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여든여섯번째
한 번은 친구와 술을 마시다가 “너한테도 읽을 만한 책을 고르는 기준 같은 게 있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렇지만 나는 나 자신이 갖고 있는 기준에 대해 생각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
“뭘 읽어야겠다는 건 없는데. ‘이런 건 되도록 안 읽어야겠다’ 싶은 것들은 있지.”
“어? 뭘 안 읽는데?” 친구가 되물었다.
“흠.” 나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하고 생각에 빠진 것처럼 턱 주변을 매만졌다. 그러다 마침 생각나는 것이 있어 물었다. “어, 그 뭐냐…… 너는 책 같은 걸 왜 읽는다고 생각해?”
“그야 마음의 양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닐까?”
“아,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린데.”
“뭐? 그럼 뭐 때문에 책을 읽는데? 너는 직업 때문인가?”
“나는 그렇게 직업정신이 투철한 인간이 아니야. 너도 알겠지만…….”
“그럼 그렇게 읽어대는 다른 이유가 있나?”
“그야 당연히” 나는 말하다 말고 대접에 있던 막걸리를 한 사발 마셨다. 목구멍 밑에서 취기 섞인 공기가 빠져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야 당연히 사람들 앞에서 아는 척하려고 읽는 거지. 그것 말고 다른 게 있을 것 같냐? 마음의 양식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딴 씨발것들은 인터넷에 검색하고 유튜브에 요약 영상 같은 것만 봐도 충분히 쌓을 수 있어. 이런 마당에 책처럼 좆같은 걸 읽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다니까. 이렇게 정신 사나운 시대에 나만큼은 좀 특별하고 우아한 콘텐츠를 즐기고 있다. 그런 느낌에 지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건 나만 몰라야하고, 내가 아는 건 다른 사람들이 몰라야 가치가 있지. 여기까지 이해했나?”
“이해는 했는데, 내가 볼 때 너는 많이 취한 것 같다.” 친구가 대꾸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나는 일부러 못들은 체 하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책을 고를 때는 그거야. 웬만하면 나무위키에 항목이 존재하지 않고, 유튜브 검색 결과가 거의 없거나 빈약한 것들을 고르는 게 좋지. 왜? 그래야 씨발 아는 척을 하는 게 아주 수월해지거든. 문학에 대해 아는 척을 한다고 하면, 「위대한 개츠비」나 「페스트」같은 걸 개열심히 읽어봤자 이득보는 게 거의 없지. 그건 손해를 볼 수밖에 없어. 「인간실격」 같은 것도 너무 유명하니까 탈락이야. 이런 것들은 뭐, 말할 것도 없이 좋은 책이기는 하지만…… 말하자면 너무 기초소양 같은 게 돼버렸거든. 사람들이 대략적인 줄거리나 유명한 비평 같은 것들을 달달 외우고 다닌단 말이야. 대충 인터넷에 검색해서 나오는 결과들을 읽고 ‘아, 이건 이런 소설이구나. 어디 가서 이거 관련한 내용이 나오면 이렇게 말해야겠다’ 하고 머릿속에 입력해두는 거지. 책은 읽기 귀찮은데 어디서 못 배운 놈 취급은 받기 싫으니까…… 그렇담 나 같은 속물들은 어떻게 하느냐…… 딱 봐도 읽기 싫은 그런 책들만 골라서 읽는 거야. 「제 49호 품목의 경매」나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같은 거.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나 「루공마카르」의 「목로주점」 같은 것도 좋겠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 되는 거. 혼자 따로 노는 인간이 되는 거. 내가 봤을 때, 책의 순기능이라는 건 그런 것들뿐이야. 순 그런 것들밖에 없다고.”
“그래, 그래. 무슨 말인지 알았어. 근데 이제 여기도 문 닫을 시간 된 것 같은데. 슬슬 일어날까?”
“화장실부터 다녀오자. 바지가 씨발 터질 것 같아.” 나는 비척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좆, 같은. 마음의 양, 식 같은 소리하고, 있네.”
“나는 담배피고 올게.” 친구는 그렇게 말하고 진짜 담배를 피러 나갔다. 화장실에서 돌아와 옷을 챙기고 나가려고 보니 이미 계산을 끝낸 상태였다. 놈은 술집 앞에서 두 개비 째를 태우던 중이었다. 그리고 내가 걸어나오는 걸 빤히 보더니 “그럼 시간나면 니가 쓴 책이나 한 번 읽어봐야겠다. 그건 검색해봤자 거의 나오지도 않으니까” 하고 이죽거렸다.
“쳐웃기는.” 나는 대답했다. 그런 좆같은 말에 위로받는 자신이 좆같아서였다. 집에 돌아갈 시간이었다.
「잃는 사유」, 202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