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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Jul 30. 2021

영원에 관하여, 오타니 쇼헤이

9. Ohtani Shohei



투수, 타자, 외야수까지.


1. 뜬금없기는 하다. 나도 알고 있다. 오타니 쇼헤이는 일본 국적의 야구선수로, 투수와 타자를 겸업하는 '이도류'로 잘 알려져 있다. 타고난 피지컬, 부단한 노력에 철저한 자기관리가 더해져서, 지금은 일본만이 아닌 세계최고의 스타로 거듭났다. 말하자면 야구를 모르는 사람들조차 '오타니'라는 이름 정도는 들어보았다는 정도다. 하지만 미켈란젤로, 헤밍웨이, 빌리 홀리데이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일본 국적의 야구스타'를 꺼내오는 건, 역시 희한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싶다. 


2. 하지만 나로선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그 이유는 이 수필 시리즈의 제목에 있다. '영원에 관하여'의 '영원'이란, '영감의 원천'을 줄인 말장난이다. 나는 내게 어떤 식으로든 영감을 주는 인물들에 대해, 떠오르는 생각들을 자유롭게 써내는 것이다. 야구(를 보는 것과 하는 것 모두)를 좋아하는 내게 있어서, 요즈음의 오타니만큼 강렬한 자극을 주는 사람은 없다. 그 자극은 단순히 기록의 대단함이나, 아시아인으로서의 자긍심, 처럼 말초적인 게 아니다. 따라서 일본에 대한 문화적, 외교적 스탠스와도 관계가 없다. 오타니가 일본이 아닌 쿠바나 아이티 출신이었어도 나는 똑같이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그냥 쓰기로 했다. 딱히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3. 오타니라는 이름을 처음 듣게 된 것은 9년 전이었다. 나로선 고3이 되어서, 뒤늦게 수능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런 와중에도 스포츠 관련 기사나 영상을 찾아보곤 했었는데, 어느날 일본의 웬 고등학생이 160km의 강속구를 기록했다는 글을 읽었던 것이다. 그게 오타니 쇼헤이였다. 


2012년, 오타니는 아마추어 야구 대회에서 최초로 160km를 기록했지만, 결승전에서 패배해 고시엔 진출에 실패한다.


160km? 그게 대체 어떤 속도일까. 친구들과 취미로 야구를 하던 내가 이를 악물고 던지면 110km가 겨우 나왔다. 국내 프로야구에서는 150km만 넘겨도 강속구 투수로 취급해준다. 그런데 일본에선 프로에 입단하기도 전에 160km를 던지는 놈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인재가 발굴될 수 있는 일본의 야구 인프라에 다시금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공은 빠른데 컨트롤이 엉망이군. 저런 건 프로에 가면 안 통할 걸.'


4. 나는 야구에 대해, 야구와 관련된 숫자에 대해, 나아가 어떤 선수의 커리어를 지켜보는 것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야구는 물론 농구와 축구까지. 거의 모든 구기종목에서의 스탯을 '감상'하곤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으로 본 건 '기록으로 본 선수'와 '현실에서 느껴지는 선수' 간의 갭이었다. 보다보면 늘 팬과 언론의 관심을 독차지하면서도 기록으로 보면 딱히 별 볼 일 없는 선수가 있고, 그와 반대로 기록은 대단한데 이상하리만큼 조명받지 못하는 선수가 있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어떤 종목에 대해 잘 하면 잘 할수록 더 많은 관심을 받는 게 당연한 것 같지만. 알고보면 딱히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다. 이른 나이에 강속구를 던지는 것으로 주목받기란 상대적으로 쉽다. 하지만 그것을 가다듬어 훌륭한 기록을 세우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다. 내게 오타니는 딱 그정도의 인상이었다. 프로에 가면 어느샌가 잊히고 없을 그런 선수 말이다. 


니혼햄 시절의 오타니.


