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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Feb 14. 2022

여로에서 (7)

문제는 잊어버리는 순간 문제가 된다


“치타는 작은 도시야”

 안드레이는 내가 내릴 채비를 다 마치고 자리에 앉자마자 말했다. 나는 치타가 그리 큰 도시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꼭 뭘 보겠다는 마음으로 들르는 곳도 아니다. 치타를 포함한 모든 도시가 정류장이었다. 이 무의미한 도망행위를 길게 늘리기 위해. 내 한심한 사정따위 봐주지 않고 끝까지 달려가는 열차 때문에. 나는 일부러 표를 뚝뚝 끊어서 서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깨는 발언일지도 모르겠다. 난 사실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로망이니 뭐니 하는 건 관심이 없었다. 그런 건 일종의 사후처방으로서, ‘왜 하필 러시아에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적당히 둘러댈 구실을 줄 뿐이다.

 “아, 살면서 꼭 한 번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보고 싶었거든요…”

 거짓말이다. 중고등학생 시절 사회과부도를 보며 ‘어떤 느낌일까’ 하는 호기심은 갖고 있었지만. ‘죽기전에 이건 꼭 한 번 해보고 말겠어’ 같이 거창한 버킷리스트로 삼아본 적은 없다. 더구나 이런 한겨울에, 나날이 코로나가 팽창해가는 가운데, 알고 있는 러시아어라고는 ‘즈드라스부이체(안녕하세요)’ 뿐인 내가 반드시 여기 와야할 이유?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 준비도 마음가짐도 미흡하기 짝이 없었고, 어느모로보나 고생길이 환히 열리리라는 사실은 자명했다. 나는 멍청하지만, 그런 걸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둔감하지는 않다.

 열차는 차츰 속도를 줄이며 정차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간은 오전 여덟시 사십분이었다. 해는 떴지만 옅은 구름이 층층이 쌓여 흐리터분한 날씨였다.

 “지금보니 밖에 눈이 오는데” 나는 말했다.

 그러자 안드레이는 ‘러시아에 눈 오는 거 처음 보나’ 라는 식으로 어깨를 들썩였다. 나는 억울했다. 쌓여있는 건 많이 봐왔지만 이렇게 대놓고 내리는 걸 보긴 진짜 처음 같은데.



 치타역에 내린 직후에 받은 인상은 다음의 두 가지다. 하나는 ‘뭐야 그렇게 작은 도시 같지도 않네’, 나머지 하나는 ‘시발 진짜 존나 춥다 이러다 죽는 거 아니겠지’ 였다. 역 건물에 온도를 표시해주는 전광판—스키장 리프트 타고 제일 높은 곳까지 올라가면 하나씩 보이는—이 지금 내가 들이마시는 이 공기가 영하 이십사도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래도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불지 않아서 좀 나은 편이야” 안드레이가 말했다.

 “여기서 바람까지 더 불었으면 난 죽었어” 내가 대답했다.


 안드레이는 나를 숙소까지 데려다주려고 했다. 하지만 체크인이 오후 세 시부터여서, 적당한 카페테리아에 들러 식사를 하고 각자 갈 길을 가기로 정했다.

 안드레이는 “잠깐 친구 집에 짐 좀 놔두고 올게”라고 하고선 아주 젊고 날렵한 인상의 청년을 한 명 데리고 왔다. 블라디라는 이름의 그 친구는 나보다 나이가 네 살 어렸다. 다리가 얇고 키가 큰 것이 ‘막 새로사서 처음 깎은 연필’ 같은 느낌이었다. 피부는 창백하게 하얗고, 머리는 짧게 깎아 도회적인 분위기를 풍겼지만, 왠지모르게 안절부절하는 면이 있어 적당히 자기 나이처럼 어려 보였다.

 “만나서 반가워”

 “나도” 블라디가 말했다.

 다만 난데없이 모르는 동양인이랑 밥을 먹으려니 당황한 건지—그건 안드레이의 잘못이다—영 말수가 없어서 ‘내가 뭘 잘못했나’ 싶었지만… 그냥 영어를 모르는 것이라 안심했다. 그나마 안드레이가 중간 통역을 해주면서 ‘차를 좋아한다’ 거나 ‘운전하는 것도 좋아하고 고장이 나도 곧잘 알아서 수리한다’는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게임 좋아하냐고 물어봐” 나는 지극히 한국인스러운 질문을 청했다. 안드레이는 친절하게 흠흠, 하고 러시아어 모드로 전환한 다음, 블라디와 무어라 대화를 나누고 나서 이렇게 대답했다.

 “블라디는 월드오브탱크를 즐겨한대”

 “아, 그거”

 “아는 게임이야?” 안드레이가 물었다.

 “응. 해보진 않았지만” 내가 대답했다. “한국에서는 좀 매니악한 게이머들이 하는 느낌이지…”

 안드레이는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블라디에게 통역해주려는 것 같았다. 나는 ’T-34는 정말 놀라운 탱크다’ 같은 말로 급히 대화주제를 바꿔야 했다.




