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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Apr 18. 2019

습작

스물세번째

"악!!!" 민희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개빡쳐, 진짜!"


현관에 신발을 벗어두고 방에 들어갔다. 민희가 모니터 앞에 엎드려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방안에 가방을 놔두고 부엌에 갔다. 목이 말랐다.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한 컵 따라 마셨다. 그러자 방에서 민희가 걸어 나왔다.


"나도 한 잔 줘"


민희가 말했다. 나는 말없이 새 컵을 꺼내 우유를 따라줬다. 어지간히 답답했던 모양인지, 민희는 컵에 따른 우유를 대번에 다 마셔버렸다. 그리고 하얗게 묻은 입가를 손목으로 훔쳐 닦았다.


"무슨 일인지 안 물어봐?"


"무슨 일인데?" 내가 물었다.


"아, 짜증 나. 언니는 내 일에 관심도 없지? 수험생이라서 아주 좋겠어, 정말"


"무슨 소리야. 토요일에 학교도 안 가는 주제에. 세상 참 좋아졌네"


"나 내일 아침부터 친구들이랑 롯데월드 가기로 했단 말이야"


"그래? 팔자 좋네. 잘 놀다 와"


"아니, 그게 아니라. 가방을 새로 샀거든"


"아아, 먼젓번에 말했던 그거야?"


"아니, 그건 시슬리 꺼고. 돈 좀 보태서 코치로 바꿨어. 생각해보니까 내가 까만 게 없더라고"


"참내, 놀이공원에 그런 걸 들고 가? 너 중학생 아니지?"


"아! 그러니까, 못 들고 가게 생겼단 말이야! 새 가방을!"


별안간 민희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 나서 옆에 있던 우유통을 들어 한 컵 더 따라 마셨다. 그래 봤자 민희의 키가 더 클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은 더 크지 않았으면 좋겠다. 민희는 작은 쪽이 더 귀여우니까.


"내 말 듣고 있어?"


"듣고 있어. 왜 못 들고 가게 됐는데? 불량품이면 하루만 쓰고 교환하면 되잖아? 얼마나 심하길래"


"불량이면 차라리 낫지. 그것보다 더 심해. 아예 도착도 안 했으니까"


"아, 그건 늦게 주문한 니 잘못이지. 난 또 뭐라고. 그냥 포기하고 백팩이나 매고 가는 게 어때?"


"유난히 짜증 나는 소리만 골라서 하네?"


"음, 미안해"


"됐어. 늦게 주문하지도 않았고, 오늘 도착하기로 돼있었단 말이야" 민희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보고 있으려니 조금 안쓰러운 기분이 들었다.


"일정이 좀 바뀔 수도 있지. 짐을 늦게 실었다거나…… 엄청 기대했을 텐데 좀 안 되긴 했네. 힘내. 뭐, 흔히 있는 일이니까……"


"아니. 차라리 다음 주로 시원하게 밀려버렸으면 나았을 거야. 이리 좀 와볼래?"


민희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몸을 돌려 방으로 향했다. 나는 별생각 없이 따라 들어갔다. 민희가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 마우스를 휘젓자, 절전 상태였던 모니터의 전원이 켜졌다. 지도가 그려져 있는 어떤 웹사이트였다.

"이게 뭔데?" 내가 물었다.


"배송 조회 시스템이야. 내 택배가 어디서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볼 수 있어. 도착 예정 시간도 볼 수 있고…… 이거 보여?"


민희가 가리킨 모니터 왼쪽 아래에는 <도착 예정 시간 : 오후 4시 13분 53초> 라는 텍스트가 띄워져 있었다.

"이야, 요즘은 배송추적이 이렇게 돼? 무서운 세상이네" 나는 정말 놀랐다.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지금 몇 시야?"


"다섯 시 이십이 분인데…… 어? 지났는데?"


"그치? 한참 지났단 말이야. 내가 혹시나 해서 여기 나와 있는 택배 아저씨 번호로 확인 전화까지 했거든. 늦어도 네 시까지는 온다고 그랬어. 근데 여기 봐. 여기 골목에서 멈춰가지고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니까? 이러니까 내가 답답해 죽어, 안 죽어?"


정말이었다. 지도 위에 떠있는 화물차 아이콘은 근처 행정동에 있는 어느 골목에 멈춰서 꼼짝도 않고 있었다. 그 골목은 전통시장으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아주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걸어서는 이십 분이 넘게 걸리는 곳이었다. 마땅한 버스 노선도 없어서 웬만하면 갈 일이 없는 장소였는데, 엄마가 먼 길까지 장 보러 가는 취미가 없었다면 영영 몰랐을 동네였다.


