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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Oct 23. 2021

설거지론에 관한 단상

과대평가된 섹스

 이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사실 하고 싶은 얘기는 하나 뿐이다.


 섹스는 과대평가되었다. 어쩌면 인간의 콘텐츠 중에 가장 과대평가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남자인 또래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백이면 백 나를 미친 인간 취급한다. 또 무지하게 기분 나빠한다. '그건 니가 제대로 된 섹스를 안 해봐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같은 소리는 물론이고 '실연의 아픔으로 이미 죽었어야 하는 인간이 계속 살아서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폭언까지 들었다. (지금 와서 하는 얘기이지만, 그 때 그건 조금 상처였다)


 그러나 섹스가 과대평가되었다는 것은, 딱히 새로운 주장도 아니고 새삼 거창하게 할만한 이야기도 아니다. '성적 쾌락은 희대의 사기꾼이다' 라고 이야기한 플라톤이 기원전 사람임을 놓고보면 지금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지동설이나 진화론보다도 그 역사가 오래 되었다. 차이가 있다면 이쪽은 몇천 년동안 이야기해도 처들어먹질 않았다는 점이다. 



??? :  "사기임... 암튼 사기임"



 그야 나도 섹스가 꽤 기분좋고 멋진 일이라는 사실은 인정한다. 누구도 그게 일말의 가치가 없는 행동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난 그저 섹스가 확실하게 과대평가되어있으며, 이러한 고평가가 많은 사람들을 슬프게 만든다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한데 대체 어느 부분에서 섹스가 과대평가 되었다는 말이냐? 라고 물으면 뭐라 해줄말이 없다. 너나할 것없이 지식인이라고 자부하는 현대의 청년들조차 섹스에 관해서는 상식밖의 관점을 지닌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일일이 반박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이런 부분을 잘못 건드렸다간 언제 어떤 인신공격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 내 주장이 지극히 과학적이든 종교적이든 간에, 내 고추 크기와 연애경험을 도마에 놓고 칼질을 하려 들 것이다. 


 이를테면 그렇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는, 적어도 남성의 사정 따위보다 여성의 오르가즘이 훨씬 고차원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남성의 사정 '따위'라고 표현한 것은 결코 비유적인 서술이 아니다. 남자의 사정이 짧으면 3초, 아주 길어야 10초 남짓 되는 하반신 자극에 그치는 반면, 여성의 오르가즘이란 뇌파구조상 간질 발작과 흡사할 정도로 강력한데다가 그 쾌감의 지속시간도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길다. 성관계중 남성이 느끼는 쾌락함수 m(x)와 여성이 느끼는 f(x)는 그 적분값부터가 상대가 안 된다.  


대충 그리면 이렇게 된다.


 그러나 이런 사실만 놓고보면 사뭇 이상하다. 만일 섹스라는 게 그만큼이나 대단한 물리적 쾌감을 안겨준다고 치면, 남성보다는 오히려 여성이 성관계에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게 자연스럽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가 사회에서 마주하는 성욕이란 정확히 그 반대다. 당장 아무하고라도 잠자리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여자보다 남자가 더 많아보인다... 그야 피임과 성병에 대한 우려도 있긴 하겠지만, 저만한 물리적 차이를 상쇄할만큼 막대한 건 아닌 것 같다. 특히 요즘처럼 도구가 잘 발달되어있는 시대라면 말이다.


 사실 이 글은 이정도만 하더라도 뭇 남성들의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그러한 비판의 필연성을 인지하고 있다. 섹스라는 것은 과대평가 없이, 즉 성적 판타지 없이 독립적으로 생존하기 어려운 행위다. 남성이 수시로 느끼는 성적충동, 그 때마다 여지없이 빼앗기는 이성과 자유의지, 또 그 보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보잘것 없는 결과물 등등. 그런 것들을 납득하기 위해서는 '섹스에는 그 행위 이상의 행복과 만족감을 주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거기다가 '섹스는 과대평가 됐어' 라는 말을 해봤자 좋은 반응을 기대하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요 며칠간 인터넷을 달구고 있는 설거지론을 보며 몹시 슬퍼졌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날 튀어나오는 무슨무슨'론'이며 무슨무슨'선언' 같은 것들이, 나아닌 누군가를 어떤 식으로든 슬프고 비참하게 만드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것들이 주장하는 바를 몇 꺼풀 벗겨보면 이런 메시지밖에 남지 않는다.

 '너희가 행복이라 생각했던 것은 전부 거짓이야' '너희가 속고 있는 거짓말에 나만큼은 속지 않을 거야'

 이런 것에 어떤 사람들은 '논리'라는 이름을 붙이고, 안티테제로서의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설거지론은 요즘 시대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이며 컴플렉스의 표현이다. 내가 나의 청춘을, 인생을 바쳐 지탱할만큼 가치있다고 생각한 것들이, 알고보면 기만에 사기행위일 뿐이라면?