 세 명이 된 우리는 안드레이가 즐겨 다닌다는 카페 ‘아얀’으로 가서 이런저런 음식을 주문했다.

 십 분쯤 지나자 호밀로 만든 빵과 새빨간 수프같은 것이 서빙돼왔다. ‘러시아 전통 음식이라더니, 역시 빨간색이구만’ 이라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이건 보르쉬라는 거야. 이걸 먹으면 너도 이제 러시아인에 좀 더 가까워지는 거지. 러시아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거야”

 “뭔가 전동드릴 브랜드 같은 이름이네” 나는 푸흐, 하고 웃는 안드레이의 웃음을 흘겨보곤 수프를 한 숟갈 떠먹었다.

 “어때, 루크. 먹을만해?”

 “어, 음… 먹을만한 걸 넘어서… 나한테 엄청 익숙한 맛인데” 나는 뭔가 잘못 먹은 게 아닌가 싶어서 한 번 더 떠먹었다. 다시 먹어도 똑같다. 그 맛이다. 동네잔치같은 곳에서 주는 소고기무국이다… 농도가 아주 진하고, 한국무 대신 사탕무(비트)가 들어가있다는 걸 빼면 그냥 한국음식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흰 쌀밥이 아니라 퍽퍽한 호밀빵과 곁들여먹어야 한다는 게 함정이지만.

 밥값을 계산하려고 보니 이미 안드레이가 돈을 낸 뒤였다. 왜 이렇게 니가 다 사냐고 물어보니까 “나중에 우리가 한국에 가면 네가 챙겨줄 거잖아”라는 기특한 대답을 해왔다. 이런 대사는 어느 유튜브 채널에서 보고 연습해오는 걸까. 아무튼 대단한 인간이다.

 우리는 카페 앞에 위치한 레닌스퀘어에서 사진을 찍고 헤어졌다.

 “너희를 만나서 기뻤어. 정말 고마워” 나는 안드레이, 블라디와 차례로 포옹을 하고 나서 말했다. 뒤돌아보면 차가운 광장. 러시아 어디에나 있는 레닌 동상이 다시금 혼자가 된 나를 반긴다. 이건 나쁘지 않군. 가끔씩 ‘우리’가 됐다가 ‘나’로 돌아오는 기분. 하늘은 정오를 앞두고 화사하게 빛난다. 안드레이, 말을 걸고 밥을 사줘서 고마워. 블라디, 월드오브탱크는 적당히 하도록 해….

 헤어지면서 “언제든지 무슨 문제가 생기면 인스타그램으로 연락해. 바로 달려갈 순 없어도 되도록 도와주도록 할테니까” 라고 말한 안드레이는, 며칠째 내 디엠을 씹고 있다.



 나는 시간을 때울겸해서 광장 주변을 좀 거닐다가, 근처에 ‘시베리아 전쟁 박물관’이라는 곳이 있다는 걸 알게돼 곧장 찾아 들어갔다. 관내 관계자들은 영어는 못했지만 매우 친절했다. 여기선 과거의 유물이 꽤 흔한 것일까. 층층마다 소련시절 견인포를 복도 중앙에 방치해놓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2차대전의 영웅 주코프 장군의 사진이 걸려 있는가하면, 나치와 일본제국에서 빼앗은 전리품도 전시돼 있어 꽤 흥미로웠다. 다만 외국인 관광객은 거의 오지 않는 곳인듯, 설명이 죄다 러시아어로밖에 돼있지 않아 역사적 맥락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숙소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글을 쓰다가 체크인을 하러 들어갔다. 이젠 숙소 체크인에도 꽤 요령이 생겨서, 예약내역을 보여주는 것보단 곧장 여권을 내미는 쪽이 낫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 꼭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쉬또… 엄…”

  내가 러시아어를 못하는 걸 알았는지, 카운터 직원은 번역앱을 켜서 뚜뚜뚜 뭐라 입력하는 듯하더니 내게 영어로 된 메시지를 보여줬다.

 ‘님 이민카드 어딨음? Where is your Immigration Card?’

 나도 번역기를 켜서 입력했다.

 ‘이민카드가 뭔데요’

 ‘입출국할 때 뭐 받지 않았음?’

 엥, 그랬나?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 솔직히 그게 뭔지도 모르겠는데….

 일단 찾아보라고 해서 찾아봤지만 있을리 없었다. 직원이 친절하게 ‘이것이 이미그레이션 카드다’ 하고 견본도 보여줬지만 그런 건 본 기억 자체가 없었다. 나는 직원에게 못 찾겠다고,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거냐고 물었다. 이전 숙소에서는 이민카드 같은 거 없이 잘만 숙박했었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그러자 돌아오는 직원의 대답.

 ‘만약 그거 없으면 우리는 체크인 못 해줘요. 그럴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어요’

 …뭐?


