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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Apr 14. 2019

습작

스무번째

"그냥 돈가스 하나랑, 비빔밥이요"


"아, 그래. 계산은 식권?"


"네" 내가 말했다. 홀에 있던 아주머니는, 돈가스랑 비빔밥 하나씩, 하고 짐짓 크게 말했다. 여기에 화답하듯이 주방에서는 부스럭거리는 소리, 또 냉동실 여닫는 소리가 이어졌다.


"왜? 치즈돈가스 먹지 않고" 엄마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 지난번에 먹었었는데"


"응"


"치즈가 내 몸에 좀 안 맞더라고. 하루 종일 소화가 안 돼서"


"그러니? 빈이가 그런 줄은, 엄마는 전혀 몰랐는데"


"왜, 전에 내가 방귀 엄청 뀐 날 있잖아. 그 때야" 내가 말했다. 엄마는 뜨악한 표정을 잠시 짓더니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엄마는 웃을 때마다 무척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바보 같은 표정을 보고 있자면 '이 사람이 과연 우리 엄마가 맞는가' 싶을 정도로 오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내심 앓고 있던 걱정이나 고민 같은 것들이 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내가 엄마의 웃는 모습을 몹시 사랑했다는 사실이다.


다만 갑상선 기능 항진증 진단을 받은 뒤로는 그토록 작게 웃는 경우도 드물었다. 엄마는 하루 중 대부분을 좁아터진 임대아파트의 단칸방에 누운 채 보냈다. 저녁나절이 돼서 내가 돌아올 쯤에야 잠깐 일어나서는, 누렇게 쉰 밥이나 라면으로 끼니를 챙겨줄 때가 아니라면 정말이지 하루 종일 누워있었을 것이다.


우리 집의 수입이라곤 매월 이십일에 입금되는 육십만 원의 정부 보조금이 다였다. 그마저도 임대아파트 관리비며 공과금을 내고 나면 얼마 남지 않았고, 어머니의 약값과 고등학교 등록금 같은 것들을 빼면 끼니를 거르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친구들이야 수시로 점심 식단에 역정을 냈지만, 나는 아무리 못 나와도 매일 다른 반찬 세 개에 국까지 나오는 학교 급식이 좋았다. 마음 같아서는 집에 싸오고 싶을 지경이었다. 어차피 집에 돌아가서는 오래된 밥처럼 초라한 음식밖에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방학 때만큼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여름 또는 겨울 방학이 시작할 때 즈음해서 동사무소에 가면 종이로 된 식권을 서른 장쯤 받을 수 있었다. 좌석버스 티켓만 한 사이즈의 이 식권은 한 장에 삼천 원만큼의 음식을 사 먹을 수 있게 돼 있었는데, 당연히 모든 식당에서 통용됐던 것은 아니고 동네마다 두세 곳 정도 마련된 제휴 점포에서만 쓸 수 있었다. 동네마다 미세한 차이는 있을지라도 대개는 김밥천국이나 중국집에 국한되는 모양이었다. 실로 현명한 복지였다. 내가 살던 곳처럼 찢어지게 가난한 동네라 하더라도, 소풍 갈 때 김밥 두 줄 사갈 김밥천국 그리고 가끔씩 짜장면이나 시켜먹을 중국집 정도는 있기 마련이니까.


치즈가 몸에 맞지 않는다는 말은 물론 거짓말이었다. 나는 치즈가 좋았다. 치즈를 배 터지게 먹는 꿈까지 꿨을 정도였다. 다만 그때까지만 해도 치즈란 저소득층이 소비하기엔 만만찮은 식품이었다. 치즈돈가스는 그냥 돈가스보다 천 원이나 더 비쌌다. 까짓 거 좋으면 식사에 천 원쯤 더 낼 수 있었을 법 하지만, 우리에겐 식권을 한 개 더 쓰냐 안 쓰냐가 달린 중대한 문제였다.


하여튼 방학이 되면 우리 모자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외식을 할 수 있었다. 김밥천국에서 끼니 한 번 때우는 것이 어떻게 외식이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때의 엄마와 나는 분명히 그걸 '외식'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밥값은 육천 원 또는 구천 원으로 맞춰지곤 했다. 삼천 원 단위로 떨어지지 않으면 남은 금액을 가게 구석에 있는 화이트보드에 이름과 함께 적어야 했는데, 나는 그게 너무 싫었다. 아무렴 그 가게를 들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누구누구가 기초생활수급자라 식권으로 식사를 한다더라'는 걸 알리고 싶진 않았으니까. 생각해보면 나는 가난한 것 자체보다 가난하다고 알려지는 게 더 비참하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누가 가르쳐준 적도 없었는데 말이다.


