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그럼에도 전시는 무탈하게 마무리 됐다.


마지막 전시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나는 서연이에게 다음 전시는 언제쯤 할 것 같으냐고, 그래도 일 년에 한 번씩은 해야 좋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럼 좋지,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그럼 이번 전시는 나랑 같이 한 거니까, 다음에는 네가 처음부터 끝까지 기획해서 단독 전시를 해보는 게 어때? 사람들도 좋아할 것 같은데.”


“그게 그림 그리는 사람들의 로망이기는 하지.” 서연이가 대답했다. “언젠가는 해보고 싶긴 해”


“꼭 그랬으면 좋겠다.”


“응. 나도.”


“그럼 나는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 하는 거야. 이 사람의 그림을 제일 먼저 알아본 게 나라고. 언젠간 얘가 이렇게 대성할 줄 알았다고.”


“그리고 이렇게 같이 집에 돌아가는 거지.”


“그렇지. 그 때도 우리는 같이 있을 테니까…….” 나는 죽 차창 밖을 바라다보면서 말했다. 택시는 강변북로를 달리고 있었고, 유유히 흐르는 한강위로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점선을 그리고 있었다. 언젠가 서연이가 정말로 단독전을 열게 될지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같이 집에 돌아가자던 약속은 지켜질 수 없을 것이다. 기왕 약속을 했을 땐 지키는 편이 좋지만, 약속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순간에는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상처가 된다.


나는 방금 정돈한 침대에 머리부터 고꾸라졌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보통 그럴 땐 잠을 자곤 했지만. 수면제를 먹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일어나 글을 썼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부 지워버리고 새로 썼다. 별로 나아진 것 같지 않았지만 그대로 뒀다.


소파에 앉아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봤다. 이럴 땐 최악의 상황을 생각한다. 서연이는 나와 헤어진다. 그리고 모든 짐을 챙겨 수원이든 어디든 저 살고 싶은 곳으로 떠나버린다. 나는 남는 수밖에 없다.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남을 것인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의 계약은 내년 이월까지인데. 보증금이며 월세와 관리비까지 두 명이 나눠서 부담해왔다. 애초에 두 명이 함께여서 겨우 세들 수 있는 집이었다. 나 혼자서의 수입으로는 이 집에서 한 달 이상 버틸 수 없다. 근 몇 달간 신간을 내지 못해 인세가 바닥났고, 코로나 때문에 강의든 독서모임이든 부가적인 수입도 씨가 말랐다.


당장에 보증금을 돌려달라고 하거나, 계약이 끝날 때까지 자기는 월세나 관리비를 낼 이유가 없다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계약을 그렇게 했잖아, 갑자기 이러면 어떡해, 나는 이제 어떻게 살라고…… 호소해보아야 소용없을 것이다. 당초 그런 것들을 고려했다면 이렇게 나가버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와 함께 미래를 걱정하고, 반 토막 난 월수입을 고민하고, 일단 식비부터라도 줄여보자며 함께 의논할 수 있던 사람이 이제는 없다. 나야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다시는 얼굴도 안 볼 사람인데. 다시 말하지만, 약속은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순간 상처가 되는 것이다.


다음 달 월세와 생활비는 물론 서연이와의 분리로 처분해야할 대출계약들까지. 돈 문제가 눈덩이처럼 쌓여 들이닥쳤다. 그것도 요 몇 년 사이 가장 돈이 없을 때. 이렇게 허송세월을 할 때가 아니었다. 뭐라도 메꿀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 했다. 그러나 일해서 갚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가장 좋은 건 추가 대출을 하는 건데, 정해진 직장이 없는 프리랜서다보니 웬만하면 거절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매월 정해진 수입은 아니더라도 여러 출판사로부터 인세를 받고 있다. 연간소득으로 치면 웬만한 직장인만큼은 벌었다. 사대보험에는 고용보험 빼고 다 가입돼있다(어디 고용된 입장이 아니니까). 건강보험, 국민연금도 꼬박꼬박 냈다. 신용등급도 평범한 수준이다. 그런데 대출창구에 가서 앉기만 하면, 무슨 이유를 대서든 대출이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곤 했다. 서류로 판단해야하는 은행원이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만. 어쩐지 갈 때마다 ‘집에서 노는 사람’ 취급을 받는 느낌이 들어 피가 거꾸로 솟았다. 한국에선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해야만 근로자로 인정받을 수 있으며, 글 써서 버는 건 불로소득이나 다름없이 취급된다.


이런 나의 경제상황을 서연이는 빠짐없이 다 알고 있다. 이 집을 떠나 내가 마땅히 갈 곳이 없다는 것도, 최근에 적금까지 깨가며 어려움을 모면한 것도, 당장에 이런저런 비용을 충당할 수 없는 상황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내게는 내려갈 수 있는 집도, 급할 때 손을 벌릴 수 있는 부모나 친인척도 없다. 나이가 비슷한 친구들은 최근에야 직장생활을 시작한 사회초년생이다. 목돈을 빌려줄 입장도 아니거니와 그러고 싶지도 않다. 결국 은행에서 돈을 빌리지 못하면 그야말로 끝장인데, 나는 그곳에 앉아있을 때 가장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전락해버린다. 눈앞이 깜깜했다.


돌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진통제를 두 알이나 먹었다. 어떤 걱정을 하든 곧장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주말이니까. 온갖 걱정에 정신이 팔리다보니 눈 깜짝할 새에 밤이 됐다. 나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펴서 읽다가, 자정쯤 해서 수면제를 먹고 잤다. 내일은 일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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