"다시 전화는 해봤어?"


"어, 안 받아. 신호만 엄청 가고 안 받는다니까? 이게 뭐야?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내가 봤을 땐 이 아저씨 이거, 여기에 있는 국밥집 가서 설렁탕에 소주 때리고 있는 거야. 이유야 뭐 다양하겠지? 딸자식이 모의고사를 완전히 망쳐 왔다든가……"


"하긴 거기 국밥집이면 그럴 만 해. 근데 방금 그건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지?"


"아니? 난 그냥 예시를 든 건데? 오늘따라 언니가 좀 예민하네?" 민희가 이죽거렸다.


"그런데, 안 움직이면 니가 그냥 가지러 가면 안 돼? 답답한 사람이 우물 파는 거잖아. 좀 멀긴 하지만"


"귀찮아. 그리고 원래 내 일도 아니잖아? 택배 아저씨가 잘못한 걸 왜 내가 가지러 가야 돼? 그리고 이거 가지러 갔는데 이미 다른 데로 가있으면 어떡하라고?"


그즈음 현관에 인기척이 났다. 나가보니 마침 엄마가 무지막지한 쇼핑백을 집 안쪽에 내려다 놓고 신발을 벗고 있었다.


"아유, 서희야, 이리 와서 이 것 좀 들어서 부엌에 놔줄래?"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요? 아, 이 아줌마 코스트코 갔다 왔네. 그러게 어지간히 좀 사지. 혼자 다 갖고 오지도 못할 걸…… 차 끌고 갔던 거예요?"


내가 물었다. 코스트코의 빨갛고 거대한 쇼핑백에는 민희가 좋아하는 치즈볼이며 케틀칩, 또 몇 리터 짜리 화이트 와인과 올리브유 같은 것들이 들어있었다. 나는 두 손으로 쇼핑백 양쪽의 손잡이를 잡아끌어서는 부엌에 가져다 놓았다. 엄마가 끙끙대는 소리와 함께 뒤따라왔다.


"어휴. 오랜만에 차 끌고 나갔는데 엄청 막혔어. 중간에 사고가 났는지 어쨌는지 움직이질 않더라, 얘. 엄마는 허리가 아파서 좀 쉬어야겠어. 민희는?" 엄마는 말하면서 거실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소파에 파묻히듯이 주저앉았다.


"방에 있어요" 내가 대답했다.


"그래. 나는 눈 좀 붙일게"


"아, 엄마!" 나는 금방 잠들려던 엄마를 불러 멈췄다. "저 차 좀 끌고 나갔다 와도 돼요? 어디서 가져올 물건이 있어서 그런데"


"그래? 너 운전할 수 있겠니? 연습 좀 했어?"


"네. 아빠가 많이 도와줬어요"


"그래, 그럼 다녀와라. 어디 안 긁게 조심하고. 도색을 얼마 전에 새로 했잖아"


"알았어요"


나는 짧게 대답했다. 차를 끌고 나오니 바람에 봄 냄새가 물씬 풍겼다. 구태여 밖으로 나온 것이 민희 때문만은 아니었다. 단지 조금 답답한 마음에 드라이브를 하고 싶었다. 운전은 최근에 취미를 붙였다. 취미라 봤자 기껏해야 일주일에 한 번 할까 말까였지만, 매일같이 붙잡고 있는 미적분보다 빨리 느는 게 여간 신기하지 않았다. 아무튼 난 바람도 쐬고 드라이브도 하면서 겸사겸사 택배 차량이 멈춰있는 곳에 들러서 민희의 가방을 찾아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드라이브는 집에서 얼마 가지도 않아 멈췄다. 차가 막히다 못해 거의 움직이질 않았다. 조바심이 들었다. 민희가 고맙다며 큰 절까지 해댔던 차였다. 택배 차량이 먼저 출발 해버 리거나 해서 놓치는 경우엔 입장이 웃기게 될 것 아닌가? 나는 차를 골목 안쪽으로 몰고 들어가서, 걸어 다니는 사람과 길가에 주차돼있는 차 사이를 부대껴 지났다.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서 십분 간 운전한 끝에, 나는 지도에 표시된 골목에 도착했다. 그 골목 안 쪽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사고 현장이 있었다. 봉고차 한 대가 택배차 운전석을 왼쪽에서 들이박은 모양새였다. 운전석이 반파된 택배차 옆에는 구급차 한 대와 경찰차 두 대가 와 있었고, 봉고차 운전수처럼 보이는 중년의 아저씨가 경찰과 마주 서서는 무어라 설명을 하고 있었다.


