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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Apr 17. 2019

습작

스물두번째

"그때는 정말 탈영이라도 하고 싶었어. 진심이라니까" 내가 말했다.


"물론이지. 여기에 그거 이해 못하는 사람이 어딨겠어?" 테이블에 둘러앉은 친구 가운데 한 명이 소주잔을 휙 들이켰다.


"생각해보면 쟤만 한 사랑꾼도 없었지. 소현이랑 얼마나 사귀다 헤어졌던 거야? 중학교 때부터 사귀지 않았어?"


"중학교 때부터 사귀었을 걸" 내 옆에 앉은 친구가 대신 대답했다. 나는 소주를 마신 뒤에 얼굴을 매만져봤다. 손에 닿는 온기만으로도 얼굴이 무척 벌겋게 달아올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테이블 왼쪽 사이드에는 소주가 열 병도 넘게 쌓여있었다.


"그런데 진짜 너무한데. 십 년 넘게 사귀었으면, 아무래도 그렇잖아?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게 말이야. 나는 너희가 정말 결혼할 줄로만 알았거든"


"나도 그럴 줄 알았지" 내가 말했다. 혀가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머니도 날 마음에 들어하셨었고…… 아버지야 딸 남자 친구를 마음에 들어하기가 쉽지 않으니까, 뭐. 내가 군대를 늦게 가기도 했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말은 안 했는데, 소현이 걔는 뭐랄까. 좀 세속적인 면이 있었다니까. 나쁘게 말하면 사람이 약삭빠르다고 해야 하나" 친구가 말했다. 내 주변으로 이상야릇한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다. 다만 이와 별개로 동창회의 분위기는 한껏 무르익는 모양새였다.


"맞아. 이런 말 하긴 좀 뭐하지만. 이렇게 된 마당에 얘길 하자면. 강대훈이 공부를 잘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소현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었거든. 좀 불안 불안했어"


"그치. 그때도 자기 급 정도 되는 애들만 주위에 놔뒀어. 왜, 집 잘 살고 공부 잘하는 애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비슷한 수준이 아니다 싶으면 사람 취급도 안 하는 그런 부류였지. 소현이 친구들은 뭐 하나라도 특출 난 게 있어야 해. 엄청 공부를 잘하거나, 집이 존나 잘 살거나, 얼굴이 개 이쁘거나……"


예전에 아무리 친했다고 한들, 거의 십오 년 만에 만나는 사람들이라면 다소 어색한 분위기일 수밖에 없다. 박박 깎은 머리에 음료수 캔 하나 들고 매점에서 나오던 녀석들은 그새 어른이 됐고, 술집에 모여 앉아 약속이나 한 것처럼 안주와 술을 시켰다. 술 없이 대화하는 방법은 이미 오래전에 잊어버렸다는 듯이.


술집에는 주황색 전등이 일제히 침침한 빛을 밝히고 있었다. 또, 곳곳에 붙은 낡은 스피커로부터 보사노바 풍의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한때 음울하기까지 했던 동창회는 소현이에 대한 뒷담화로 말미암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나는 마음이 썩 편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좋다는 기분으로 계속해서 술을 들이부었다.


"그런데 뭐, 나는 솔직히 그렇게 생각해" 친구 가운데 한 명이 왁자한 분위기를 비집고 운을 뗐다. "소현이는 결국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여자였던 거라고 말이야. 우리가 어렸을 때야 소현이가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뭐 선망의 대상처럼 여겨질 수 있었겠지. 근데 사람은 당장의 모습보다는 먼 미래를 볼 줄 알아야 하는 거 아니겠냐. 겉모습보다는 안쪽의 포텐셜을 꿰뚫어 봐야지. 여기 어디 대훈이가 로스쿨 때려치고 창업할 거라고 생각한 사람 있었어? 솔직히 하나도 없지 않냐? 또 그게 성공할 거라고는 더 생각 못했겠지. 사실 소현이만의 잘못은 아니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걸 못 봐. 큰 물을 못 보고, 당장 졸졸 흐르는 강이나 보고 자빠졌지. 대훈이는 용이었어. 아무리 개천에서 태어난들 용은 용이야. 용은 바다로, 하늘로 가야 한단 말이지. 소현이 같은 인간은 평생 강에서 물놀이나 하라고 해. 대훈이는 이제 더 위대해질 일만 남았으니까!"


친구의 일장연설이 끝나자마자, 테이블에 둘러앉은 열댓 명의 남자들은 옳소, 옳소, 떼창을 한 다음, "대훈이를 위해 건배!" 하며 저들끼리 잔을 부딪히고 들이마셨다. 나도 함께 마셨다.


"근데, 소현이는 대체 누구한테 시집을 간 거냐?" 친구 하나가 물었다. 입에서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내가 알기로는 뭐, 검사였다는데. 나이도 소현이보다 여덟 살인가 많다고 하더만" 이번에도 대답은 내 옆의 친구가 대신했다. 나는 편하면서도 불편한 기분이었다.