난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한 반에 마흔 명이 있으면 평균적으로 삼십 등 정도를 했다. 다만 국어성적만큼은 학창 시절 내내 괜찮은 편이었다. 그렇게 잘하는 게 단 하나라도 없었다면 고등학교 3학년이 됐던들 공부를 제대로 시작해보겠단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고등학교 삼 학년으로 올라가는 겨울방학에 접어들 무렵에 수학과 영어 점수를 올려보겠다고 결심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남자들이 질풍노도의 시기에 흔히 부리곤 하는 객기가 하필이면 그런 발전적 방향으로 발휘됐다는 것 밖엔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당장 '공부를 열심히 해보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한들 집안 사정상 과외나 학원은 엄두도 내지 못했고, 기본도 없는 상황에 학교 수업을 따라가는 것도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우리 학교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던 친구에게 다짜고짜 찾아가 내 상황을 설명하곤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내 표정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수학의 정석과 성문종합영어를 사서 다섯 번 이상 공부해'라고 말했다. 지금 떠올려보면 참 성의 없는 조언이었는데, 당시의 나로선 별달리 선택지도 없어 그마저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당장 끼니가 아쉬운 상황에서, 수학의 정석 네 권(당시의 문과 수학은 네 권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과 성문종합영어를 살 돈이 어디서 불쑥 나타나는 것도 아니었다. 어렵사리 엄마에게 말을 꺼내봤지만 시큰둥한 반응뿐이었고, 다음날 잔뜩 취한 채 새벽에 들어와서는, 이제 와서 니가 무슨 공부냐, 네 미래는 나처럼 구질구질할 것이다, 너는 태생이 돌대가리니 대학은 꿈도 꾸지 마라, 같은 말들을 퍼붓고는 잠들어버렸다. 나는 엄마에게 이럴 거면 왜 낳았느냐고 소리를 지른 뒤 뛰쳐나왔다. 우리 모자는 서로에게 가장 상처가 되는 말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날, 나는 불현듯 아이디어가 떠올라 동사무소로 향했다. 세대주인 엄마 이름을 대신 대고 식권 뭉치를 받아오는 건 쉬웠다. 동네의 주정뱅이 아저씨에게 장당 이천오백 원에 팔아치우는 일은 그보단 조금 더 번거로웠다. 나는 아저씨와의 지루한 협상 끝에 장당 이천 원에 팔아치워 육만 원 정도 되는 돈을 받아낼 수 있었고, 그 길로 학교 앞 서점을 찾아가 정석이며 성문종합영어 그리고 표지에 유명 사립 대학의 건물이 그려져 있는 공책 몇 권을 사서 돌아왔다.


다음 날, 엄마는 아침 일찍 동사무소에 간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이십 분쯤 지나 돌아온 엄마는 손에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있었다. 나는 몇 년 만에 종아리를 실컷 맞았고, 마침내 울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이럴 거면 왜 낳은 거야, 공부도 못하게 할 거면 왜 낳은 거냐고? 다른 애들은 엄마가 공부를 못 시켜서 안달인데. 왜 나는 책도 못 사서 이 모양 이 꼴이어야 해? 엄마한테 엄마 자격이나 있는 거 같아? 말해봐!"


나는 내가 느꼈던 좌절감과 종아리의 고통 같은 것들을 조금이나마 되돌려주고 싶었고, 그 경멸적인 말들이 엄마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될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상처는 영원히 아물지 않기도 한다는 사실만큼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 겨울 방학 동안 우리 모자는 단 한 번의 외식도 하지 못했다. 나는 책을 산 뒤로 방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책만 쳐다봤고, 또 일 년 동안은 엄마와 말 한 번 섞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난 친구의 조언대로 정확히 정석을 다섯 번, 성문종합영어를 여섯 번 반복해 공부했다. 처음 한 번은 반년이 걸렸지만 두 번째 할 땐 한 달 밖에 걸리지 않았고, 세 번째 네 번째는 보름씩, 마지막 대여섯 번째는 열흘만에 끝낼 수 있었다. 수능 직전의 모의고사에선 지방 국립대에 지원할 수 있을 정도의 성적을 받았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4년제 대학은 꿈도 꿀 수 없었던 걸 생각하자면 실로 놀라운 발전이었다.


수능을 일주일쯤 앞뒀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마지막 모의고사의 결과에 고무된 상태였는데, 얼마나 들떴던지 엄마에게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지원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엄마는 아주 짧게, '잘 됐네'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 수능 날이었다. 날이 몹시 추웠고, 이른 아침부터 싸라기눈이 내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결과적으로 꽤 좋은 점수를 받았다. 백분위상으로는 마지막으로 친 모의고사보다도 좋은 성적이었다. 나는 서울에 있는 학교에 두 개의 원서를, 지방의 국립대에 하나의 원서를 각각 넣었다.


그렇게 결과를 기다리던 어느 날이었다. 새해가 밝았고, 추위는 더욱 거세져 길에 얼음이 얼었다. 나는 친구들과 수능 뒤풀이로 술을 거나하게 마신 뒤에 집에 돌아왔는데, 웬일로 엄마가 자지도 않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는 취한 날 더러 '잠깐만 여기 와서 앉아보라'고 했다. 내가 다가가 앉자, 엄마는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문득 말을 꺼냈다.


"어느 학교에 지원했어?"


"몰라요" 나는 퉁명스레 대답했다.


"모르다니? 네가 지원한 학교잖아"


난 엄마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엄마에게는 내게 그런 질문을 할 자격도 없다고조차 느꼈다. 싸늘한 정적이 이어졌다.


"서울로 갈 거니?"


"글쎄요. 결과를 봐야 알겠죠"


"그러니"


"네" 내가 말했다. 엄마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정월이 지나 2월에 접어들 무렵, 나는 서울에 있는 한 대학으로부터 합격통지를 받았다. 그리고 그 날 부로 짐을 싸기 시작해 인터넷으로 학교 근처에 있는 하숙집 한 곳과 연락하곤 그대로 상경길에 올랐다. 난 그 뒤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얼마지 않아 동사무소의 복지 담당자로부터 '일을 해서 근로수당을 받게 되면 기초생활수급대상에서 탈락하게 된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그쪽 맘대로 하라'고 말한 뒤 전화번호를 차단해버렸다.


한편 정부는 식권분실문제와 실질적 현금화 등의 '악용 가능성'을 뒤늦게 인식한 나머지, 급식지원방식을 수정하고자 했다. 그리고 다음 해부터는 기존의 종이식권에서 매일 몇 천 원의 한도가 정해진 복지카드로 바꿔 지급하기 시작했다. 다만 그땐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버린 뒤였고, 엄마와 나는 두 번 다시 외식을 할 수 없었다.


<복지병>, 201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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