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수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묵돌 Jan 02. 2021

이별에 관한 기록 (41)

12월 31일


12월 31일.     


 올해의 마지막 날. 오전 열시 쯤 잠에서 깼다.


 ‘일 년이 마무리되는 날이니까, 평소보다 특별한 하루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단순히 그림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미술관에 갔다. 마침 동행하기로 한 분도 있어 중간에서 합류했다. 미리 예약을 해두지 않아 현장에서 입장권을 샀다. 전시장은 거리두기로 인해 동시입장정원을 제한하고 있었다.


 대개는 전시를 보고나서 ‘생각한 것보다 좋았다’거나 ‘기대 이하였다’는 평을 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정말이지 그림을 감상하는 데만 시간을 보냈다. 마음에 드는 그림을 오래보고 그렇지 않은 그림들은 지나쳐보냈다. 아담한 전시장이었으나 들어가서 나오기까지 시간이 제법 걸렸다. 밥을 먹지 않아서인지 끝물엔 다리가 조금 아팠던 것 같다.


 근처에서 식사를 하고 차에 올랐다. 연말을 맞아 추모를 하러 간다기에 데려다드리기로 했다. 얼떨결에 화장터까지 따라갔다. 나와는 별로 관계도 없는 사람의…… 누군가의 묘에 마지막으로 가본 것이 언제였던가? 나는 타인의 고통에는 예민한 편이지만, 오히려 죽음에 대해서는 무덤덤한 면이 있었다.


 사실 아버지의 경우 워낙에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기억이 없다. 그나마 떠오르는 것이라고 하면 할머니의 죽음 정도인데, 아파서 입원하실 당시에는 그렇게 슬펐던 반면 돌아가신 뒤에는 별 느낌이 없었다. 내겐 무책임한 어머니보다 외할머니 쪽이 더 가족 같은 존재였는데도. 이상하리만큼 슬프지 않았다. 죽는 것보다는 살아서 고통 받는 것이 더 비극적이지 않느냔 식이었다.


 때문에 한때는 내 인간성 어딘가가 아주 고장나버린 건 아닐까하는 생각도 했다. 몇 년 전에 친한 친구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그 죽음 자체보다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의젓한 아들 역할을 해내야하는 친구의 모습이 슬퍼서 펑펑 울었다. 당장에 죽음은 보이지 않지만 죽음으로 인해 슬퍼하는 사람은 눈앞에 있었다. 난 어쩌면 죽음이라는 개념을 너무 피상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을지 모른다.


 집에 다 와갈 즈음해서 ‘이왕 이렇게 된 것 맥주나 한 잔씩 하고 가자’는 얘기가 나왔다. 하지만 식당이며 술집이 셔터를 내릴 시간이어서, 캔맥주를 두 개씩 사들고 집에서 마시고 가기로 했다.


 그렇게―이렇다 할 안주도 없이 줄곧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하루가 지났다. 아, 일 년이 지나있었다. 꼼짝없이 혼자였어야 할 마지막 날인데. 적어도 누군가와 함께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 묘한 안도감을 줬다. 나는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고, 이렇게 한 해를 마무리하게 돼서 송구스럽다고 말했다. “괜찮아요. 새해에는 좋은 일만 있었으면 좋겠네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거기에 나는 달리 할 말이 없어서, “네”라고 짧게 대답하고 말았다.


 새벽 한 시쯤 택시를 타는 곳까지 배웅하고 왔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책을 읽다가 약을 두 알 집어먹었다. 하릴없이 쳐다본 휴대폰 화면에는 ‘이천이십일 년 일월 일일……’이라고 적혀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별에 관한 기록 (4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