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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Apr 13. 2019

습작

열아홉번째 

장담컨대 처음부터 저런 눈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다만 민서처럼 태어날 때부터 재벌가 창업주의 세 번째 손녀일 수는 있을 것이다. 또, 민서와 민서 주위를 둘러싼 환경들이 그런 기묘한 눈빛을 만드는데 넘칠 만큼 기여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 각종 미디어에서의 영향 때문인지, 재벌가에 대한 환상과 낭만은 뭇사람들에게 신화처럼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당신도 삶 가운데 비극적인 상황이 닥칠 때마다―특히 금전적인 요인으로 인한 것일 때― '내가 재벌가의 숨겨둔 자식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같이 철없는 상상을 해본 일이 있을 것이다. 나는 다행히도 꽤 넉넉한 집안의 장손으로 자랐기 때문에 이 같은 생각은 거의 하지 않았다. 다섯 살 난 아들을 미국에 유학 보내고, 육 년 동안 학업에 정진시키는데 어떤 금전적 어려움도 없었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되리라 생각한다.


다만 수능을 앞두고 대치동 등지에서 받았던 고액과외만큼은 가계에 퍽 지장이 됐던 모양이다. 때마침 들이닥친 불황이 겹친 나머지 집안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목소리 높여 싸우는 일이 잦았다. 그때의 나는 '왜 우리 집안은 강남에 건물 하나 사놓지 않았을까'하는 철없는 생각을 하곤 했다. 아무렴 사람이란 오직 자신에게 부족한 것만 보고 좇으며 사는 동물이므로.


아무튼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지난한 협상 끝에 나를 월 수백만 원에 달하는 기숙학원에 등록시켰다. 청담동에 있는 한 건물을 통째로 빌린 그 학원은 유명 연예인들이 많이 산다는 주택가 변두리에 있었다. 한 반에는 평균적으로 일곱 명 정도의 학생이 있었는데, 과목별로 학생 수보다 많은 열 명의 스타 강사가 따라붙어서는 기출 분석과 논술, 심층면접이며 입시 컨설팅에 이르기까지 명문대 진학을 위해 필요한 거의 모든 것들을 제공했다.


민서가 학원에 등록한 것은 교육청에서 실시하는 유월 모의고사가 막 끝났을 때였다. 학원에서는 제각기 오답노트와 기출 유형분석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을 무렵이었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모의고사 성적이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대로 담당 강사와 부모에게 잔뜩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그즈음의 학원은 늘 조용하고 축 처진 분위기가 유지되곤 했다.


그러나 내가 있던 반만큼은 민서의 합류로 인해 한동안 떠들썩했다. 면학분위기 유지를 위해 원칙상 중도 합류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 그 학원의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학원이 원칙을 깨 가면서 까지 그 초췌한 몰골의 여학생을 들여보낸 이유가, 그저 '재벌가의 손녀이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는 걷잡을 수 없었다. 학원 역시 그 소문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맞다' 또는 '아니다' 하는 식으로 해명하는 것도 이상하다고 여겼는지 원장도 강사도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기 바빴다.


그렇다고 민서가 우리 학원에 다닐 자격이 없는 만큼 수준이 낮았던 것은 아니다. 나와 같은 조기유학생 출신이었던 민서는 영어를 무척 잘했다. 당시 학원에서도 영어회화를 원어민 수준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나와 민서 정도였다. 그래서 프리토킹 시간 때마다 우리 둘이서 유독 자주 이야기를 나눴던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었던 셈이다.


물론 나라고 뭇 친구들처럼 '재벌 3세'로서의 민서가 두렵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다만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대화를 하다 보면 가까워질 수밖에는 없다. 하루 종일 거의 같은 공간에 놓이게 된다면 두말할 것도 없다. 나는 민서가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는 실질적인 이중국적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또, 재외국민 전형을 포기하고 수능점수로만 대학에 갈 작정이라는 말도 들었다. 나는 어째서 재외국민 전형처럼 편하고 쉬운 길로 가지 않느냐고 물으려 했지만, 이 말을 꺼내던 민서가 유달리 결의에 찬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처 질문하지 못했다.