 “아, 그거~” 용케 영사관에 연락이 닿아 사정을 말하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출입국등록증이라고 있거든요. 뭐 작은 한인민박이나 미등록 숙박업소 같은 곳에선 그거 없이도 해주는데. 좀 큰 호텔이나 정식등록된 호스텔 같은 곳에서는 그거 없이 체크인이 안 될 거에요”

 “그런데 전 그런 걸 받은 기억이 없는데요”

 “그럴리가요? 받았는데 잊어버리셨거나 한 거겠죠”

 이건 가드불능기술이다. 아무리 나의 기억상실을 호소해봐야, 정해진 행정절차에 도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나는 ‘그럼 그걸 다시 발급받는 방법은 없는지’ 물었다.

 “일단 경찰서에 가세요”

 “경찰서요?”

 “네. 뭐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되는데요… 잘하면 관공서에서 바로 재발급 받을 수도 있어요. 운이 나쁘면 경찰서에서 분실확인서 떼오라고 하겠지만… 이렇게 말하긴 좀 뭣한데, 약간은 운에 달려있는 문제입니다”

 정말 솔직담백한 답변이었다.

 그 얘기를 숙소측에다 전하자 직원 한 분이 나를 가장 가까운 관공서에 데려다줬다.

 마리야는 삼십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중년여성이었다. 내게는 이모뻘 같은 분위기였는데, 그녀를 따라서 관공서며 경찰서 로비를 따라다니자니 기분이 복잡미묘했다. 마치 사고뭉치 중학생이 수습하는 담임선생님을 쫓아다니는 듯한 그림이었다.

 공무원들과의 대화가 길어지고, 내가 아무것도 이해를 못한 채 불안해하고 있자, 마리야는 번역앱으로 “걱정하지마세요. 모든 게 잘 풀릴 거니까요”라고 내게 말해줬다. 나는 그 말에 이상하리만큼 위로를 받아 곧 편안해졌다. 이정도로 신경써줬는데 안 된다고 하면, 그 땐 기꺼이 밖에서 자다가 얼어죽어도 할 말이 없으리라.



 하지만 마리야의 헌신적인 도움은 머잖아 열매를 맺어—왔다갔다하는 택시비까지 그녀가 다 내주었다—나는 출입국등록증 사본을 재발급받을 수 있었다. 나는 “대체 어떻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일지에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 뿐이다”라고 (번역앱으로)써서 마리야에게 보여주었다. 마리야의 대답은 “아, 하라쇼(좋죠)” 였다. 그게 다였다. 그리고 가버렸다. 과연 이것이 마더 러시아. 장총을 든 어머니….

 오전의 보르쉬로 동양적 혀감각에 눈이 뜨인 나는, 숙소 근처 가장 저렴하다는 일식집을 찾아가 저녁을 해결하기로 했다.

 러시아인들은 일식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다. 특히 초밥에 대한 사랑은 나같은 이방인에게도 선명하게 보인다. 그렇지만 한국이나 일본에서 먹는 초밥과는 조금 다른 것이, 러시아 입맛으로 개조된 롤 타입의 스시를 많이 파는 편이다. 일례로, 내가 치타에서 찾아간 간 ‘니야마’에서는 김말이 초밥에다 튀김옷을 입힌 뒤 사워크림이나 브라운 소스를 발라 내왔다. 맛은 좋았지만 가격치고 양이 너무 많아서—나름 저렴한 세트를 시켰는데 큼직한 롤이 열 여덟개나 나왔다—배가 빵빵해졌다.

 자기전에 소화는 시켜야 하니 숙소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아까는 춥고 배도 고파서 걷기 힘들었는데, 이제는 춥고 배가 불러서 걷기 힘들었다.



 돌아가는 길에 작은 골목가게를 발견했다. 몸도 녹일겸 들어갔는데 뭔가 우유같기도 하고 드링킹 요거트 같기도 한 음료용기가 눈에 띄었다. ‘2.5%’ 라고 적혀있는 걸 보니 술 같기도 하고… 찾아보니 케피르라는 저도수의 발효주로, 소젖이나 말젖 등을 숙성시켜 만든 일종의 우유술이라는 듯했다.

 우유술이라니. 색도 뽀얗고 액도 걸쭉한 것이, 왜인지 달짝지근한 아침햇살 맛에 소화도 촉진시켜줄 것 같아서 덜컥 한 팩을 사서 돌아왔다.

 결과적으로 나의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케피르는 ‘까먹고 사물함에 넣어놨다가 유통기한이 두 달 지난 급식우유’ 와 정확히 똑같은 냄새와 맛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이라면 마땅히 폐기처분했을 이 유제품을, 몽골 등지와 이 시베리아 인근 도시에선 유용한 식음료로 활용하고 있다니. 문화차이라는 건 실감할수록 새로운 것들 뿐이다… 돈이 아까워 끝까지 다 마시긴 했는데, 소화는 뭐라 말할 수가 없을 정도로 잘 됐다. 오분 만에 폭풍설사로 변기를 터트릴뻔 했다. 나는 모처럼 텅 비어있는 기분으로 잠에 들었지만, 이따금씩 은은한 발효형 취기가 올라와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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