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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Apr 12. 2019

습작

열여덟번째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을 때였다. 나는 몇 없는 친구의 제안으로 집 근처에 있는 교회의 성경캠프에 따라갔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차에 올라타서는, 집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나 떨어진 어느 유스호스텔에 갔다. 성경캠프에는 내 또래인 아이들이 서른 명, 교사 역할을 하는 이십 대 초반의 대학생이 다섯 명쯤 있었고, 남녀 혼성인 여느 캠프들이 으레 그렇듯 남자가 여자보다 예닐곱 명은 많았다. 그래서 뭇 남자들은 '여자들의 관심'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놓고 이박삼일 동안 긴장감 넘치는 싸움을 벌이곤 했던 것이다.


내가 도연이를 처음 본 것은 그 캠프에서였다. 그러나 나는 그때 그 이박삼일 간의 캠프에서, 이제 막 호르몬을 뿜어내기 시작하는 남녀가 만들어내는 어떤 긴장감의 중심에 도연이가 있었노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열여섯 살이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발육 상태는 차치하고서라도, 개울물처럼 투명하고 빛나는 뽀얀 살결이나 고혹적인 눈매, 아득할 정도로 새카만 검은자위, 새침한 일자 눈썹, 도톰하게 오른 입술과 버건디색 틴트, 봉긋한 가슴과 허벅다리로부터 종아리와 복숭아뼈까지 하얗게 늘어트린 곡선이며 작은 귀 앞쪽에 아기처럼 나있는 십수 가닥의 솜털 같은 것들을 보게 된다면 그 누구라도 나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당시의 내가 보고 들은 것이라곤 도연이의 외양과 간지러운 목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 지금까지의 내 삶에서 '첫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언제였느냐고 묻는다면 십중팔구는 그 순간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하기야 그 시절에 숫기라는 것이 조금이나마 있었던 남자들 가운데서, 도연이를 보고도 '첫사랑'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느냐 싶다. 다만 도연이의 주변에는 얄상하고 구불구불한 오빠들이 항상 보디가드처럼 둘러싸고 있었고, 숫기는 커녕 소심하기 짝이 없었던 나로서는 도연이와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캠프에서 돌아오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


-


도연이를 다시 보게 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캠프에서 돌아온 직후, 한동안 나는 먼발치에서 쳐다봤던 도연이의 모습을 열병처럼 앓았다. 다만 얼마지 않아서 집 근처에 있는 평준화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됐고, 매일같이 학원이며 독서실을 오다니면서 열병은 자못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희석됐다. 사실은 까맣게 있고 있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나는 전날 모의고사에서 터무니없는 점수를 받았고, 부모님의 등쌀에 못 이겨 자정 가까운 시간까지 야간자습을 하다가 돌아가던 중이었다. 평소보다 더 깜깜한 도로가에는 가로등의 오렌지색 불빛이 듬성듬성 길을 밝히고 있었다. 그 불빛 가운데 한 곳에 교복을 입은 남녀의 무리가 오토바이 한 대를 둘러싼 채로 서 있었다. 그 무리의 한가운데에는 유독 눈에 띄는 여학생 한 명이 연기가 풀풀 나는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는데, 다름 아닌 도연이었다. 옷도 화장도 달라진 채였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도연이 옆에는 왁스로 멋지게 머리를 세운 남자가 검은 바탕에 빨간색이 섞인 바람막이를 걸친 채 있었다. 체격이며 풍기는 분위기로 미루어보건대 그 무리에서 대장 노릇을 하고 있는 녀석이 틀림없었다. 나는 도연이를 다시 본 것에 반가운 마음도 들었지만, 혼자였던 데다 워낙 인적이 뜸한 곳이어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걸음을 재촉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대장처럼 보이는 남학생이 대뜸 "야! 너 일로와 봐!"하고 소리를 쳤다. 나는 못 들은 척 시선도 돌리지 않고 걸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 골목대장은 내게 가까이 오라는 듯이 손짓했다. 그 순간의 난 꼼짝없이 당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돈도 뺏기고 몇 대 처맞은 다음에 집에 갈 수밖에 없겠군, 가까스로 운명을 받아들이려던 찰나였다. 도연이 가까이 걸어오던 날 보고는, 남학생에게 뭐라 말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돌연 어떤 심정의 변화가 있었는지, 내가 가까이 가자마자 "야, 됐어, 불러서 미안해. 가던 길 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겁이 나서, 코 앞에 있는 도연이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돌아 나왔다. 머잖아 내 등 뒤로 젊은 남녀가 무어라 소리치며 싸우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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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이 지나서 나는 내가 살던 도시에 있는 한 대학에 진학했다. 부모님이 내게 걸던 기대만큼 대단한 학교는 아니었지만, 같은 지역에 있던 학교들 가운데서는 가장 입결이 높은 학교였던 데다 국립대이기도 했다. 뭣보다 하나뿐인 아들이 멀리 가지 않는다는 것에, 내색은 않으셔도 적이 마음이 놓이셨던 모양새였다.


