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수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묵돌 Mar 03. 2021

영원에 관하여, 어니스트 헤밍웨이

2. Ernest Hemingway



스페인에서 무언가 읽고 있는 헤밍웨이 (1959)


1. 헤밍웨이는 뭇 작가들에게 질겅질겅 씹을 수 있는 껌같은 존재다. 그건 그가 위대한 작가인 동시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를 한 명만 대보라'고 물었을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노벨문학상이 뭔지는 알지만, 어떤 작가가 어떤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는지는 잘 모른다.






오스트리아에서 스키를 타고 있는 헤밍웨이. 『무기여 잘 있어라』등에서도 스키 관광에 대한 묘사가 제법 나온다. (1925)


2. 하기야 헤밍웨이가 한 번 들으면 잊히지 않을만큼 어감이 좋은 이름이기는 하다. 페터 한트케나 도리스 레싱? 해외 유명 피겨스케이터로 소개하더라도 잘 모를 것이다. 헤밍웨이에 대해 쉽게 말하는 사람들은 설령 도스토옙스키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라고 얘기해줘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야 모르는 건 죄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는 건 창피한 일이다. 나도 무척 창피한 인생을 살았다.






대문호스럽게 잘 찍혀서 유명한 사진. 케냐에서 찍혔다고 한다. 


3. 『노인과 바다』가 불멸의 저작이라는 점에는 그다지 이견을 내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는 낚싯배의 구조―이를테면 고물, 이물, 놋좆 같은 단어들로 묘사되는―에 별로 관심이 없다. 더구나 내 입장에서 조 디마지오는 샌디 쿠팩스처럼 과대평가된 선수다. 헤밍웨이라는 작가를 『노인과 바다』라는 저작 하나로 뭉뚱그리려는 경향은, 그저 그 책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같은 장편의 반의 반 분량도 안된다는 점에서 나오는 건 아닐까.






사자를 사냥하고 빵끗 웃고있는 헤밍웨이. (1934) 이건 단편소재로도 써먹었다.


4. 그래서인지 어쩌다 헤밍웨이에 대한 얘기가 나와도, 그게 문학과 관련된 경우는 드물기까지 하다. 수십 년간의 문학적 발자취는 '강건체'나 '하드보일드' 따위의 말로 쉽게 요약되고(막상 보면 문장이 그렇게 짧지도 않다. 문체가 문장의 길이만으로 판별되는 것도 아니지만), 오히려 글보다 하잘 것 없는 주제들―술이나 복싱, 그리고 여자 문제에 관한―으로 불쑥 넘어가버린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정도의 대문호'가 생전에 조금 특이한 짓을 하고 살았다고 해서. 진짜 성취라고 할만한 것들은 대부분 뒷전이 돼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글과 행동을 보고 대문호라 판단하는 게 아니라, 대문호의 글과 행동이니까 특별하게 여긴다. 헤밍웨이는 1961년 자살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지 칠 년째 되던 해였다. 






아이다호 케첨에 있는 헤밍웨이의 무덤.



5. 타자기와 인쇄지로 평가받아야 할 소설가가, 카메라와 사진으로 인식되는 것은 정말이지 안타까운 현상이다. 밀란 쿤데라는 자신의 장편소설 『불멸』에서, 헤밍웨이를 괴테와 면담시킴으로써 다음과 같이 변호해주기도 했다. 


  "나의 책을 읽는 대신 그들은 나에 관한 책을 써 댑니다. 내가 여편네들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하고, 아들을 잘 돌보지 않았다고도 합니다. 어느 비평가의 입을 찢어 놓았고, 성실하지 않았으며, 너무 오만했고, 남성우월주의에 사로잡혔다고도 합니다. 전쟁터에서 입은 상처가 이백여섯 군데이면서 이백서른 군데라고 떠벌렸다질 않나. 내가 상습적으로 자위를 했다는 등, 어머니에게 매우 고약하게 굴었다는 얘기도 해대지요... (중략)

 ... 그래요, 젊었을 때 내가 수탉처럼 군 건 사실입니다. 여보란듯 굴면서, 사람들이 나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수군대는 걸 즐겼지요. 하지만 말입니다. 허영을 좀 떨긴 했지만 난 괴물이 아니었고, 별로 불멸을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헤밍웨이는 이제 문학계의 필수요소가 돼버렸다.


6.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작품은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다. 중후반부쯤 팜플로나와 투우축제에 관해 쓴 부분이 있는데, 여기에다가 얼마나 많은 지면을 할애했는지 언젠가 스페인을 가도 그 근처는 안 가봐도 될 것 같다. 처음 읽을 당시에는 '그래도 뭔가 의미가 있을 거야' 하고 한 줄 한 줄 꼼꼼히 읽었었는데. 이제보니 그냥 본인이 좋아하는 것들을 실컷 묘사한 것 뿐이구나 싶다. 처음부터 그 장면을 위해서 쓰기 시작한 걸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걸 실컷 쓰고 싶어 하는 일이라니. 얼마나 작가스러운 착상인가. 대문호가 아닌 일개 작가로서의 헤밍웨이를 나는 사랑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원에 관하여, 클로드 모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