그러나 민서는 최종적으로 재외국민 전형을 선택했다. 사실상 입시전략을 확정해야 하는 시점에서조차 수능 점수가 변변찮았기 때문이다. 영어와 탐구에서만큼은 학원 안에서도 최고 성적이었지만, 국어와 수학이 늘 민서의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 수능만 보고 달려가던 민서가 어느 날 문득 재외국민 전형으로 방향을 바꾸고, 일찌감치 국내 최고 수준의 사립대학으로부터 합격통지를 받은 뒤부터는 얼굴조차 보기 힘들어졌다. 그러자 다른 원생들은 그런 민서를 더러 '거봐, 결국 재벌 3세라는 것들은……'하고 운을 떼서 삼십 분이 넘도록 험담을 주고받았다. 노력도 하지 않고 너무 쉽게 결과를 얻어간다느니, 인생 참 편하게 살아서 좋겠다느니 하는 얘기들 말이다.


다만 민서는 마지막 모의고사 성적이 나온 직후에, '뭐, 나오는 대로 가는 수밖에 없잖아. 그저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지' 하며 웃어 보였다. 적어도 내게는 민서가 '재외국민 전형'으로 전환할 어떤 기미도 느껴지지 않았고, 정말로 이 재벌가의 손녀가 본인 점수에 따라 지방에 있는 무명 대학에 진학할 계획인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난 민서로부터 모종의 배신감까지 느꼈고, 다른 친구들이 하던 뒷담화에 기꺼이 참여해 여러 가지 소스를 제공하기도 했던 것이다.


나는 민서와 나눴던 모든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어쩌면 민서가 꾹꾹 눌러 참아오다가, 겨우 나 정도에 불과한 인간관계에게라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들이었다. 그중에는 민서의 어머니가 창업주의 본처가 아닌 첩의 딸이라는 사실도 있었는데, 당시의 나로선 그 어머니가 민서에게 어떤 식으로든 압박을 넣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서는 대학생이 된 이후로도 내게 간헐적인 연락을 해왔다. 나는 민서에게 '친구'라 부를만한 존재가 어지간히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연민이나 동정 같은 감정으로 연락을 이어나갔는데, 어느 날 느닷없이 만나 잠자리를 하고 나서는 이마저도 애매하게 돼버렸던 것이다.


당시 여자 친구가 있었던 나는 민서에게 서서히 거리를 두기 시작했는데, 민서는 어떻게든 이를 돌려보려는 듯 안간힘을 쓰는 모양이었다. 야밤에 불러내 값비싼 레스토랑과 바에 데려갔고, 수백만 원 하는 존롭 구두를 사서 내게 선물하는가 하면, 요즘 신차 중에 갖고 싶은 게 없냐고 넌지시 물어보기도 했다. 나는 민서로부터 얻는 금전적 어드밴티지에 만족하고 있었지만, 덜컥 차까지 받아버리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 사양했다. 물론 주위에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나올 것도 걱정이 됐던 것 같다.


민서는 심지어 내게 결혼하자는 말까지 했다. 호주든 뉴질랜드든 가서 집 한 채를 지은 다음에 오손도손 살아보자는 것이었다. 출산은 무섭지만 내 아이라면 열 명도 넘게 낳아주겠다고 했다. 나는 어쩐지 이 말에 견딜 수 없이 흥분해버려서, 그 날 민서에게 몇 번이나 사정한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밤새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더 이상 못 만나겠다, 잘 지내라'는 메시지만 남기고 연락을 차단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는, 내가 민서의 몸과 경제적 여건을 마음껏 이용하다 버린 것처럼 보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재벌 3세가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기묘한 열등감, 셀프 메이드에 대한 집착, 또 한편으로 포기할 수 없는 귀족적 지위에 대한 이중성과 진정성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 같은 것들이, 당시의 내게 얼마나 많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줬는지는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면에서 나는 민서로부터 오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감수하는 대신 이십 대 젊은 여성의 육체와 재벌 3세로서 발휘할 수 있는 금전적 지위를 보상받았던 셈이다.