5. 그 다음으로 오타니의 이름을 보게 된 건, 이 자식이 투수와 타자를 동시에 하는 '이도류'를 선언하면서 프로팀에 입단했을 때였다. 물론 고교야구에서는 팀의 에이스 투수가 4번 타자를 겸하는 케이스가 많다(타자로 성공했지만 고교시절 투수로 이름을 알렸던 이대호, 추신수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말 그대로 '타고난' 애들이다. 그냥 야구라는 종목 자체를 잘 이해하고 있는 선수…… 그런 선수들도 프로구단에 입단해 활약하려면 '선택'해야한다. 세간의 말투를 빌려쓰자면, "둘 중 하나만 해! 모든 걸 할 순 없어!"다. 그렇게 던지는 재능과 치는 재능, 이 두 개의 일을 두고 저울질을 하다가, 집중할 수 있는 하나를 선택해 선수생활을 시작하고 끝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근데 오타니는 "저는 둘 다 잘 하는데요. 그냥 둘 다 할래요"라고 선언한 것이다. 나아가 투수와 타자를 모두 시켜주지 않는 팀에는 입단하지 않으려 했다. 오타니의 당돌한 주장은 연일 뉴스매체의 메인을 장식했고, 당연히 욕을 왕창 먹었다. 뭐 이런 등신이 다 있냐, 고교야구랑 프로야구가 똑같은 줄 아는 거냐, 다른 선배 선수들은 바보라서 못한 건줄 아냐, 등등.


6.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고교야구나 프로야구나 기본적인 룰은 다를 게 없다. '투수가 타자를 하면 안 된다'는 규정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도 단순히 없는 정도가 아니라, '투수도 한 명의 야수이므로 타격을 하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야말로 전통적인 야구의 관점에 가깝다. 투수의 체력 안배를 위해 지명타자가 생긴 건 나중의 일인데, 이렇게 따지고보면 지명타자야말로 야구라는 종목의 본질과 가장 동떨어진 포지션이다. 제대로 공을 던지거나 잡을 줄 모르더라도, 날아오는 공을 잘 보고 때릴 수만 있으면 '야구선수'가 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선수는 '훌륭한 타자'일지언정 '훌륭한 야구선수'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축구로 치면 슛은 잘 때리지만, 뛰지도 못하고 패스도 안되는 선수인 것이다. 이런 선수가 '좋은 키커'일 수는 있어도 '좋은 축구선수'로 평가되진 못한다. 


7. 그런데 왜 야구계 관계자들, 그리고 팬들은 투수가 타석에 들어서는 것에 이질감을 느끼는 걸까? 딱히 룰에 어긋나는 것도 없는데 말이다. 종교에 빗대자면 성직자 결혼에 관한 문제와 비슷할 것이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성직자의 삶은 신에게 봉헌한 것이므로 결혼하지 않는 게 당연하다'는 입장이었지만, 종교개혁에 이르러 '성경에는 성직자보고 결혼하지 말라는 얘기 없던데?'라는 반론이 나왔다. 그 덕택에 오늘날에도 신부는 결혼을 하지 않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반면, 목사의 결혼에는 한결 관대한 분위기가 된 것 아닐까. 아님 말고…… 아무튼, 다시 야구라는 구기종목으로 돌아와보자면 그렇다. 지명타자라는 게 생기고, '투수와 타자라는 포지션을 분리해놓는 것이 선수관리 차원에서 용이하다'는 판단이 생겨났으며, 그게 수십 년간 이어져오다보니 '투수와 타자는 같이 할 수 없다'는 것이 하나의 관습으로 자리잡았다. 그야 오타니 쇼헤이와 마르틴 루터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건 모양이 이상하다.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17년'에 각자의 분야에서 무지 도발적인 도전장을 내밀었다는 것 정도아닐까.


오타니, 레드체어 인터뷰에서.