 하기야 나로선 비혼주의자 선언이라는 것도 설거지론 만큼이나 이해가 안 된다. 지금같은 시대에―남녀를 막론하고―결혼을 안 하겠다는 거야 특별하지도 않고 오히려 흔한 발상이다. 그런 걸 '선언'씩이나 한다는 점이 나는 혼란스럽다. '그건 그냥 삐져서 안 하겠다는 거 아니냐. 상황이 마음에 안 든다는 얘기 아니냐.' 라고 물으면 '왜 결혼을 하면 안 되는지' 갖가지 이유를 늘어놓고 자신의 주장과 선언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의 결과인지를 증명하려 한다. 이런 식으로라면 사흘밤낮을 이야기해도 결론이 나지 않을 것이다.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결혼은 섹스 자유이용권이 아니다. 일부일처제는 제도다. 가문간의 재산과 양육책임을 원활하게 합치고 분배하기 위해 발명된 것에 가깝다. 사랑의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자유로운 권한이 아니라 필요에 의한 구속이다. 결혼의 역사에서 대부분은 '하고 싶어서' 결혼을 하는 게 아니라 '해야하기 때문에' 했다. 도리어 '결혼 같은 계약적 관계에 사적인 감정이 끼어들어서는 곤란하다'는 인식까지 있었는데, 진심어린 사랑만이 결혼의 필요충분조건이라 여기는 현대의 감수성과는 괴리가 있는 부분이다. 스페인에는 "사랑 때문에 결혼한 사람은 고통스럽기 마련이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다.


 이를테면 설거지론이란― 그런 결혼을 에버랜드 자유이용권처럼 여기고 있다가, '뭐야 벌써 T익스프레스가 고장이야?' '사바나 익스프레스를 타려면 두 시간이나 기다려야 해' '결국 밤까지 아무 것도 못타고 별 관심도 없는 퍼레이드만 보고 집에 가게 생겼잖아...' 같은 불평을 늘어놓고나선 이게 사기다 어떻다 하며 분통을 터트리는 것이다. 이건 뭐 가련하다못해 어딘가 부조리하다고까지 볼 수 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사람들의 분노와 슬픔은 대체 어느 쪽으로 향해야하는 것일까? 


 내 생각에, 여기서 정당하게 화를 내야할 대상이 있다면 그런 제한적인 출입증을 '자유이용권'으로 속여 판 여행사, 그리고 '놀이공원에서는 새로운 어트랙션을 많이 타야 본전을 뽑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손해보는 것이다' 하고 부추기는 주위 친구들이 아닐까 싶다. 



글쓰다가 물 쏟았다. 병이 깨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사실 내가 에버랜드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정중앙에 있는 커다란 나무 모형이다. 또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동화풍의 광장이고, 그곳을 들뜬 발걸음으로 돌아다니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표정이다. 낡아서 더는 움직이지 않는 대관람차를 올려다보는 것, 저녁무렵 환하게 빛을 발하는 회전목마와 그 주변의 가족들을 보는 것이 나의 에버랜드이다. 그런 날더러 '너는 놀이공원에게 사기를 당한거야' '삼성의 상술에 그대로 놀아난 것에 지나지 않아' 라고 말하는 이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당초 거기에 목적이라는 게 있기는 할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섹스는 과대평가된 콘텐츠이다. 그 과대평가는 너무도 맹목적이고 체계적인 형태로 발전해와서, 감히 종교에 비견하기에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그렇다. 섹스에 대한 믿음은 실로 종교와 같다. 하물며 종교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들마저 섹스에 대해 자신이 갖고 있는 환상이 얼마나 종교적인지는 인식하지 못한다. 순결한 이와 나누는 섹스는 선이며, 내가 원할 때 마음껏 하지 못하는 상황은 악이다. 잘나가는 인싸라면 원하는만큼 섹스를 하기 마련이고, 찐따같은 놈들은 집에서 자위나 하다가 나중에 사기나 다름없는 결혼을 해서 거짓된 여생을 산다... 이러한 믿음을 종교적이라는 것 이외에 어떤 단어로 표현하면 좋을지, 지금의 나는 알지 못한다. 단지 몇 위대한 작가들의 언어를 빌려올 수는 있을 것 같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지난 날 놓친 여러 행운을 한탄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행동이다. 만약 그 행운이라는 것을 얻었다 해도 지금에 와서는 뭐가 남아있나? 기억 속에 껍데기 처럼 남은 미이라 뿐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건 모두 이렇게 되는 것이다.'


 "드디어 당신이 내게 사랑의 행복을 느끼게 해주었네요" 라고 말하는 여자에게, 돈 주앙은 코웃음을 치며 이렇게 말한다. "드디어라니? 천만에. 또 한 번이겠지."

 그리고 이 부분을 인용한 까뮈는 이렇게 덧붙인다.

 "어째서 드물게 사랑해야 많이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움직임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과 섹스가 똑같은 건 그런 부분밖에 없다.

 언젠가 나는 '만약 당신이 결혼을 했는데, 청초하고 순결한 줄 알았던 와이프가 왕년에 엄청 헤프게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할 것 같아요?' 라는 질문을 들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걸 상상하면서 자위할 거 같아요' 라고 대답했다.



아다치 미츠루, <TOUCH> 



 내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성관계에서의 과거란 페티시즘으로서나 유의미한 것이지, 결코 관계의 본질을 해칠만한 것은 못된다는 게 내 입장이다. 나는 새 스타킹과 찢어진 스타킹 모두 좋아한다. 중요한 건 그것이 스타킹이라는 점 자체이지, 누가 몇 번 입었고 얼마나 올이 나갔는 지는 별도의 페티시즘으로 다룰 문제이다. 적게 입었다면 적게 입은 대로, 자주 입었다면 자주 입은 대로 가치가 있다. 설거지론 같은 것에도 '론論'이라는 말이 붙는 게 정당하다면, 내가 이것에 스타킹론이라는 이름을 붙이더라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나는 설거지보다는 스타킹이 훨씬 좋다. 다른 사람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아. 내일 결혼식을 올릴 내 친구에게 심심한 축하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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