국립대 주변은 대학가답게 꽤 번화한 편이었다. 그 대학가에는 당연한 수순처럼 우리 대학의 이름이 따라붙었지만, 근처에는 2년제 전문대학도 몇 곳 있어서 밤만 되면 이상야릇한 분위기를 풍기곤 했다. 아무렴 전문대 학생들은 소위 말하는 '노는 애들' 출신이 많았는데, 상권을 겹쳐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이 치러지는 일도 잦았다. 다만 나는 시험 준비고 뭐고 해서 여전히 공부벌레 축에 속하는 인간이었다. 그런 번잡스러운 분위기에 익숙하지도 않았고, 술을 즐기는 편도 아니라 친구들이 가끔 억지로 데려가는 일만 아니면 대학가를 들르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근처 전문대 여학생들과의 과팅이 유행한 것은 내가 대학에서 세 번째 학기에 접어들 즈음이었다. 우리 학교에는 자신이 '그 지역에서 가장 잘 나가는 국립대 학생'이라는 것을 자신의 가장 큰 프라이드로 여기는 녀석들이 많았다. '근처 전문대 년들이 우리 학교 남자들에게 사족을 못 쓴다' '같이 술만 마셨다 하면 쉽게 다리를 벌린다' 같은 헛소문을 내고, 또 철석같이 믿는 놈들은 대개 이런 부류의 남자들이었다.


그때 나와 방을 함께 쓰던 친구는 소위 말하는 엄마 친구 아들의 전형이었다. '젊음이야말로 한 순간이다'라는 말을 입에 붙이고 사는 인간으로, 매일 같이 술이 떡이 되도록 놀아재끼는데도 좋은 학점을 받아갔다. 또 키도 훤칠하고 얼굴도 잘생겨서 어딜 가든지 동년배 여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난 그 친구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진 않지만, 그렇다고 흔히 여자들이 머릿속에 그리는 장밋빛 로맨스처럼 낭만적이고 우아한 인간도 아니다.


녀석은 관심도 없는 날 붙잡고 모르는 여자와의 섹스가 얼마나 환상적인지를 이야기하는가 하면, 시도 때도 없이 운을 떼서는 새벽에도 쉬지 않고 음담패설을 내뱉었다. 악의는 물론 없었고 재미는 있는 놈이었지만 우아한 면은커녕 천박한 쪽의 사람이었다.


한 번은 그랬다. 나는 그날 오전에 있는 기말시험 준비로 새벽녘부터 일어나 자습을 하고 있었는데, 녀석이 아침 아주 일찍, 산발된 머리를 하고 기숙사 방에 돌아온 것이다. 내가 무슨 일로 이 시간에 다 왔느냐고 묻자, 놈은 실실 웃으면서 '내 인생에서 가장 예쁜 여자를 따먹고 왔다'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것이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더니 사진 한 장을 내게 보여줬다.


젊은 여자 한 명이 음부를 다 내놓고 모텔 침대 위에 쓰러져있는 사진이었다. 휴대폰 카메라 성능이 얼마나 좋은지, 멀리서 보아도 도연이라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선명한 사진이었다. 녀석은 도연이와 한 달가량 사귀다 헤어졌는데, 가끔 술을 마실 때마다 '먹다 버리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예뻤던 전문대년'이라는 호칭으로 도연이에 대한 얘기를 꺼내곤 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


우리 병원에 도연이라는 이름의 환자가 처음 온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나는 쌍둥이 아이를 끼고, 몇 년 간의 시간 속에 풍화된 피부와 표정을 한 채 찾아온 그녀를 보고 대번에 도연이라는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운 이름이었고, 그리운 만큼 이제와 슬픈 이름이었다. 나는 날 알아보지 못하는 도연이에게 정밀검사를 해야겠다고 말했다. 내 말에 도연이는 가장 먼저 비용을 걱정하는 것 같았다. 나는 비용은 걱정하지 말고 일단은 필요한 검사가 먼저라고 했다.


단기적으로 봤을 때, 나는 의사로서 정확한 소견을 냈다. 처음에 도연이는 자신이 자궁경부암 말기 환자라는 것을 믿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내게, 선생님, 어떤 방법이라도 있는 거죠, 하고 울면서 매달렸다. 난 도연이에게 '우선 아이 아버지에게 알리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도연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나도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나는 진료비를 최대한 경감하는 방향으로 치료계획을 잡았다. 그리고 사비를 털어 도연이의 진료비 일부를 보탰다. 아내는 나더러 미친 새끼라고 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는 금방이라도 미쳐버릴 것 같았다. 도연이는 항암치료를 한 달간 받으면서 상황이 꽤 호전되는 것처럼 보였다.


두 달 뒤, 우리 병원에서 작게 치러진 도연이의 장례식에는 어린 쌍둥이 딸 두 아이와 도연이의 늙은 어머니, 그리고 학창 시절 친했던 친구 몇 명이 왔을 뿐 조촐했다. 나는 아내와 함께 도연이의 영정에 절을 올렸다. 도연이는 영정 너머로 웃음을 짓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처음 성경캠프에서 보았던 것 이상으로 아름답게 느껴졌다.


장례식장에서 나오면서, 아내는 그 도연이라는 여자가 견딜 수 없을 만큼 불쌍하다고 했다. 어떻게 아이 아버지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을 수 있냐는 것이다. 나는 그 말에, 꽃도 너무 강한 햇살을 받으면 말라죽는다고 대답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아름다움을 가진 여자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해바라기>, 201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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