한편 나는 민서의 연락을 차단한 뒤에도 여기저기서 근황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민서의 다음 타겟이 나와 친한 고등학교 동창이었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아이돌 연습생으로 발탁되면서 학교를 자퇴했는데, 느닷없이 연락이 와서는 자신의 여자 친구가 네 전 여자 친구라는 말을 꺼내는 것이다. 그때의 나는 조금 싱숭생숭한 기분이었다. 친구가 그런 사실에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구멍동서'같은 단어를 꺼내며 한사코 친한 척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왜 이렇게 좋은 물주를 놓쳤는지 모르겠다' '좀 귀찮게 한다는 거 빼면 완벽하다' '지금 살고 있는 오피스텔도 민서가 해줬다'는 말을 꺼내놓았다.


그러나 민서가 내게 줬던 정신적 스트레스가 그 친구에게도 만만찮았던 것인지, 언제부턴가 시도 때도 없이 내게 연락을 해와서는 '얘가 주제도 모르고 자기도 아이돌 시켜달라고 조른다'거나 '갑자기 바리스타를 준비한다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짜증이 난다. 어차피 얼마 못 가 그만둘 것이 뻔하다' '이번에는 강남 쪽 클럽 경영을 해보고 싶다는데 정말 상식이 안 통하는 년 같다' '한 시간도 못 걷는 년이 워킹홀리데이를 간다는데 뭐라고 욕을 해줘야 되겠냐' '운전기사 대신 운전하다가 사고를 내서 지 혼자 병원에 입원했다' 같은 이야기들을 쉴 새 없이 쏟아냈다. 그러나 이마저도 호빠에 벌써 일억 넘는 돈을 들이붓는데 더 이상 못 견디겠다, 는 연락 뒤로는 영영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다만 2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민서의 근황을 아홉 시 뉴스로 확인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금쯤 민서가 그저 잘 살고 있을 줄 알았던 나로선 너무도 충격적인 소식이었고, 한동안은 죄책감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이 글을 남기는 것은 민서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고 싶은, 내 이기적인 발상으로부터 나온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가 이런 글을 쓴다고 해서 그녀가 저지른 마약밀수, 흡입 같은 불법적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주 잠깐이나마 민서의 곁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민서를 '재벌 3세'라는 프레임에만 맞춰 욕하고 비난한다는 것이 슬프고 안타까울 뿐이다.


민서가 재벌가의 손녀로서 남보다 부유한 삶을 살았던 건 사실이지만, 그 어떤 물질적 부로도 채울 수 없는 정서적 결핍과 피상적 인간관계에 시달리며 살아온 것 역시 사실이다. 또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 어떤 시도를 하든, 그저 재벌 3세로서밖에 알려질 수 없다는 비극적 시선도 이런 결과를 불러오는데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단순히 이 기사에 실린 사진 한 장으로 민서를 판단하기 바쁘다. 그러나 사진 속 민서의 저 오만하고 독선적인 눈빛은, 불과 몇 년 전 나와 함께 학원을 다니던 시절만 해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사안이 중대한 만큼 민서는 법과 대중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저 내 이기적인 욕심으로 말미암아, 불쌍하기 짝이 없는 저 민서라는 아이가 이제부터라도 자신의 삶을 살 수 있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추신 : 부디 익명으로 글을 남기는 것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현재 나는 연수원에 있는 입장이라서 어떤 식으로든 법적 문제에 휘말리면 무척 골치 아파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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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7

비추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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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dlrjfxxxx03 : 이런 건 당연히 인증해야하는 거 아니냐. 영상 어디감?

eocpxx42 : ㅗㅜㅑ;; 거의 야설급인데?ㅋㅋㅋㅋㅋㅋㅋ

dhoxx : 쉴드 칠 걸 쳐라. 재벌딸로 개편하게 살다가 뽕빨던거 걸린 건데. 이번에도 돈주고 풀려나겠지

qhrhdlTsixxxx94 : 재벌집 딸 실컷 따먹고 지금은 연수원이라니 ㅁㅊ다 ㅁㅊ어 존나 부럽네


<판도라>, 201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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