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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Nov 12. 2022

슬퍼하기엔 가벼운 죽음의 무게



<죽은 고양이>, 테오도르 제리코. 1821년.



 수백년 전 전염병이 창궐하던 시기의 유럽에서는, 사람이 죽을 때마다 마을 교회에 있는 종을 울렸다고 한다. 그 종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또 누군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아는 동시에 ‘누군가의 죽음으로 울린 종소리인지’를 궁금해했다. 그 종소리가 혹시 나와 관련된 사람의 것이 아닐까, 혹시 내 소중한 가족이나 친척의 죽음을 알리는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하다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밝혀진 후에야 안심을 하며 일상생활을 이어가는 것이다.


 이태원에 몰린 인파로 인해 사람들이 깔려 숨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처음에 한 생각은 ‘안타깝다’ 였다. 할로윈인지 뭔지, 그날밤 그 지역을 찾은 사람들의 생각은 제각각이었겠지만, 적어도 그런 죽음을 바라거나 예상하고 간 사람은 없었을 테니까…… 단지 나로선, 그런 종류의 사고가 났다는 사실 자체는 놀랍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몇 년 전, 코로나가 터지기 전쯤에 친구를 보러 이태원에 가본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그 때는 할로윈 무렵이었다. 이번만큼은 아닐지몰라도 입이 떡 벌어질만큼 사람이 많았다. 그 좁아터진 길목길목에 할로윈마다 구름떼같은 인파가 몰려드는데, 이러다 언젠가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위태로워보였던 기억이 있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당최 할로윈이 이들에게 어떤 의미이기에? 같은 궁금증도 있었다. 애당초 나는 그렇게나 사람이 많은 장소를 좋아하지 않고, 웬만하면 피해다니려는 습성을 가진 사람이다. 한데 왜 그런 곳을 찾아서 가는지. 내게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라 대충 ‘세상에는 나와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 정도의 결론을 내리고 덮어두었다. 그땐 그랬었는데.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왜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가면서, 그리도 혼잡한 곳에 스스로 발을 들이는지.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서로 뒤엉켜 짓눌리고 비명하던 그때. 나는 평소처럼 집에서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쩌면 인터넷을 자주하는 사람들 중에는 나같은 사람이 많아서, 철없는 젊은이들이 괜히 그런데 가서 얼마쯤 죽음을 자초한 것은 아닌지 의아한 이들도 있을지 모른다.

세 자릿수가 넘는 사상자가 발생한 비극이라는 점에서, 세월호 참사와 어제 사건을 비교하는 사람도 있다. 둘 중에 어떤 사건이 더 비극적인지, 피해자들의 동기며 순수성 따위가 어떤지를 저울질하는 이도 보인다. 한 쪽은 학교에서 가는 수학여행 도중에 시키는대로 하다 죽은 아이들이고, 나머지 한 쪽은 제멋대로 유흥을 즐기러 몰려갔다가 운이 없어 깔려죽은 어른들 아니냐는 식이다. 마치 세상에는 마땅히 슬퍼해야할 죽음과, 그러지 않아도 될만큼 시덥잖은 죽음이 따로 있다는 듯이.


 가끔 사람들은 감정이라는 것을 아주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개념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참을 수 없는 행복감, 견디기 어려운 우울감 같은 것들만이 진실된 감정이며, 그 외에 자신의 이성을 압도하지 못하는 것들은 조금쯤 겉치레로까지 치부되는 경향마저 있다. 하지만 나는 감정이야말로, 그 중에 타인에 대한 슬픔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노력해야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자연스런 감정을 ‘노력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되물을지 모르겠지만.


 나 자신, 나와 관계된 이들, 혹은 나와 별 다를 바 없는 이들의 비극에 슬퍼하기란 참 쉬운 일이다. 거기에 필요한 노력이란 흐르는 눈물을 닦거나, 꼴사납지 않게 고개를 치켜드는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타인들…… 내가 모르던 이들과, 관심도 없었던 이름들과, 나와 닮기는커녕 정반대의 면모를 가진 사람들의 슬픔을 이해하려면, 어쨌거나 노력하는 수밖에는 없다. 나와 다른 상황, 생각, 가치관, 그리고 그 당시의 절망과 처절함까지. 어쩌면 나나 내 주변인이 처했었을지 모를 그들의 입장을 애써 그려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크고 작은 모든 사건에 으레 따라붙는 이야기처럼, 이번 참사에 대해서도 ‘안 됐지만 마땅히 슬퍼해야할만큼 지독한 사건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나 내 주변사람은 할로윈에 코스튬플레이를 하고 발딛을 곳도 없는 이태원에 가서 그런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이할 일이 없다고 생각해서, 소위 말해 그만큼의 인싸거나 인싸 문화를 즐기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서. 전혀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라도 그런 것이 다소 이기적이라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아주 틀렸다거나 사악한 발상이라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그런 이들에게, 나는 한 번쯤 물어보고는 싶다. 그런 당신에게 ‘슬퍼해야 마땅할 죽음’이란 대체 어떤 것인지. 당신이 사적으로 아는 모든 사람인지. 절친한 친구와 이름 정도나 아는 사이인지. 좋아하는 연예인인지. 사랑하는 연인이나 가족인지. 혹은 그 누구도 아닌 당신 스스로 뿐인지…… 어쩌면 그런 당신도 당신의 죽음에 대해, 죽고 난 이후의 차례에 대해. 나의 장례식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와서 진심어린 눈물을 흘려줄지를, 살면서 한 번쯤 상상하거나 염려해본 적이 있진 않은지 말이다.


 영국의 목사이자 시인이었던 존 던은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 알고자 사람을 보내지 말라’고 썼다. 모든 인간은 서로 연결돼 있고, 어느 누구도 섬이 아니며, 그 어떤 사람의 죽음조차 나를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종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들 자신을 위해 울리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충분하게 무거운 죽음도, 슬퍼하기엔 가벼운 죽음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죽음이 인류의 죽음이자, 내 일부분의 죽음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어제만해도 안타까웠던 나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두렵고 슬프다. 악인의 교수형에조차 말못할 쓸쓸함을 느끼는 것이 인간이라면, 성인의 죽음 앞에서도 노력해 눈물흘리는 것이 사람이라면. 나 아닌 타인의 종소리에 무심해져가는 우리는 대체 어떤 마지막을 향해 가는가. 사람도 인간도 아닌, 그 누구도 관심두지 않는 소중하고 특별한 나 하나의 종소리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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