"참내. 집도 잘 살면서. 그만큼 먹고살면 됐지, 뭘 더 잘 먹고 잘 살겠다고 검사한테 시집을 가냐?"


"그냥 검사는 아니고 부장검사인가 그렇다던데? 결혼정보회사 통해서 결혼했다더라고"


"진짜? 아, 하기야 그렇겠네. 대훈이 군대 가있는 동안 손절하고 그렇게 빨리 결혼한 거면 그거밖에 없지"


"심지어 그 상대방이었던 검사는 재혼이었어"


"뭐?" 멋대로 주고받고 있던 친구 두 명이 돌연 날 쳐다봤다. 나는 어쩐지 태연한 척 애를 쓰고 있었다. "이야, 대훈이는 정말. 어떻게 뭐 복수할 방법 없냐?"


"야, 검사는 우리나라에서 좀 쎄"


"쎄면 얼마나 쎄다고 그래? 부장검사 연봉이 얼마냐? 우리 대훈이는 지금 회사에 직원이 몇 명인데. 몇 명이더라? 대훈아" 친구는 내게 어깨동무를 하며 물었다. 내가 들고 있던 잔 속의 맥주가 흔들려 바지에 조금 흘렸다.

"글쎄…… 잘 기억은 안 나는데. 파견 나가 있는 사람들까지 치면 삼백 명은 넘을 걸"


"캬, 삼백 명!" 듣고 있던 친구들이 탄성을 질렀다. "수천 억 짜리 회사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 야, 대훈아, 회사에 나 놓을 자리 없냐? 니 커피는 내가 기가 막히게 탈 수 있는데 말이야……"


"이 병신 새끼야. 대훈이가 너 같은 놈이 탄 커피를 왜 마시냐? 졸라 예쁜 담당 비서가 타 줘야지……"


"우리 회사에 비서는 없어" 내가 말했다.


"어, 왜 없어? 필요가 없어서?"


"나 혼자 할 수 있으니까" 내가 대답했다.


"에이, 그래도 한 명 뽑아야지. 너 와이프 분도 예쁘긴 한데. 이십 대 영계가 내 사무실 앞에서 돌아다니면 일이 훨씬 잘 될 거 같지 않냐?"


"대훈이는 너처럼 안 하니까 성공을 한 거야. 너처럼 술 밝히고 여자 밝히는 인간이 성공을 못하는 이유가 그런 거라고"


"아니 씨발, 상상 정도는 할 수 있는 거잖아"


이젠 제법 수런거리는 분위기가 익숙해졌다. 술집에 있던 녀석들은 삼삼오오 모여 다른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내 옆 자리의 두 친구만이 나와 내 회사 그리고 소현이에 대한 얘기로 입방아를 찧고 있었다. 그 사이 나는 술이 떨어진 걸 발견하고, 서빙하던 젊은 친구 한 명을 불러 세워서 해물부추전이며 오뎅탕 같은 안주 몇 인분과 소주 열댓 병을 더 가져 다 달라고 했다. 그리고 외투와 짐을 챙긴 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하고 테이블 중앙에서 빠져왔다.


나는 카운터에서 계산을 한 뒤 빠져나왔다. 술값과 안주를 모두 계산했더니 오십만 원이 조금 안 됐다. 저녁나절만 해도 네이비색이었던 하늘은 어느새 깜깜해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술집 뒤꼍에 있는 작은 마당에는 담배 피우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자켓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불을 붙였다. 죽도록 맛없는 담배였다. 나는 두 모금도 채 피지 못하고, 거의 멀쩡한 꽁초를 바닥에 비벼 끈 뒤 주차장으로 향했다. 내 등 뒤로 희뿌연 담배연기가 새카만 하늘로 피어오르다 사라지고를 반복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대리기사가 도착했다. 나는 상석에 올라타 주저앉았다가, 이내 드러누웠다. 시동 걸리는 소리가 이어졌고, 창밖으로 서울의 가로등 불빛이 수십 번 연달아 깜빡였다. 나는 이를 꽉 깨물어가며 죽어라 일했던 지난날들을 떠올렸다. 자신이 내버린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위대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고, 매일 같이 눈물을 펑펑 쏟으며 후회로 가득 찬 삶을 살 소현이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소현이의 삶은 내가 짓밟기에 너무도 보잘것없었다. 내가 되찾고 싶었던 것은 소현이의 마음이 아니라, 누군가를 그토록 사랑해마지않던 내 자신이었다. 나는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기다리고 있는. 아름다운 한강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내 명의의 아파트로 되돌아간다. 너무도 순수하게 소현이를 사랑했던 나는, 이제 그 빈 공간을 출세욕과 승부욕, 정복욕과 소유욕, 몇 잔의 술과 담배연기로 메우고 있었다. 아, 바다가 보고 싶다, 바다, 바다……


<돌아갈 수 없는 강>, 2019. 4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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