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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Apr 19. 2019

습작

스물네번째

오늘 아침에는 미세먼지 주의보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낀 채 밖에 나왔다. 코와 입을 단단히 틀어막은 채 전철 플랫폼과 버스정류장과 횡단보도 앞에 서있었다. 나는 쓰고 있던 헬멧 안쪽에 낡은 마스크를 비끄러맸다. 그렇잖아도 작은 콧구멍인데, 마스크까지 하고 있으려니 숨쉬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학원과 독서실이 늘어선 거리 너머로 산허리가 흐릿하게 보였다. 먼지가 없는 날에는 허리 너머 봉우리까지도 보이곤 한다.


"안녕하세요. 카드 계산이신가요?"


오전 열 시 반에 첫 배달을 시작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그 초췌한 인상의 남자는 반지하에 살고 있었는데,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 매일 같이 밤샘을 하는 모양이었다. 메뉴는 늘 뚝배기 불고기 아니면 된장찌개였다. 남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뚝뚝하게 카드를 내밀었다. 반지하에서는 카드 단말기가 잘 반응하지 않았다. 매번 계산을 할 때마다 현관 앞으로 나가 신호를 기다려야 했는데, 고작 몇 초가 그만큼 길게 느껴지는 경우도 많지 않을 것이다.


사실상의 점심시간이 시작되는 열한 시 반부터 두 시 언저리까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밥때가 돼서 허기진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배달음식으로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하려는 병원의 간호사들, 학원 강사들, 작은 사업장의 회사원들이며 공사현장의 아저씨들까지 주문을 넣는다. 이 와중에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은 지옥과 다름없다. 육칠층 되는 계단을 오르내리고 나면 숨쉬기가 벅차다. 숨이 턱턱 막힌 나머지, 마스크를 벗고 먼지가 자욱한 공기를 폐 속 가득히 들이마셨다. 실로 비극적인 상쾌함이다.


주문이 무지막지하게 밀릴 때는 오토바이 트렁크에 모두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음식이 많다. 그럴 땐 상대적으로 부피가 크고 가벼운 걸 골라 비닐 손잡이를 팔에 걸어놓는다. 그렇게 하다가 한 번은 돈가스 소스가 넘치는 바람에 한 소리 들어먹기도 했지만, 금방 요령이 생겨 몹시 바쁜 와중에도 음식의 평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달리 더 괜찮은 방법이 없기도 했다.


점심식사는 세 시가 조금 넘어서 잠깐 한다. 대행업체마다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우리 같은 경우 임금에 식대를 포함시킨 뒤 알아서 해결하게끔 한다. 누군가 제때 점심식사를 하려면, 누군가는 조금 늦거나 이르게 먹을 수밖에 없다. 나보다 일 년쯤 일찍 시작한 어떤 아저씨는 매일 들고 다니는 치킨이며 일식 돈까스며 함박 스테이크 냄새 때문에 수시로 폭식을 하곤 했다.


다행히 나는 거창하게 식사하는 편이 아니고, 편의점에 들러 초콜릿바와 조미된 계란 두 알 그리고 캔커피를 사 와서 해결한다. 식사 자체에는 십 분도 걸리지 않는다. 남는 시간에는 휴대폰을 본다. 가족과의 연락을 간단히 하고, 친구들이 있는 단톡방에서 농담을 몇 번 한 뒤에는 스포츠 기사를 몇 개 본다. 또 어젯밤 손흥민이 집어넣은 멋진 골 영상을 다시보기로 시청한다.


나 같은 사람들에게 손흥민은 참 애증의 존재다. 젊은 나이에 타국에서 멋진 활약을 보여주는 건 좋다. 다만 며칠에 한 번 저녁나절이 무지하게 바빠지는 경우 십중팔구는 손흥민이나 국가대표팀 경기가 있는 날이다. 그런 날 배달지에 도착할 즈음이면 대체로 분위기가 무르익어 있다. 어쩔 땐 환호와 탄성이 터져 나오기도 하는데, 마침 타이밍 좋게 골이 들어간 경우다. 이런 경우 계산을 하러 나온 사람은 아쉬운 표정이 역력하다. 나는 어쩐지 미안한 마음에 몇 번이나 사과를 할 뻔했다.


밤에는 짓궂은 사람들이 꽤 있다. 열 시가 넘은 시간에 모텔 같은 숙박업소에서 주문이 들어오면 벌써부터 골치가 아프다. 대부분은 가운 차림의 남자가 받지만, 아주 가끔 알몸에 가까운 여자분이 받을 때가 있다. 방 안쪽의 남자가 오락거리 삼아 나를 놀려먹으려는 경우다. 한 번은 어떤 남자가 다 벗은 여자를 계산하도록 보내 놓고는, 뒤에 서서 허락도 없이 동영상을 찍고 있었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는 그런 비참함이 단 일 분만 참고 넘기면 사라질 줄로만 알았다.


돌아와 옷을 갈아입을 때는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는다. 오토바이를 타고 하루 종일 동네 곳곳을 들쑤시고 다녔으니 당연한 분위기다. 다만 장대비가 우수수 쏟아지거나, 함박눈이 펑펑 내리거나, 오늘처럼 먼지가 자욱해 가슴이 매캐할 때는 우리끼리 의미 없는 신세타령을 주고받기도 한다. 이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이러다 사고 나면 보험금은 잘 나오려나, 내 인생에 볕 들 날은 언제쯤 오나, 같은 말들이다.


최근 들어 날씨가 많이 풀리긴 했지만, 늦은 밤에는 여전히 을씨년스런 바람이 분다. 오랜만에 확인한 휴대폰에 긴급재난문자가 와있었다. 내일도 탁하고 둔중한 먼지 덩어리가 서울 상공을 뒤덮을 예정이라고 한다. 자취방에 도착하자마자 오래된 설거지 냄새가 풍겼다. 나는 만사 귀찮은 기분이 들어서,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눕곤 이내 잠들었다.


그날 밤 꿈에서 나는 오로라를 봤다. 저 멀리 알래스카의 보라색 산맥에 서서, 녹색과 적색, 하늘색과 바다색이 밤하늘에서 꿈틀거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북극광은 별빛을 수놓은 면사포처럼 희미한 구름을 휘감았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 황홀한 광경에 넋을 빼놓고 있었다. 극지방의 추위를 견디기 위해 부대끼고 있는 펭귄도, 무너지는 빙하 위에서 잠 못 들던 곰도, 얼음 지붕을 둥글게 뚫은 이누이트까지 모두 총천연색의 오로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비로운 빛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눈을 떠보니 아직도 새벽녘이었다. 낡은 커튼 사이의 틈으로 희끄무레한 빛이 스며들었고, 나는 일어나 커튼을 걷으면 하늘에 오로라가 펼쳐져 있을 것 같았다.


<배달불가지역>, 2019. 4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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