택배 아저씨는 그대로 의식을 잃어 구급차에 실려간 지 오래였다. 봉고차는 아무도 없던 조수석으로 들이받았다는 것이 그나마의 다행이었다. 원래부터 신호등 구조가 희한해 사고가 많던 길목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크게 사고가 난 것도 처음이고, 직접 사고 현장을 보게 된 것도 나로선 처음이었다.


택배 차량 뒤쪽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가서 보니 사람들이 열려있는 차량 컨테이너 앞에 줄을 서있었고, 한 명씩 안에 들어가 자신의 택배를 들고 나오는 중이었다. 나는 복잡한 마음으로 줄 맨 뒤쪽에 섰다. 내 앞에 서있던 아주머니는 쯧쯧 혀를 차면서, 젊은 양반이 안 됐어, 혼잣말을 하고는 자그마한 택배 상자를 들고 떠났다.


머잖아 내 차례가 됐고, 나는 사고가 난 택배 차량의 컨테이너 안에 들어갔다. 내부는 캄캄했다. 다행히 민희에게 갈 택배는 컨테이너의 문짝 바로 앞에 있었다. 언제든지 갖다 줄 준비가 됐다는 듯이 거기 있었다. 난 말없이 택배 상자를 들고 컨테이너에서 나왔다. 내 뒤에 서있던 중년의 남자는 내가 나오기 무섭게 컨테이너에 올라탔다. 박스를 이리저리 헤집는 소리가 뒤따라왔다.


상자를 들고 돌아가면서, 나는 거의 형체도 남지 않은 택배차 운전석을 쳐다봤다. 가죽시트와 부서진 운전대 아래로 피가 흥건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금방 몸에서 나온 것처럼 따뜻해 보이는 피였다. 난 한동안 그 피가 떨어져 고이는 광경을 지켜보다가, '원활한 교통을 위해 빠르게 이동해달라'는 경찰의 말에 되돌아와 운전대를 잡았다. 그러다 차창 너머에 있는 가게 하나가 눈에 띄었다. 지도로 봤던 그 국밥집은 불이 꺼져 있었다. 난 그 유명한 국밥집이 매월 두 번째, 네 번째 토요일에만 쉰다는 사실을 뒤늦게 기억해냈다.


"우와!" 민희는 택배 상자를 열고 가방을 꺼내자마자 탄성을 질렀다. "너무 이뻐! 모니터로 보던 거보다 훨씬 이쁘네? 대박이다, 진짜"


"그래, 그래" 나는 힘없이 대답했다. 오랜 시간 운전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새 에너지를 다 써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엄마는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자고 있었다.


"봐봐, 예쁘지? 솔직히 언니 꺼보다 예쁘다. 인정?" 새 가방을 왼쪽 어깨에 맨 민희가 이리저리 자세를 잡아 보였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에이, 뭐야. 왜 이렇게 진이 빠졌어. 택배 아저씨랑 싸웠어? 아저씨가 뭐래? 진짜 술 마시고 있었어? 참내. 일을 뭐 이런 식으로 해서 사람을 귀찮게 만드는 거야? 언니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잖아"


"뭐, 큰 일 까지야……" 내가 말했다. "그냥 미안하다셨어.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거기서 움직일 수가 없었대. 너한테 특히 미안하다더라"


"개인적인 사정이라니? 그럼 연락도 안 받아도 괜찮은 건가? 돈 받고 일하시는 거면 책임감 있게 해야 하는 거 아냐? 거기 택배사 별로다,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겠지. 미안하시대잖아"


"그래, 뭐…… 이미 끝난 일이니까. 고마워, 언니"


민희의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민희는 잠깐 내 표정을 살피다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뉴스에는 '신호를 착각한 봉고차가 화물차를 들이받는 사고로 교통이 마비돼 많은 운전객들이 불편을 겪었습니다' 로 시작하는 짧은 보도가 있었다. 인근 대학병원으로 실려갔다던 택배 아저씨는 긴급 수술을 통해 살아났지만, 하반신을 영구적으로 쓸 수 없게 돼버린 모양이었다.


택배 아저씨는 더 이상 택배를 옮기지 못해 그냥 아저씨가 됐다. 다만 다음 주면 새로운 택배 아저씨가 와서 우리 집 현관에 박스를 가져다 놓을 것이다. 나는 조용히 합장한 채, 아저씨가 택배사로부터 산업재해를 인정받고 최대한 많은 보험금을 받을 수 있길 기도했다.


<총알, 배송>, 2019. 4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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