8. 팬들의 우려, 언론의 질타, 주변 사람들의 만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오타니는 이도류를 고수해 나갔다. 자못 무모해보이는 그의 도전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야구계를 비롯한 관련자 대부분은 이렇게 생각했다. '재능은 대단한데, 아직 어려서 철이 없는거야. 저러다가 몇 년 지나면 하나로 집중하겠지?'라고. 오타니가 경기 한 번 뛸 때마다 수많은 갑론을박이 오갔다. 160km를 던지는 어깨로 투수를 안 하면 너무 아깝지 않냐, 아니 근데 그런 것 치곤 공을 너무 잘 때리니 타자로 가는 게 맞다, 시도는 시도일 뿐이다, 얼마나 재능이 있는지는 알겠으니까 이제 하나에 집중할 때다…… 그렇게 9년이 지났다. 오타니는 소속팀이었던 닛폰햄을 우승시키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했으며, 올해 들어서는 정말 놀라운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9. 오타니의 이도류 선언 당시. 나는 그를 단순한 괴짜 유망주를 넘어 무척 오만한 사람이라 지레짐작했었다. 인간이 얼마나 지밖에 모르길래 저런 말을 하는 거지? 에이스 투수면서 4번 타자를 했던 선수는 프로에 널려있는데. 그렇게 성공한 선수들도 다 이유가 있어서 하나에 집중했을 텐데. 자기가 뭐 역사적 재능이라도 된다고 저 지랄을 하는 거야, 참내…… 하지만 선수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오타니 쇼헤이는 매우 겸손하고 예의바른 청년으로 알려져 있다. 고교 시절은 물론 월드스타가 된 지금에조차 그렇다. 개인보다는 팀을 우선시하고, 타이틀보다는 승리에 헌신하며, 훌륭한 팬서비스와 깍듯한 인터뷰 태도를 가졌다. 서구권에서 보면 이상적인 '아시아 운동선수'의 전형이나 다름없다. 겸손하고 고분고분하다. 늘 웃는 얼굴에, 웬만해선 불만을 표출하거나 화를 내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팬으로서는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 없는 선수. 이런 점에선 영국에서 손흥민이 가진 이미지와도 겹쳐보인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손흥민은 골키퍼까지 하려고 들진 않는다는 점이다. 




10. 상상해보라. "하나만 해, 하나만." "다 할 수는 없는 거야. 하나라도 똑바로 할 생각을 해야지." "다른 사람들은 다 바보라서 그렇게 하는 줄 아냐? 하나에 집중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야." ……나조차도 살면서 심심찮게 들어온 말들이다. 하물며 오타니 정도의 유명인사라면 어땠을까? 그쯤이면 사석에서의 핀잔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매일 보는 야구계 관계자는 말할 것도 없고, 팬과 언론, 주변의 친구와 지인들, 명절날 만나는 일가친척에게까지 비슷한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매일밤 잠들기 전 자기 자신에게조차 의문을 품었을지 모른다. 내가 정말 철이 없는 걸까, 잘못 생각해도 한참을 잘못 생각한 건 아닐까, 하고. 어떨 땐 정말로 한 가지를 포기할 수밖에 없나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11. 그러나 9년이 지난 2021년. 나와 동갑내기인 오타니 쇼헤이는 계속해서 이도류를 이어가고 있고, 올해 메이저리그에서는 투타 모두 MVP레벨의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보니 오타니에게 있어 이도류라는 것은, 단순한 컨셉이나 똥고집 같은 게 아니었다. 야구를 바라보는 자신만의 관점. 미련할 정도의 신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목표. 삶…… 지금같은 성적을 시즌이 끝날 때까지 이어갈 수 있을지, 피로가 쌓이고 쌓여 큰 부상이 일어나지는 않을지, 어느날 갑자기 사생활 문제로 스캔들이 터지지나 않을지. 당장은 확신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어쩌면 사고를 크게 한 번 쳐서, 지금 쓰는 이 글을 은근슬쩍 지워야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아시아인이나 한국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야구팬이자 인간으로서 느낄 수밖에 없다. 투수로서 삼진을 잡고, 바로 다음 타석에서 홈런을 때려내는 오타니의 모습에는, 순수한 동시에 매우 전위적이고 자극적인 메시지가 있다. 것 봐, 틀린 건 아니었어. 아주 못할 것도 없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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